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45화 (45/144)

45화

그가 자신을 해칠 리가 없는데,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등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으윽……!〉

턱밑까지 숨이 차서 괴로워하던 태주가 바르작거렸다.

곤란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에 차마 높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만 비틀어 대는데 어느 순간 이마 위에 차가운 물체가 스윽 와 닿았다. 촉감이 무척 딱딱한 물체였다. 끝이 둥그렇거나, 혹은 네모난 모양의 다소 긴 사물 같았다. 살과 부딪친 표면에 냉기가 살짝 돌았다. 끙끙거리며 신음하던 어린 태주의 속눈썹이 극한의 공포로 파르르 떨렸다.

〈불편하시면 제가 따로 처리할까요?〉

안 실장의 사무적인 음성이 들렸다. 그제야 천만다행히 외할아버지의 손이 단단히 틀어쥔 태주의 목울대를 놓아주었다. 이마에 닿았던 물체도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그러나 태주는 여전히 외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위력에 짓눌려 너무나도 무서웠다.

〈아니, 태주는 그냥 둬. 나한테 자식이라곤 나은이 하나뿐인데…… 이 애가 그놈 핏줄이다. 준비는 잘된 건지나 확실하게 확인해.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모자라. 차질 없게 해. 괜히 뒤탈이라도 생겼다가 회사에 구정물이라도 튀기면 안 실장 너도 죽어.〉

〈알겠습니다.〉

〈대체 집안에 버러지 같은 놈 하나 굴러온 이후로…….〉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잠든 척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료를 하겠다고 야심한 시각에 나선 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걸 사주한 게 아무래도 외할아버지 같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으나, 정말 아니라면 외할아버지가 왜 제 목을 졸랐는지가 설명이 안 됐다.

〈안 실장, 차 대기시켜. 집으로 갈 거다.〉

〈회장님, 그 총기는…….〉

〈이건 내가 처리할 거다. 넌 먼저 나가 봐.〉

지시에 따라 안 실장이 나가는 모양인지 아주 미세한 발소리와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나가는 기척 같은 건 안 들렸으나, 숨소리 하나 귓전에 안 스쳐서 의아했다. 하는 수 없이 인내심을 잃은 태주가 차분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헉……!〉

무표정한 문 회장은 여전히 태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다면 왜 들으라는 듯이 암호 같은 무서운 말들을 안 실장과 나누었던 것인지 몰랐다.

이윽고 그가 움찔한 태주의 이마를 두툼한 손으로 쓸었다. 조금 전에 제 목을 졸랐던 바로 그 손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린 태주의 조막만 한 얼굴 옆에 새카만 색 총기가 놓여 있었다. 저 물건이 장난감 같은 게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마 이마 위에 닿았던 물체의 정체인 것 같았다. 그걸 발견한 태주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그가 몹시 두려워하는 기색이자 문 회장이 총기를 재킷 안쪽에 고이 밀어 넣었다.

〈외, 외할아버지…….〉

〈우리 태주 깼구나.〉

〈외할아버지…… 자,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걱정 말고 더 자거라, 태주야. 앞으로는 할아비가 보호해 주고, 누구보다 훌륭하게 키워 주마. 너는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내 핏줄이다.〉

어째선지 보호해 주겠다는 말이 버리겠다는 말보다 더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태주는 뒤늦게 고삐가 풀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 * *

저녁 내내 그와 연락이 안 됐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된 뒤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태주는 차영이 조금이라도 헷갈려 하거나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이 연애에 성실하게 임했다. 그러니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도 없는 일 같은 건 꽤 나쁜 징조였다.

외할머니를 만나러 다녀온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막연히 기다려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참았다.

연애란 단거리일지 장거리일지 확언할 수는 없어도 어쨌든 마라톤이다. 길든 짧든 완주는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온 거리는 이제 출발지를 갓 벗어난 짤막한 길이가 다였다. 이런 시기에 반나절 이상 연락이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퇴근길에 주차장 그의 자리를 한 번씩 살펴봤더니 차가 제대로 주차되어 있긴 했다. 자신이 아는 태주의 차량이 여태까지 본 세 대가 전부라면 말이다.

물끄러미 건물 외벽을 올려다보던 차영은 7층을 두루 살폈다. 불이 꺼져 있었다. 차량과 조명등, 어느 쪽을 신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내키면 놀러 오라고 하면서 줬던 그의 집 카드 키였다.

“내가 달라 그런 거 아니고 네가 준 거야.”

스스로를 설득하듯 혼잣말한 차영은 그의 집 앞에 섰다.

삐릭.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철제문이 열렸다. 일단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거실로 접근한 그는 어렵지 않게 소파 위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잠들어 있는 태주를 발견했다.

“뭐야, 진짜.”

만약 실제로 그가 여기에 있다면 화를 내려고 했는데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일말의 전투력까지 모두 상실되는 느낌이었다.

힐끗 보니 맞은편 테이블이 엉망이었다. 서류들과 카드 키 따위들이 중구난방으로 널려 있었다. 잠든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위치만 정돈해 준 차영은 그 사이에서 낡은 종이를 한 장 발견했다.

혼인 신고서였다. 꼭 낡은 종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요새 쓰는 용지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당사자들이 날짜를 기입하고 서명한 날짜 또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한주혁, 문나은…….”

태주의 부모님 이름 같았다.

“한주혁…… 어디서 들어 봤더라. 이상하네.”

이상하게 익숙했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입으로 곱씹으며 기억해 내려 했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이거다 싶은 답은 안 떠올랐다. 차영이 자연스럽게 답을 구하듯 태주를 내려다보는데, 잠들어 있는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깬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봐 온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해 보였다.

허리를 깊게 숙여 그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던 차영은 깜짝 놀라서 종이를 떨어뜨렸다.

그가 울고 있었다.

“하…… 한 기장, 한태주 씨!”

쪼그려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춘 차영은 어깨를 흔들어 태주를 급히 깨웠다. 그러자 그가 잠시 뒤척이는가 싶더니 번쩍 눈을 떴다. 정면에 어설프게 몸을 구기고 있는 차영을 보더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이런 얼굴은 처음이다.

“한태주 씨, 괜찮아?”

“이차영? 너 왜 여기 있어.”

태주의 음성이 죄다 갈라졌다.

“연락이 너무 안 돼서. 그쪽이 카드 키도 준 김에 한번 와 봤는데…….”

왜 울고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영의 어깨가 붙들렸다. 태주는 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워낙 거칠게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몸에 걸쳐져 있던 두툼한 샤워 가운이 살짝 흐트러져서 뼈가 도드라진 너른 어깨를 드러냈다. 그걸 발견하고는 눈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곤란해하고 있는데, 그가 차영을 와락 당겨 안았다.

그는 차영의 상체 뼈들을 죄다 부서뜨릴 기세로 억세게 끌어안고 숨을 골랐다. 그 밭은 호흡의 헐떡임과 몸의 미세한 떨림까지 서로 간에 닿아 있는 몸의 면면에서 고스란히 전이됐다. 차영은 괜히 자신까지 두렵고 떨리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에 휩싸여서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차츰 손을 들어 태주의 땀으로 축축해진 등을 토닥였다.

“한태주.”

“차영아…….”

“…….”

“차영아, 좋아해. 그게 내 진심이니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이건 의심하면 안 돼.”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기쁘고 고마운 말이긴 했으나, 왠지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좋아한다는 전반부의 고백보다 후반부의 의심하지 말아 달라는 애원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데?

그걸 물어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닌 듯했다.

그래서 차영은 잘 알아들었다는 양 묵묵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마사지하듯이 목울대부터 어깻죽지까지 떨어지는 늘씬한 윤곽을 쓸어내리기만을 반복했다. 천만다행히도 천천히 그가 안정을 되찾는 것이 느껴져서 차영도 함께 안도했다.

생판 남인 남자가 우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또 직접적으로 보게 된 건 처음이다. 그게 우스워 보이긴커녕 왜 이렇게 짠하고, 안쓰럽고, 또 지켜 주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래. 나도 한 기장 좋아해.”

이렇게 단기간에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태주가 괴로워하는 이유도 정확히 모른 채 차영은 그 고통을 모두 공유하기라도 한 양 마음이 많이 아프고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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