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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47화 (47/144)

47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선재는, 사실 아까 전부터 이 말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선배님.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저 복귀 도와주신 거 정말 감사했습니다.”

“네가 그만둘 일이 아니었으니까 나선 거야. 널 도와준 게 아니라. 날 도운 거고.”

“그래도 솔직히 모르는 척하실 수 있었잖아요.”

지척에서 벌어지는 그만한 일을 모르는 척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엄청나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응당 인지상정이라는 게 있었고, 미약하긴 하지만 태주에게도 탑재가 되어 있었다. 본인이 판단해서 저지른 실수도 아니고 자신이 명령해서 행한 일로 말만 대기 발령이지 파면을 당하게 생겼는데 모르는 척할 순 없는 일이다.

“내가 특별히 한 거 없어. 그냥 가서 어린애처럼 조른 것뿐이야. 안타깝지만 모든 권한은 한국 항공의 전지전능한 노친네한테 있지, 나한텐 별반 힘도 없다.”

“어쨌든 선배가 강경하게 한 말씀 해 주신 거잖아요. 제가 전화드린 날 밤에 바로 본사 회장님 비서분한테 직접 연락 왔었어요. 제 인사 바로 취소되고, 언론에서도 당일 기내 영상 풀리고 회사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니까 사건 금세 잠잠해지는 거 보고 솔직히 회장님 권력이 좀 무섭긴 하더라고요.”

“…….”

“아무튼 저희 아버지한테 선배가 힘써 주셨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종로 쪽에 한번 오시면 크게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대요. 그쪽에서 되게 오랫동안 장사하신 터줏대감이시거든요.”

“작작 하지? 누가 들으면 나라 구한 줄 알겠다.”

“우리 아버지한텐 하나뿐인 아들이 국가나 다름없죠. 제가 또 4대 독자라…….”

머쓱하게 웃는 선재를 닭살 돋는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태주는, 결국 들고 있던 책을 그에게 던져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휴게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운항 팀장이었다.

“화물기 간단 브리핑 드리겠습니다.”

선재가 먼저 모자를 고쳐 쓰고 일어섰다. 태주가 뒤이어 나가려고 하는데 운항 팀장이 그의 앞을 우뚝 막아섰다. 방금 한 말 이외에 또 따로 전할 사항이 있는 것이다.

“뭡니까.”

“한 기장님. 비행 외 초과 근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태주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왜 초과해서까지 근무를 합니까. 과로로 내 몸이라도 상하면 회사가 책임지나? 게다가 비행도 아니고 비행 외? 장난해요?”

“이건 기장 승급 통과하신 직원분들은 무조건 거치시는 자체 제도입니다. 우리 회사 내규라서 정년퇴직 앞둔 59세, 60세 기장님들도 다 하시는 거예요. 병원 시설 봉사와 항공 운항과 강연 두 파트 다 하셔야 하는데, 한 기장님은 뭐부터 하실지 고르시고 알려 주십시오.”

태주의 손에 종이를 억지로 쥐여 주고 앞서 나간 운항 팀장의 뒷모습을 문간에 서 있던 선재가 지켜봤다. 그러다가 돌아보니 태주가 손에 쥔 내용물을 흠씬 구기면서 온갖 짜증을 내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선재가 태주에게 귓속말했다.

“운항 팀장은 선배 누구 외손잔지 절대 모르는 거 확실해요.”

“아주 놀고 있다. 재미있어 죽겠지?”

그는 책에 이어 종이까지 선재에게 던져 버렸다.

* * *

화물기 수송을 마치고 오사카의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한 태주는 선재와 함께 공항 인근 호텔로 이동했다. 차영이 없는 이 도시에서는 하루만 묵으면 됐다. 기내 안에서 규칙적으로 흐르던 시간이 지상을 내딛자 왠지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선배, 제가 방 두 개 다 체크인하겠습니다.”

수속을 밟기 위해 선재가 먼저 호텔 데스크로 뛰어갔다. 태주가 뒤따랐다. 그러다가 익숙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됐다. 한국 항공은 취항하는 도시 각 공항 인근에 1년 단위로 승무원들이 투숙할 숙소 계약을 했다. 그래서 동료 승무원들을 오며 가며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마침 체크아웃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예정인 모양인지 캐리어를 든 한국 항공 객실 승무원들이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퍽 낯익은 얼굴들이 태주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는 받아 주는 둥 마는 둥 눈인사로 답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항상 그가 직원들 사이를 지나가면 벌어지는 일이 또다시 생겼다. 자기들끼리 모여 소리 낮춰 쑥덕거리는 것이다. 저렇게 대놓고 하고 있으면서 음성을 낮췄다는 핑계로 태주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란다면 욕심이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지나쳐 묵묵히 걷다가 우뚝 두 다리의 운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뒤돌아섰다. 막 체크인 절차를 마치고 뒤돌아보던 선재도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선배, 카드 키 드릴게요.”

“주고 넌 올라가. 난 용건이 있어.”

“어…… 캐리어 제가 선배 방으로 옮겨 드릴게요, 그럼.”

카드 키와 태주의 짐을 서로 교환해 간 선재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태주는 그를 뒤로하고 객실 승무원들을 향해 걸었다. 놀란 그녀들이 태주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느 틈에 그의 발걸음은 도윤의 앞에서 정확히 멎었다. 그는 도윤의 제복 위 명찰을 힐끗 눈대중으로 살폈다.

“구도윤 승무원.”

“아, 한 기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금 오셨나 봐요.”

“네, 보시다시피. 귀국 비행기 같은데 나랑 잠깐 차 한잔할 시간 있어요?”

눈이 동그래진 도윤이 태주를 한 번, 주변의 동료들을 한 번 살피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신지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한데…….”

“오래 안 뺏겠습니다. 10분 정도면 돼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그런데 저한테 뭐 특별한 용건이라도…….”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따로 얘기하죠.”

그녀의 옆구리를 동료들이 쿡 찔렀다. 아무래도 그가 도윤에게 사적인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 오늘 오후면 태주가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는 소문이 한국 항공 승무원들 사이에 짜하게 퍼질 것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도 우습고, 또 소문 하나하나에 반응할 필요도 못 느꼈다.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태주는 로비 근처의 커피숍을 향해 손짓했다. 도윤이 그런 그를 조용히 따랐다.

* * *

창가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가득한 장관이었다. 싱그럽게 푸르른 신록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오늘 오사카의 기온은 서울보다 몇 도가량을 웃돌았다. 오색 찬연한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태주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곧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은 바로 앞에 앉아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도윤에게로 가 머물렀다.

“한 기장님 용건이란 게 제가 짐작하는 일이 맞는 걸까요?”

“뭘 짐작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얼추 일치할 것 같네요.”

애초에 콧대 높은 태주가 도윤을 콕 집어 시간을 내 달라고 구애했다는 건 동료 승무원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전에 이미 한 번 비슷한 일이 있었던 터라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차영 때문인 게 분명했다.

“차영이 이야기일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이차영 관제사 어머님이랑 연락 가능하죠?”

“물론 가능하죠. 우리가 몇 년 지긴데.”

선뜻 응답해 놓고 도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차영 본인에 관한 것도 아니고 그의 어머니 연락처를 묻는다는 게 그녀의 상식에서는 이해가 안 되고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런데 한 기장님이 그건 왜 물으시는 건가요?”

“내가 궁금해서 질문하겠다는데 이유가 왜 필요하죠?”

“다른 사람 개인 정보를 알려 달라는 건데 당연히 적당한 사유가 있어야죠.”

“뭐 남의 어머니 이용해서 개인적으로 구도윤 씨한테 수작 부리려고 물어봤겠습니까. 그걸 통해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물어보지.”

“제가 연락처 알려 드리면 그걸로 뭐 하시게요.”

“달라고 안 했습니다. 구도윤 씨하고 연락이 되냐고 물어봤죠.”

무안한 나머지 입을 살짝 내밀던 도윤이 그를 쏘아봤다. 생각해 보면 태주가 마음만 먹는다면 누군가의 연락처 하나를 알아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듯했다. 이걸 자신에게 묻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경청하겠다는 듯 입을 다물자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이차영 관제사가 어머니랑 자주 못 본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침 가정의 달이기도 하고…… 두 사람 만나게 해 주고 싶은데 그쪽이 날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요.”

“걔가 어머니랑 자주 못 보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왜인지도 알아요?”

“대충. 차영이랑 친해졌어요.”

“차영이 걔가 그런 사적인 이야기 함부로 하고 그러는 애가 아니거든요. 저번에 제주도 갈 때부터 느낀 건데 한 기장님한테 너무 쉽게 구네요. 되게 이상해 보이게…….”

“이상하게 보세요, 그럼.”

이 대답을 들은 도윤이 미간을 설핏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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