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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49화 (49/144)

49화

다시금 태주가 허겁지겁 입술을 부딪치려 들기에 차영이 분명하게 거부했다.

“여기서도 안 돼? 그럴 거면 왜 이쪽으로 오자고 했어.”

“뻥 뚫린 데서 한 기장 사고 칠까 겁나서. 여긴 보는 눈이 좀 덜하고.”

그러자 그가 픽 웃었다.

“내가 널 알몸으로 만들길 했어, 호텔로 끌고 가길 했어. 아직 시동도 안 걸었어.”

“아무튼, 내가 아직 도윤이 편에 사실 확인을 못 했거든. 그때까진 나 만지는 거 보류야.”

“날 못 믿으시겠다. 우리 신뢰가 고작 이 정도라 이거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영을 탐색하듯 살폈다. 아직 오해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그는 차영의 현재 기분을 눈치로 인지한 듯했다. 외부 공간에서 스킨십 하는 게 부담인 그 마음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한 수를 접는 방법을 골랐다.

“뭐, 일단 좋아. 난 결백하니까. 나중에 이거 다 돌려받을 거야.”

“어떤 걸로?”

“오해 풀리면 너 내 입 안에 침 뱉어 줘.”

“뭘 해? 한 기장 미쳤어?”

당황한 차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미성년자 청취 불가의 외설적인 대화를 누가 들을까 겁이 난 듯했다.

“나 믿지도 못하고 의심부터 했으니까. 협상의 여지 같은 건 없어.”

“한태주 씨.”

차영이 곤란한 듯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 태주가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냈다. 뒤늦게 그 모습을 살핀 차영은 물건의 정체를 상상하다 필연적으로 웃음을 터트리게 됐다. 왠지 무엇인지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태주가 커다란 손바닥 위에 올려 내밀어 보이는 것은 마그넷이었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자니 줄곧 열이 올라 있던 속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첨예하게 날 서 있던 차영의 표정도 한층 누그러졌다.

“이거 대체 언제까지 줄 건데?”

“네가 여권 가지고 비행기 탈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대답에 차영은 조금 풀이 죽었다.

“차근차근 해. 주변은 가까워서 될지도 모르지만 멀리는 아직 자신 없어.”

“자신 같은 건 필요 없어. 그건 어쨌든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무뎌지는 게 필요해. 그러려면 자꾸 경험해 봐야 돼. 말 나온 김에 나랑 놀러 가자.”

“또 어딜 데리고 가고 싶어서 서두가 장황한데?”

“열기구 축제.”

“열기구? 해운대? 아니면 대구?”

인간의 모든 사고는 본인의 경험치에서 그 범주가 결정되고, 축소 또는 확장되는 법이다. 덕분에 차영의 머릿속에 선뜻 생각난 것은 국내에서 열리는 작은 축제들이 다였다. 다만 태주가 고작 자가용으로도 떠날 수 있는 부산이나 대구에 가자고 이렇게 정성스럽게 굴지는 않을 듯싶었다.

“아니, 좀 먼 데로. 미국이나.”

“진짜. 나 이제 막 몸풀기 러닝 시작했는데 바로 장거리 경주하자네.”

“걱정 마. 내가 손잡고, 다리도 묶어 놓고 뛸 거야. 이인삼각 알지?”

그가 서로의 두 다리를 묶는 시늉을 해 보였다. 차영은 픽 웃고 말았다.

“또 나 할 말 없게.”

“한 10월쯤 열려.”

“왜 하필 열기구? 항공기 박물관이나, 라이트 형제 유적지 같은 데면 차라리 이해하겠어.”

“데이트하는 건데 유적지를 왜 가. 로맨틱한 풍경 정도는 있어 줘야지. 너도 좋아할 것 같았어. 책장에 미니어처들 귀엽더라.”

“그건 언제 또 봤대? 그건 그냥 장식이야.”

“보통은 본인이 좋아하는 걸 집에 장식하지. 보면 기분 좋아지거든. 벽지 색깔 고를 때 아무 생각 없이 고르지 않듯이.”

그가 그렇게 말하니 또 그게 사실인 것처럼 들렸다. 물론 특별히 의식하고 놓아둔 것은 아니었다. 허전해 보여서 몇 개 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최소한 그걸 장식하겠다는 의도로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을 때 차영은 기뻐했었을 터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물건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넌 「야간 비행」이 좋아, 「남방 우편기」가 좋아? 며칠 전에 홍 기장한테 들은 질문인데 듣자마자 너한테도 물어보고 싶더라.”

대화의 랠리 중에 태주가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 얼굴은 장난기 하나 없이 심각했다. 그래서 차영은 아주 진지하게 대답을 고민하다 되물었다.

“한 기장은?”

“난 네가 좋아하는 거.”

“농담하지 마.”

“진담이야. 심지어 되게 진지했어, 방금. 설마 우리 사이 나만 진지해?”

“아니, 나도 진지해.”

어느 누가 진지하지도 않은 마음가짐으로 같은 남자를 사귈 수 있을까. 평생 맨살이 맞닿게 될 거라곤 상상 한번 못 해 본 그런 아득한 미지의 상대를 말이다.

“음, 「야간 비행」.”

심사숙고 끝에 대답한 차영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질문한 의도가 있을 것 같아서 태주의 말이 이어지기를 착하게 기다렸다.

“그럴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야간 비행」이라고 대답했거든.”

“내가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고? 넘겨짚었어?”

“아니, 네 책장에 있던 책. 많이 낡았던데.”

제집 책장에 꽂힌 책등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 차영이 조금 가라앉은 주파수로 응답했다.

“아, 그건…… 돌아가신 아버지 거야.”

“응. 네 책장에 있는 책들 중에서 제일 중요하게 보이더라.”

“…….”

“온통 비행에 관련된 물건투성이인 너희 집 보면서 넌 정말 그걸 좋아하는구나, 싶었지.”

목소리 끝이 씁쓸했다. 차영은 지금 자신이 말을 내뱉으면 비슷한 음성이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하늘을 제일 좋아했지만, 또 가장 끔찍해했다. 늘 창공을 나는 태주는 이를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됐든 자신이 좋아한다고 여기고 최대한 가까이 닿게 해 주려는 그의 노력이 가상하고 고마웠다.

차영이 가만히 그의 안색만 살피고 침묵하는데 금세 표정을 바꾼 그가 차영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열기구 축제는. 좋아, 싫어.”

“당연히 좋아. 나 데리고 가.”

솔직히 지금 이 순간 차영이 진짜로 좋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열기구 축제나,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일이 아니라 태주였다. 그걸 속 시원히 털어놓고 그를 기쁘게 해 줄까 싶었던 차영은, 이미 살짝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태주를 보고 그가 너무 기고만장해질까 봐 조용히 묻어 뒀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가끔 그가 쓸쓸한 일이 있을 때, 아픈 상황을 직면했을 때, 또 조금 전에 제게 「야간 비행」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었던 것 같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드러내는 순간들마다 약처럼 하나씩 꺼내서 발라 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됐어, 그럼. 마그넷 주려고 보자고 한 거야. 올라가서 일해. 간다.”

차영은 자신을 두고 가 버리려는 태주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잠깐만. 우리 이틀 만에 본 건데 이렇게 그냥 가?”

“그럼 여기서 뭐 하자고? 키스도 못 하게 해 놓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여기 민간인한테만 통제 구역이지 공항 직원들은 다 접근할 수 있는 데야. 누가 지나가다 보기라도 하면 오해해. 내가 왜 거절했는지 모르겠어?”

“그럼 호텔 가자.”

“나 일하다 나왔거든?”

사실은 자신이야말로 잠시 태주를 안고 있기라도 하고 싶었다. 단지 공항 청사는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켜보고 있는 현대 문물이 너무 많은 곳이라 항상 괜한 손만 달싹이게 됐다.

이렇듯 침묵하고 있자니 허튼 생각이 너무 많이 났다. 닿고 싶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의 뼈마디가 곧고 예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차영이 내심 곤란해하고 있는데 태주가 정적을 깨부수듯 목소리를 냈다.

“우리 사귀고 있는데 뭐 어때. 오해도 아니잖아.”

“나 확실한 사람이야. 핵심 비껴 나가는 수법 자꾸 써먹으면 안 통해.”

“너 확실한 사람인데 왜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말 안 해?”

“했잖아.”

“안 했어. 이틀 만에 봤는데 이렇게 그냥 가냐고 물었지.”

이 말에 차영이 얄밉게 그를 보면서 손등을 툭 쳤다.

“혹시 한 기장 지금 나랑 밀고 당기기 뭐 그런 거 하는 거야?”

“응. 그런 덴 둔할 줄 알았는데 바로 아네.”

“내가 단수가 낮아서 그렇지 마냥 둔하지는 않거든요. 가끔 진짜 치사한 거 알아?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면서 왜 자꾸 놀려?”

그는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난 공항 그 재미에 온다니까.”

그러면서 주변을 슬쩍 살핀 태주가 차영의 손을 붙들더니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말릴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차영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가 한 걸음을 뒤로 내디딘 뒤였다. 서로 간에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한태주.”

“구도윤 씨한테 확인해 봐. 우리 사이에 심도 있는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하자. 이따 데리러 올게. 퇴근하기 15분 전에 전화해.”

“야, 한태주! 진짜 그냥 가?”

태주는 손으로 전화하는 시늉을 해 보이곤 차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그를 차영은 망연히 바라만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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