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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46화 (46/144)

46화

부친의 장례까지 모두 치르고 있는 휴가, 없는 휴가를 모두 몰아서 죄다 사용하고 돌아온 무책임한 탑장은 얼굴이 꽤나 좋아 보였다. 남겨진 사람들 특유의 그늘 같은 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태주나 자신,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것들 말이다. 예기치 못하게 사망하시긴 했지만 어쨌든 망자의 나이가 지긋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얼굴 좋아 보이셔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왜 이렇게 오래 쉬셨어요. 탑장 대우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하셨는데 엄청 버거워들 하셨어요. 저도 힘들었고요. 다들 탑장님 너무 일 안 하시는 거 아니냐고 그랬었는데 반성했대요.”

귀환 인사 겸, 늦은 위로 겸 농담 삼아 툴툴거리던 차영에게 탑장이 차가운 커피를 건넸다.

“나 없어도 여기 잘만 돌아갔다던데? 그리고 차영이 넌 탑에 아주 뼈를 묻어라. 선배들이 다들 네가 두 몫 세 몫 했다고 칭찬하더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일회용 컵을 받아 들면서 그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다. 아직 덥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봄은 언제나 예상보다 그 유통 기한이 짧았다. 금세 지나가고 어느 틈에 또 새로운 평균 기온을 맞이하게 될 터다.

“그런데 오늘 인원수가 약간 적어 보여요. 아까 앞 타임이랑 인수인계하면서 보니까 선배들 몇 분 안 보이셔서 교대 인원이 남던데요?”

“아, 그거. 당분간 터미널 관제를 좀 해 줘야겠어서 아래로 내려보냈다. 급하게 사람이 그만두고 새로 관제사들이 왔는데 다 경력들이 물경력이라 잘 안 돌아가나 봐. 아, 대관절 왜 사람 보충을 안 해 주는 거야. 탑에서 내려보내라고 공문 오면 우린? 우리는 죽으라는 건지.”

“연말, 신년, 명절 때 다 잘 버텼으니까 더 한가할 땐 알아서 버티겠다 싶은 거겠죠.”

“그게 다 직원 갈아 넣는 건데 말이야. 아무튼 며칠만 같이 고생하자고.”

휴게실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서로를 신뢰하는 두 사람 사이에 안정적인 공기가 흘러서, 대화는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곁에 사람이 있긴 하지만 차영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옆의 그도 비슷한 생각인 모양인지 한참 말이 없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혹은 단순히 오늘 저녁 식사 메뉴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영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한태주가 준 카드 키를 제 용도에 맞게 처음으로 활용했던 날의 사건 말이다. 태주는 언제든지 와도 된다는 양 제집의 출입 도구까지 건네었을 정도로 죄다 내보이고 있는데, 차영은 여전히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미스터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를 알아 갈수록 심리상의 거리만큼은 가깝게 느껴졌다. 얼핏 듣는다면 자주 볼수록 친밀감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일 아니냐고 물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단어상의 표현과는 의미하는 바가 좀 달랐다.

‘한주혁, 한주혁…… 진짜 어디서 들었지. 연예인 이름인가.’

그의 친부 성함인 듯한 한주혁이라는 이름이나, 언젠가 태주의 아버지라고 오해했던 남자에 관한 것들이 계속 마음 한편에서 자리를 잡고 차영을 아주 약한 강도로 찔러 댔다. 간지럽고 거슬리는데, 너무 미약해서 부위가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딘지 익숙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그 이름은 언젠가 한 번쯤 들어 봤던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납골당에서 차가운 인상의 남자와 스쳐 지났던 우연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은 환각 같은 걸 볼 정도로 정신력이 해이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날 밤 그가 눈물을 비쳤던 일은 뭔가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일 것 같아서 당일 이후로 함구 중이었다. 태주 역시 언제 그런 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 여느 때의 능글맞고 뻔뻔한 그로 돌아왔다. 결국 심도 있는 대화를 시작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대로 묻어 두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차영 자신에게도 가끔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한 기저의 아픔은 있었다. 애초에 태주에게 슬픔이 많아 보인다고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더 관심이 가기도 했으니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그의 말이 가시처럼 그의 목구멍을 아프게 했다.

〈차영아, 좋아해. 그게 내 진심이니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이건 의심하면 안 돼.〉

우리한테 나중에 정확히 무슨 일이 생기는데?

그는 뭔가 아는 게 있는 듯했으나, 자세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늘 이상할 정도로 묘하게 비밀스러운 한태주가 자신에게까지 감추고 있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걸 구체적으로 캐묻고 싶은데도, 왠지 물어볼 용기가 안 났다.

듣고 나면 자신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그가 품고 있는 비밀의 무게도, 제 애정의 정도도 아직은 가늠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난 먼저 올라갈 테니까 너도 그거 다 마시면 올라와라.”

탑장이 상념에 빠져 있던 차영을 일깨웠다. 일어나서 살짝 묵례한 그는 도로 앉아 빨대를 입에 물었다. 이미 얼음에 많이 희석돼서 한결 연해진 커피의 끝 맛은 어설프게 쌉싸래했다.

* * *

비행을 앞둔 태주의 앞에 선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에 운항 팀장이 따로 브리핑할 것이 있다고 해서 잠시간 함께 휴게실에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태주는 다리를 척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선재가 그런 태주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태주는 선재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책 속에 눈을 박고 물었다.

“뭐래?”

“곧 정리해서 알려 준대요. 에드가 드가 순회 전시회 마치고 그 그림들 싣고 가는 화물기라서 뭐 따로 전달할 내용이 있나 봐요.”

“운항 팀 뭐 하는 거야. 게을러 터져 가지고 일을 재깍재깍 할 것이지.”

“사주 외손자가 이러시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안 들리고 무섭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다. 무서울 것도 없고. 그리고 너.”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린 태주가 선재를 나무라듯 직시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나불거리고 다니는 거 아니겠지.”

“절 뭘로 보시고. 처음에 이 사실 제가 알게 됐을 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잘 기억하고 있어요. 절대 안 그래요.”

“지나가는 말만 하던 내 입에서 아주 의미 있는 말 나오지 않게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하자, 응?”

그러고는 다시 모든 흥미를 잃은 듯이 활자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만 하지 말고 잘해.”

“당연히 잘하죠. 두고 보세요. 그런데 우리 화물만 수송하는 건 되게 오랜만인 것 같지 않아요? 벌써 몇 달 됐죠? 솔직히 사람 수백 명 태우는 건 부담이 너무 커서, 화물 수송이 훨씬 편하긴 해요. 모양새가 약간 안 나 그렇지.”

태주는 픽 웃었다.

“홍선재 넌 왜 조종사가 됐냐?”

“제복이 멋있어서요. 한국 항공 이 견장이 특히 예술이죠. 전 세계에서 제일 근사해요.”

“알 만하네.”

어깨와 소매의 견장을 만지작거리는 선재의 손길에 소중한 물체를 만지는 손짓 특유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부기장인 선재의 것은 세 줄, 기장인 태주의 것은 네 줄이었다.

조종사는 한번 기장이 되면 승진 같은 진급 절차가 따로 없고 연차와 각종 비행 경력만 쌓인다. 덕분에 맨 처음 기장이 되는 절차 자체가 무척 까다롭고 어려웠다. 태주와 선재의 나이는 거의 차이가 안 났으나 두 사람이 어깨에 달고 있는 줄 하나 차이에 차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 셈이었다.

태주가 견장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선재의 손끝을 따라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선재가 머쓱해졌던 모양인지 손을 거두고 말을 돌렸다.

“선배 아까부터 대체 뭐 보세요? 아아, 생텍쥐페리? 이 사람도 비행사였죠?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 이건 뭐 파일럿들 필독서 아닙니까. 선밴 둘 중 뭐가 더 좋으신데요?”

질문을 대충 흘려 넘길 것 같았던 태주가 순간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참 뒤 나온 대답은 단호하고 명확했다.

“「야간 비행」. 아마 맞을 거야.”

“아마 맞을 거라고요?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런데 「야간 비행」 좋아하시는구나. 전 「남방 우편기」가 더 좋아요. 제가 여행지 중에 스페인 제일 좋아하는데 그게 이 책 때문이에요.”

“자, 이제 저기가 스페인이다.”(*Saint Exupery, Courrier sud, Gallimard, 1962.)

“헉, 어떻게 아셨어요? 2장 마지막에 그 부분 읽었을 때 전율이 쫙 오르더라고요.”

“필독서라며. 탐독했다.”

탁. 책을 덮어 버린 태주가 대답과 동시에 책의 모서리로 선재의 뺨을 쿡 찔렀다.

“네 상체가 너무 가까이 기울어져 있다는 느낌 안 드냐? 얼굴 치워.”

어느 틈에 책 쪽으로 허리를 깊게 숙이고 내용을 훔쳐보려고 하던 선재가 섭섭한 티를 내면서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그러자 태주가 다시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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