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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54화 (54/144)

54화

“내가 손자 놈이 둘만 됐어도…….”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면서 뒤쪽에 만신창이가 된 채 구겨져 있는 안 실장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도 아랫사람 겁주는 법은 잘 배웠구나. 조련을 할 거면 상벌을 확실히 해야지. 그거 하난 마음에 든다.”

문 회장은 안 실장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수행 비서들이 바닥과 한 몸이 되기라도 한 양 뭉개져 버린 안 실장을 부축하고 갤리 쪽으로 이동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이차영 사진이랑 경력 조사한 이깟 종이 쪼가리 저한테 보여 주면서 저한테 얻고자 하는 게 뭐냐고요. 겨우 계약서에 서명하는 자리 하나 데려가겠다고 이렇게 판 벌이진 않으셨을 거 같은데요. 저 아주 돌아 버려서 외할아버지까지 치기 전에 말씀하세요.”

“이만 슬슬 양자로 들어와라. 절차는 다 준비돼 있다. 그놈의 한 씨 성이 아주 거슬려.”

“저 멀쩡한 아버지 어머니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지.”

“회장님 눈에 안 차서 죽인 사람들이겠죠.”

얼음장같이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날카로운 눈매로 서로를 증오하듯이 쏘아보는 할아버지와 태주는 아이러니하게도 꽤 닮아 있었다.

먼저 적막을 부순 것은 문 회장이었다.

“태주 너는 다 좋은데…… 항상 쓸데없는 혈기가 과해. 네 외할머니가 워낙 오냐오냐 키워서 말조심을 하는 법도 모르지. 가르칠 게 산더미다.”

“학생에게 의지가 없다면요.”

“의무 교육이라는 것도 있지 않니? 태주 넌 네가 내 밑에 안 들어오고 지근거리에서 버티는 게 나한테 갚아 주는 것 같지? 천만에, 이건 그냥 시간 싸움이야. 내가 너한테 복종하고 기어들어 올 시간을 주고 있는 거다. 너를 길들이고 있다는 의미야. 물론 받은 만큼 갚아 주는 것이 최고의 복수지. 하지만 태주야, 그러려면 복수하고 싶은 대상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 넌 그걸 알아야 돼. 지금의 넌 나한테 상대가 안 된다.”

그가 발끈해서 제 외할아버지에게 달려들려다가, 겨우 주먹을 쥐어 참아 냈다.

“태주야, 내가 가진 걸 전부 물려받아서 나를 치겠다면 그땐 기꺼이 맞아 주마.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가 어디서 뭘 하든 아직은 이 할아비 손바닥 안이야. 네가 내 손바닥 안이면? 차영이라는 아이는…… 신발 굽 아래쯤 있겠지. 벌레 새끼들은 밟으면 그만이다. 네가 안 실장한테 지금 한 짓을 내가 그 아이한테 못 할 것 같아 보이니? 알다시피 난 아주 잔인한 사람이다.”

“…….”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너 하나다. 내 마음에 안 차는 구석이 차고 넘치게 있어도, 어쨌든 넌 내 하나 남은 핏줄이야. 절대 포기 안 해. 아마 네가 먼저 무너지게 될 거다.”

여태까지 살면서 들어온 말들 중 단연 가장 무섭고 끔찍한 저주였다. 그가 부들부들 어깨를 떨고 있는 사이, 때마침 권 부기장이 조심스럽게 일등석 객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장님, 관제 센터와 교신했는데 이제 슬슬 이륙 준비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힐끗 권 부기장의 모습을 살핀 태주는 문 회장에게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분명하게 경고했다. 음성이 무척 낮고, 음험했다.

“당신이 걔 아버지한테 한 짓 잊으셨어요? 차영이는 건드리지 마세요. 걔까지 건드리시면 제가 무슨 짓까지 하게 될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빼앗으시라고요. 당신이 몸에 피가 도는 인간이라면.”

상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뱉은 태주는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와 달리 부기장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문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천천히 허리를 들어 올리던 그는 제 옆을 지나가는 태주의 주먹이 엉망이 된 것을 보더니 사색이 돼서 태주의 뒤를 따랐다.

“아니, 저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손이 그 모양입니까.”

“그냥 부딪친 겁니다. 조용히 가죠.”

“이걸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합니까. 조종간 잡을 기장 손에 그렇게 상처가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이 프로 의식이 없어.”

한 번 경고했던 태주는 부기장이 말을 들어 먹지 않자 조종석 입구에서 멈춰 섰다.

“어째 말이 짧네. 세상 바뀐 지가 언젠데 물정 파악도 못 하나? 자동차 운전보다 쉬운 오토파일럿으로 가는데 손에 상처 타령하고 앉아 있어. 내 손 걱정할 시간에 권 부기장 당신 뇌나 똑바로 달고 다녀. 비행엔 판단 능력이 훨씬 중요하니까.”

차갑게 힐난한 태주는 권 부기장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치고 지나쳤다. 분한지 부글부글 끓는 얼굴을 하던 그도 하는 수 없이 태주를 따라 조종석으로 향했다.

* * *

몇 달 사이 제 인생에서 아주 커다란 변화가 생겼지만, 그래도 차영의 아침 루틴은 쳇바퀴 돌듯 똑같이 돌아갔다. 씻고 나온 그는 기상 상태를 모니터를 통해 확인하면서, 간단하게 식사를 끝마쳤다. 학생 때만 해도 아침에 제대로 챙겨 먹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출근하면 내내 긴장하고 두뇌 회전을 해야만 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규칙적인 습관이 들었다.

출근 전, 현관의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던 차영은 거실 벽면의 마그넷 판으로 빙 시선을 돌렸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그는 제 시선을 빼앗은 방향으로 걸었다. 마그넷 판에 여러 개의 마그넷들이 중구난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지난번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장난을 쳐 봤다가 그대로 방치해 둔 것이었다.

차영은 모양이 제각각인 그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비행기라고 상상한 뒤, 관제를 시작했다.

“장거리와 고도…… 도착지가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

유럽이나 미주 따위의 지역들이 제일 앞자리에 섰다. 자연스럽게 한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들이 가장 뒤쪽에 놓였다.

“기체의 연료 상태.”

뒤쪽에 있는 것들 중 아무거나 손에 골라 제일 앞으로 끌어냈다.

“환자 유무……. 아픈 사람 있으면 안 좋긴 한데. 너 비상 착륙할래?”

그러고는 또 뒤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더 앞으로 옮겨 두자 처음에 앞쪽에 두었던 상대적으로 먼 거리 도시의 마그넷들은 전부 조금씩 밀려 뒤쪽에 포진된 상태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차영은 손가락으로 납작한 판을 툭툭 두드렸다. 졸지에 끄트머리에 위치하게 된 뉴욕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태주 때문이었다.

현재 그는 미국 뉴욕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기 전 그로부터 5박 7일 일정이라고 전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만 거의 하루를 넘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내일이면 그가 귀국하는 날이었다. 그사이에 전화는 한 통도 걸려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차영이 먼저 걸어 보기도 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야속한 음성 안내 메시지만 자신을 기다릴 뿐이었다. 너무 걱정이 돼서 바로 도윤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일정을 물어봤다. 출국 시 동승했던 승무원들을 통해 그녀가 알아봐 준 바로는 항상 뉴욕에 가면 묵곤 했던 계약된 호텔에 체크인하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다른 지역에 갔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초조했을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최악으로 치닫는 상상들을 하면서 그를 끊임없이 원망했을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곳은 돌아가신 그의 부모님들 흔적이 남아 있는 그리운 도시인 듯해서, 그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인생은 인맥이지. 까짓것 한태주가 모는 기체 우선 착륙해 준다.”

뉴욕 마그넷을 다시 제일 앞으로 이동시킨 차영은 뿌듯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차영의 시선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약간 애틋하게 변했다.

그런 자신을 느낀 차영은 서둘러 제집을 뒤로하고 나섰다.

* * *

관제탑은 지상 22층, 지하 2층의 규모로 된 인천 공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탑에서 관제하는 항공기가 하루에 천 대를 훌쩍 넘을 만큼 규모 또한 높이에 필적했다.

천문학적인 가격에 달하는 기계인 각각의 비행기들이 매일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명까지 태우고 하늘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곳이라서 관제사들도 늘 안전 문제가 없는지 긴장해야만 했다. 덕분에 이곳은 매일 숨 가쁘고, 한 가지 일을 해치우면 새롭게 두 가지 처리할 일이 생기는 놀라운 마법이 도는 공간이었다.

현장에서 기상 상황이 떠 있는 모니터를 신중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탑장이, 망원경으로 밖을 내다보는 차영을 불렀다.

“이차영, 시야 잘 보여? 비가 많이는 안 오는데.”

“아직은 괜찮습니다.”

“장마 때는 진짜 폭설 때만큼 심란해. 비가 많이 오면 비행기가 뜰지 걱정, 안 오면 폭염으로 내가 녹아내릴지 걱정.”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리로 돌아온 차영은 관제 통신 시설 장비들 위를 눈대중으로 훑었다. 터미널에서 곧 공항 인근 상공에 도착할 것이라고 올려 보낸 운항표에 뉴욕발 인천행 한국 항공 092편이 있었다. 태주가 모는 것이다. 오늘은 그의 귀국일이었다.

- 「타워 응답 바랍니다. 한국 항공 092 방금 포인트 통과했습니다.」

조종석으로부터 온 연락을 통해 교신을 시도하던 차영은 약간 맥이 빠졌다. 1주일 동안 보채지도 않고 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태주는 제 음성을 들려주지 않았다. 부기장인 듯한 남자가 그에게 착륙을 요청했다.

- 「타워입니다. 한국 항공 092. 33번 우측 활주로에 착륙 허가합니다. 바람은 340도 방향에서 11노트로 불고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33번 우측 활주로에 접근 중입니다. 랜딩 시도하겠습니다.」

「비가 조금 옵니다. 착륙 시 기체 유의 바랍니다.」

- 「네, 고맙습니다.」

실망한 기색의 차영이 무음으로 돌려 둔 제 휴대폰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여태까지도 전혀 울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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