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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48화 (48/144)

48화

“차영인 한 기장님처럼 뜬소문에 무딘 철면피 아니거든요. 알고 보면 얼마나 마음 여리고 착한 앤데요. 걔의 평판도 좀 소중히 대해 주세요.”

“구도윤 씨나 잘하세요. 걔 쓸데없이 환승 구역으로 불러내서 노닥거리지 말고. 남자인 나랑 여자인 구도윤 씨 중에 누구랑 같이 있는 게 더 수상쩍게 보일 것 같습니까?”

그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던 도윤이 차영에게 밑반찬을 넘겨받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 몇 달이 훌쩍 지난 일이었다. 그날 일을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차영이 태주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친밀한 사이가 된 것만은 명확해 보였다.

“하…… 진짜. 그래서 제가 뭘 도우면 되는데요.”

“어머니가 일로 많이 바쁘시다면서요. 내가 언질 준 날짜에 그분이 반나절 정도 일찍 퇴근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가능해요?”

“혹시 어머니 계신 곳으로 차영이 보내실 건가요? 그럼 두 사람 미리 준비된 상태에서 만날 수 있게 어머니한테도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하는 편이 낫지 않아요?”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어야 기쁨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평소에 통화도 거의 안 하는데 갑자기 연락해서 뭘 핑계로 반차 쓰시라 그래요.”

“뭐 적당히 둘러대서. 그게 구도윤 씨 능력이죠.”

“한다 쳐요. 차영인 어떻게 눈속임하시려고요?”

“거기까진 알 거 없고.”

“그걸 모르고 어떻게 도와드려요. 아까부터 진짜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니에요?”

결국 발끈한 도윤이 태주를 비난하자,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듯 직시하고 있던 태주가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대답은 체념하겠다는 투였다.

“못하겠으면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이만 일어납시다. 내 용건 끝났거든요.”

“아, 한국말 끝까지 들어야 된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 봤어요? 우리나란 맥락을 잘 읽어야 상대 의중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언어권에 속한다고요.”

일어나려던 태주가 그녀의 저지에 멈칫했다.

“도울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태주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 * *

타닥타닥. 누군가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내디뎠다. 다소 다급한 표정의 인물은 차영이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물건을 꺼내는 시간마저도 아까웠는지 걸으면서 제 주머니에서 출입용 ID 카드를 꺼냈다. 관제소 건물 바깥으로 빠르게 나온 차영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걸음을 내달리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를 확 잡아끌었다.

“헉……!”

깜짝 놀란 차영이 제 팔목이 붙들린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태주가 제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아마 출입구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 놀랐잖아. 언제 왔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방금. 뭐, 대충.”

“말을 하지. 괜히 뛰었잖아.”

숨을 고르는 차영은 허리를 살짝 숙인 채였다. 그는 무심코 자신의 팔을 단단히 쥐고 있는 태주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쁜 호흡을 전부 가다듬은 뒤, 일단 그 손을 뿌리쳤다. 동시에 태주의 미간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옅게 새겨졌다.

“말도 안 돼. 뿌리쳤어, 지금?”

“여기서 만져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어.”

“왜 차갑지? 나 방금 상처받았어.”

“상처는 한 기장 일본 가 있는 동안 한국에 있던 내가 받았지.”

태주를 빤히 바라보는 차영의 눈매에 약간의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왜?”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설마 나 때문에?”

당연한 거 아닌가. 차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아닌데 찔러보겠어? 인정하기 싫지만 나 그렇게 고단수 아니거든.”

이 대꾸를 들은 태주는 어제와 오늘 제 동선을 꼼꼼하게 되새겼다. 이윽고 왼손을 척 펴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차영이 분노할 만한 지점들을 짚어 나갔다.

“출발할 때 전화하고, 도착해서도 장소 옮길 때마다 꼬박꼬박 연락하고, 밤엔 호텔엔 조용히 틀어박혀서 잠만 잤고, 심지어 귀국하자마자 바로 얼굴 보러 달려왔고.”

그러고는 정말로 포인트를 전혀 잡지 못하겠다는 양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문제인지 나 잘 모르겠는데.”

마치 파인더를 들여다보듯 눈을 신중하게 뜨고 태주를 직시하던 차영이 이마를 찌푸렸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도저히 입 안에만 단어들을 담아 둘 수가 없어서 모조리 토해 냈다.

“내가 오늘 식사 중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한태주 기장 오사카 호텔 로비에서 어떤 여자한테 수작 걸었다더라?”

“내가?”

무척 황당해하는 태주를 또렷하게 직시하던 차영의 눈가가 차츰 가늘어졌다.

“그럼 나일까? 너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얘기 내 귀에 들리게 만들어.”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니고?”

차영이 그게 말이 되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수려한 외모의 태주는 자신이 여태까지 보아 온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눈에 띄었다. 아울러 평균보다 키도 훌쩍 큰 데다 제복까지 입고 있었다는데 멀쩡한 시력과 인지 능력을 지닌 사람이 그와 다른 사람을 착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영은 잇새를 지그시 물고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한국 항공 한태주 기장 또 있어? 있으면 데려와 봐. 걔랑도 사귀게.”

“그건 안 되지. 너는 내 건데.”

“나만 네 거야? 너는 내 거 아니고?”

“아니, 나 데리고 오만 소문 다 도는 건 알았지만 여자 문제는 또 처음이네. 나 그 문제에 관한 한 완전히 청정해. 너도 눈치로 알잖아?”

물론 차영도 뜬소문에 불과하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리 긴 시간 알아 온 건 아니지만 태주는 직관적이고 제 감정과 기분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또한 맺고 끊는 게 분명하며,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했대도 상대 여자에게 접근하기 이전에 제게 결별을 고했을 터다.

다만 그를 믿는데도 이런 일에 연루되어 소문이 난 것 자체가 무척 화가 났다. 제게 어울리지도 않는 독점욕이 생겼다는 건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었다.

“아주 잘 아시고 계시겠지만 나 눈 엄청 높아.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군데? 얼마나 미인인지 나도 얼굴 좀 보자.”

역시나 그는 정말 영문을 모르는 모양인지 연신 어이없어했다.

“미인이면 뭐, 댁이 어쩌시게!”

끝내 차영이 버럭 소리쳤다. 뾰족하게 날을 세워 날카롭게 반응하자, 태주는 대충 넘길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재빠르게 차영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다 이내 매우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눈썹 사이를 구겼다. 그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고스란히 정면에서 지켜보고 있던 차영은 괜히 조바심이 나 태주의 제복 위를 손등으로 툭 내려쳤다.

“야, 대답 안 해?”

“이봐, 이차영 관제사.”

음험하리만치 낮아진 음성으로 상대의 이름을 부르던 태주는 문득 뭔가 떠오른 기색으로 잠시 장외로 말을 돌렸다.

“아, 그렇지. 네 친구는 잠깐 마주쳤어. 구도윤 씨. 젠장, 이거 때문인가 보다.”

그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으면서도 설마설마했던 차영은 경악했다.

“뭐야. 대충 짜 맞춘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 근거 있는 소문이었단 말이야?”

“하나밖에 없는 네 친구인데 그럼 무시해? 이러면 내가 억울하지.”

“한태주, 이거 내가 도윤이한테 확인해 본다. 걔 내 편이야.”

“이봐, 이차영 관제사. 분명히 말하는데 나 치졸하게 거짓말은 안 해. 애초에 숨기고 말을 안 하는 건 많아도.”

지금 그의 이 말이 진실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됐다.

“와, 그런데 이차영 질투하네.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

“지금 호텔 갈래? 아무 데나.”

대놓고 사방이 트여 있는 장소였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알 텐데도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태주가 다짜고짜 고개를 기울여 키스하려 들었다. 차영은 서둘러 밀어냈다. 그러자 단전에서부터 울컥한 무언가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어 댔다.

“나 지금 너랑 뭐라도 하고 싶어 미치겠어.”

나지막한 중저음이 이상할 정도로 야릇했다.

“잠깐. 일단 휴전하고. 자리부터 옮기자.”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차영은 태주의 팔을 붙들고 차분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웬일인지 얌전히 따랐다. 다만 차영의 옆모습을 주시한 눈길을 단 한 시도 떼지 않아서, 얼굴은 좀 더 탈 듯이 달아올랐다.

그들은 탁 트인 계류장을 뒤로하고 통제 구역 방향으로 향했다. 검문소 일각의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한 뒤라야 겨우 멈춰 서서 제대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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