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부기장의 역할은 기장을 보좌해 주는 일이 1순위였다. 운항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혼자 할 수 없는 기장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두 조종사 간의 호흡이 찰떡같이 들어맞지 않는다면 비행도 순조롭지 못했고, 결국은 승객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언젠가 본의 아니게 샴페인을 섭취했다는 이유로 태주가 조종석에서 쫓아낸 적이 있던 권 부기장이 오늘 그의 협력 파트너였다. 운항 팀 사무실에서 기장들이 브리핑을 받을 때는 물론이고 기내에서 최종 합동 브리핑을 위해 모든 승무원들이 모였을 때까지도 두 사람의 사이에선 얼음장 같은 냉기류가 흘렀다.
사실 태주는 자신의 옆에 누가 앉게 되든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특별히 사적으로 교감을 할 것도 아니니 일만 제대로 한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다만 아까부터 권 부기장 쪽에서 계속 심기가 불편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차마 기장인 태주에게 함부로 하거나 항명하지는 못하고 계속 굳은 표정으로 별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운항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어서 그게 약간 마음에 걸렸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사무장이 주는 수신호를 보고 차트를 보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한태주 기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운항할 항공기는 뉴욕으로 가는 한국 항공 091 10시 비행기입니다. 비행시간은 열네 시간가량 예상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천 날씨는 흐리고 많은 양은 아니지만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10시 이내에 뇌우 소식도 있다고 하니 승객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안전 관리 각별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발언을 마치자마자 사무장이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을 얹었다.
“그리고 오늘은 특이 사항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대영 한국 항공 문현기 회장님께서 미국 뉴욕 지역 출장차 우리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하십니다. 전 좌석을 예매하셔서 현재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회장님 한 분인 상태입니다. 장거리 비행 구간 서비스 테스트를 위해 일부러 통으로 비우라고 지시하신 것 같습니다.”
군기가 잘 잡힌 승무원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태주의 피부로도 느껴졌다.
“오늘 서비스에 특히 만전을 기하시고 부디, 제발, 절대로 실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승무원들이 의지를 다지는 사이, 태주는 대충 마무리 인사를 하고 조종석으로 돌아왔다. 스틱에 붙어 있는 체크 리스트를 하나씩 꼼꼼하게 확인하고 이륙 준비를 마쳤다. 뒤이어 승객들의 탑승을 명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인터폰이 울렸다.
“네, 칵핏입니다.”
- 한 기장님, 사무장입니다.
“준비됐습니다. 승객들 탑승하라고 하세요.”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기장님.
“또 무슨 보고 사항 있습니까?”
- 회장님께서 따로 퍼스트 객실에서 뵙자고 하십니다.
“곧 이륙입니다. 기장은 조종석 못 비우는 게 원칙입니다. 그렇게 전하세요.”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외할아버지는 승무원 서비스 테스트를 위해 객실을 전부 비우라고 명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세부적인 것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일임하고 더 규모가 크거나 중요한 일들에 주력하는 탐욕스러운 인사였다. 다만 태주가 제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그는 이 일로 간접적으로나마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장단에 손발 맞춰 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더 보고할 사항 없으면 끊겠습니다.”
- 잠깐만요, 기장님! 한 기장님!
태주가 느긋하게 대답하고 끊으려고 하자, 사무장이 끊지 말라는 양 황급히 태주를 불렀다. 그러고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퍼스트 객실에서 뭔가 지시를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건너편에서 약간의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무시하고 인터폰을 내려놓으려던 태주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 한 기장님, 안 실장입니다. 이쪽으로 좀 와 주셔야겠습니다.
그는 회장의 왼팔이자, 오른팔이었다. 뉴스나 경제지 따위에서 문 회장의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국 항공 직원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가운데 소란이 일자 궁금한 나머지 내용을 엿듣던 권 부기장이 도리어 움찔했다. 태주가 임원진에게 직접 소환될 정도로 뭔가 크게 잘못한 일이 있는가 싶었던지 그를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용건이 있으시면 조종석으로 직접 방문하시라고 하세요. 그런데 어떡하죠. 조종석은 관계자 외 민간인은 출입 금지입니다. 끊습니다.”
- 한태주 기장님, 이 기내에서 소란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는 건 회장님보다는 한 기장님이십니다. 잊으셨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를 철저히 감추고자 했던 건 태주였다. 문 회장은 어느 때라도 기회만 되면 태주가 제 외손자라는 것을 공표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그가 중간에서 어떻게든 가로막았다.
문 회장도 태주가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일을 강행했다가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 사이의 균열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질 것을 염려했는지 이 문제에 관한 한 태주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여태까지는 말이다.
입사할 때 특혜를 입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한국 항공 내의 까다로운 기장 승급 제도를 조금 완화하는 문제였고, 능력이나 조건 등은 충분했으니 태주는 당당했다. 그럼에도 가족 관계 공개로 인해 쓸데없이 의혹 섞인 시선을 받는 게 싫었던 탓이다. 무엇보다 문 회장의 덕을 입었다는 말을 듣는 게 끔찍했다.
- 아마 지금 오지 않으시면 회장님께서…….
깊은 한숨을 내쉰 태주는 선글라스를 벗고 안 실장의 말을 끊었다.
“지금 가죠.”
그러고는 권 부기장에게도 행선지를 알렸다.
“잠깐 퍼스트에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의아해하는 눈길을 보내긴 했지만, 그에 비하면 나이가 지긋한 부기장은 애써 표정을 정리하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조종석을 뒤로한 태주가 문 회장이 자리를 잡고 있을 일등석 객실로 향했다. 이왕 탑승한 김에 여러 가지 서비스들을 테스트해 봐야겠다고 느꼈던 것인지 승무원들에게 이것저것 주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주가 나타나니, 뒤편에 서 있던 안 실장이 그들을 전부 물렸다.
덕분에 좌석 앞에 우뚝 선 태주를 평소 문 회장의 호위무사격인 경호 인력들과 수행 비서 팀이 위협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JFK 공항에 도착하면 넌 날 따라와라. 만날 사람이 있다.”
“사업차 가시는 거 아닙니까?”
“따라와서 계약을 성사시킬 때 할아비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봐야지. 그게 다 공부다.”
“불러내서 이딴 엿 같은 이야기 하실 줄 알았습니다. 알고 온 제가 등신이죠. 협박하는 데 소질 있으시긴 하던데, 그래도 두 번은 부르지 마세요. 부기장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만 가 볼게요.”
“태주야.”
문 회장은 그대로 돌아서려는 그를 향해 종이를 내밀었다. 꽤 두툼했다.
미심쩍어하는 눈길로 그것을 받아 든 태주는 한 장을 뒤로 넘겼다. 바로 등장하는 익숙한 얼굴의 사진 때문에 동요하게 됐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종이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태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짙은 혐오가 묻어 있었다.
“이거 뭡니까. 대체 이게 왜…….”
“이름이 이차영이라고?”
그가 대답 대신 뒤쪽의 안 실장을 확 쏘아봤다. 제 외할아버지와 비밀이 없다던 그의 공작인 듯했다. 아니, 분명했다. 묵묵히 충성심 넘치는 개인 양 서 있는 꼬락서니가 역겨웠다.
아무 말도 없이 싸늘하게 분노한 태주가 갑자기 안 실장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철썩! 그가 두툼한 종이 뭉치로 안 실장의 뺨을 내려쳤다. 그러고는 그것으로도 제 분노를 풀기에는 모자랐던지 난폭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도련…… 윽!”
‘퍽!’ 하는 광폭한 마찰음과 함께 안 실장은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태주는 그의 위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올라탔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수행 비서들과 경호원들이 태주를 말리려고 접근했으나, 그와 동시에 문 회장이 눈을 지그시 감아 묵인할 의사를 표현하는 바람에 그들의 움직임도 움찔하고 멈췄다.
삽시간에 너른 공간 안에 태주가 안 실장을 과격하게 폭행하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주먹을 단단하게 쥔 그가 미친 듯이 손을 내질렀다. 그러다가 손목시계를 풀어 손아귀에 쥐고 그것으로 얼굴을 몇 번 더 내려쳤다.
“윽, 윽……!”
퍽! 퍼억! 그가 움직일 때마다 소름 끼치는 타격음과 함께 안 실장의 얼굴이 양쪽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미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있던 태주는 겨우 이성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마지막에는 구둣발로 안 실장의 턱을 걷어찼다.
“으욱……!”
‘뻐억!’ 하고 뼈마디가 쪼개지는 듯한 무서운 소리가 들린 뒤라야, 태주가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하, 이 씨발. 비밀이 없으면 만들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읏…….”
그러고는 마치 더러운 것에 닿은 양 구두코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구둣발로 담배를 비벼 끄듯이 문질렀다. 끝끝내 안 실장으로부터 돌아오는 일말의 저항은 없었다. 처음부터 태주가 이렇게 나올 줄 아마 그는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안 실장, 할아버지 성심껏 돕다가 나랑 척지는 게 내 생각엔 아주 큰 악수 같은데. 난 관대하게 사람 대하는 법을 못 배웠거든. 그래도 본인 행동에 책임질 수 있겠죠? 어른이니까.”
꽤 흥분한 기색의 태주는 다시 한번 윽박지르듯 안 실장의 뺨을 발로 꾹 눌러 밟기를 서슴지 않았다. 일종의 최후통첩 같은 것이다. 그러다가 제 외할아버지를 차가운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태주의 눈빛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낀 문 회장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