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늦은 밤이었다.
그리고 꿈속의 태주는 아주 어렸다. 한 여덟 살, 혹은 아홉 살 정도가 됐음 직했다. 지금에 비하면 체구가 아주 작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이제 어른이 된 태주는 하지 않는 일을 어린 그가 하고 있었다. 바로 엄마가 보고 싶다면서 자다 말고 칭얼거리는 일이었다.
그런 그를 눈치챈 모양인지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뒤이어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와 침대 협탁의 조명등을 켜고 어린 태주를 토닥였다.
〈또 깼어? 우리 태주 외할아버지 댁에만 다녀오면 왜 이렇게 통 잠을 못 자.〉
〈아빠 나 약 줘. 그때 그 잠 오는 거.〉
〈수면제는 어린아이 몸에 너무 자주 처방하면 안 좋아. 대신 따뜻한 차 우려 줄게.〉
〈그거 맛없어서 싫어. 그냥 약 줘.〉
〈미운 일곱 살도 지났는데 정말 말 안 듣는다.〉
〈아빠.〉
〈응? 우리 아들.〉
〈우리 그냥 미국에 가서 살면 안 돼? 어차피 여긴 엄마도 없잖아.〉
아버지는 별말이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해 준대도 태주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리라는 판단이었을 터다.
그가 장인이자 태주의 외할아버지인 남자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만 없었어도’라는 것이었다. 그 뒤엔 아마 ‘나은이는 안 죽었을 거다’ 정도의 말이 숨겨져 있으리라.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와 만나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태주를 갖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아이를 낳다가 사망에 이르는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문 회장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 드리길 원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을 비명에 잃게 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이 못다 한 그녀의 몫까지 잘하리라 다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문 회장이 쌓아 올린 분노와 경멸의 탑은 문턱이 아주 높고, 입구까지 가는 오르막이 몹시 가팔랐다.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서 거주지를 아예 한국으로 옮긴 그는 이후 이쪽에서 자리를 잡고 수년째 제 아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때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태주의 손을 잡고 문 회장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러면 거대한 문이 바로 열렸다. 다만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 성심성의껏 모셔 가는 것은 태주뿐이었다. 그는 홀로 남겨진 채 늘 산처럼 높고 단단한 대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태주는 제 외할아버지를 그다지 미워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버지까지 함께 받아 준다면 좋은 일이겠으나, 받아 주지 않는다면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생각과 마음이 있는 거니까 외할아버지에 대해 원망해선 안 된다고 아버지가 누누이 말해 왔고, 그는 태주의 눈에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말이 응당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보다 솔직히 말하면 어린 태주는 어른들의 갈등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차 진짜 싫어?〉
〈싫어.〉
〈그러면 아빠가 자장가 불러 줘? 약은 진짜 안 돼. 그땐 네가 너무 아파서 자는 게 나으니까 딱 반 알 줬던 거야.〉
〈내가 유치원생이야? 됐어.〉
〈책이라도 읽어 줄까? 읽는 거 좋아하잖아.〉
〈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제 겨우 초등학교 가 놓고 자기가 어른 된 줄 안다, 우리 태주.〉
놀리듯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친 그가 태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불을 꼼꼼하게 다시 덮어 주고, 잠들 때까지 지켜봐 주겠다고 하는 양 곁에 머물렀다.
〈뭐 해. 눈 안 감고. 얼른 자.〉
주황빛 무드 등 옆에 앉은 그는 태주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정감이 들었는지 태주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갔다.
서서히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와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집에 들어오고 싶다면 초인종을 누르면 될걸. 그것부터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이제 막 수마와 다퉈 가기 시작했던 태주는 그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급작스럽게 잠이 쏟아졌다.
잠시 뒤, 태주의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준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방문을 미처 닫지 않고 나가는 바람에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손님맞이를 하는 아버지의 육성까지 전부 작게나마 눈을 감은 태주에게 들렸다. 방문자는 아버지가 익히 아는 사람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 소음으로 양질의 수면에 방해받은 태주가 결국 문을 닫으려고 제 몸을 일으켰다.
〈나보고 얼른 자라더니.〉
문을 닫아야 빨리 잘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는 어린 태주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졌다.
느린 걸음으로 방문을 향해 걷는데, 놀랍게도 태주 역시 가끔 들어서 익숙한 목소리가 아버지의 것과 뒤섞여 있어 멈칫했다. 외할아버지의 수하인 안 실장이었다. 태주는 눈매가 차갑고 항상 탐색하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그가 너무 싫었다. 아버지 같은 선량한 눈이 훨씬 좋았다.
〈한 선생님, 회장님께서 지금 급히 찾으십니다.〉
〈저를요?〉
〈네. 지인분 중에 심장 질환 지병을 앓는 분이 계신데, 말 많은 동네라 자칫하면 언론 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왕진을 좀 와 주셨으면 한답니다. 아주 은밀하게요. 시간이 꽤 늦긴 했습니다만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무리 늦어도 당연히 가야죠.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화색이 돈 아버지의 음성에 빛깔이 있다면 산뜻한 노란색이나, 분홍색 그 어딘가쯤일지도 모른다.
〈현재 충북 지역의 별장에 회장님과 함께 계신답니다. 한국 항공 산하 저가 항공사의 경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겁니다. 아침이면 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침……. 그러면 태주한테 메모 한 장 남겨야겠습니다. 지금 자고 있는데 깼다가 혹시 제가 없으면 아이가 놀랄 수도 있어서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 나가서 기다리죠. 주기장까지 타고 가실 차를 미리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그러세요. 곧 따라 나가겠습니다.〉
빠르게 태주의 방으로 들어온 그는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제 아들을 보고 당황했다.
〈너 왜 여기 나와 있어. 잠든 거 아니었어?〉
〈시끄러운데 어떻게 자. 어디 가?〉
〈응, 아빠 어디 좀 다녀올게. 할아버지가 찾으신대. 지금 급히 가야 돼서…… 아침까진 올 수 있다는데 만에 하나 못 그럴 수도 있거든. 그러면 외할머니한테 사람 보내 달라고 아빠가 전화드릴게. 그때까지 혼자 있을 수 있지?〉
〈당연히 할 수 있지.〉
가볍게 끄덕이는 태주의 머리를 장하다는 듯이 쓰다듬어 준 그는, 아들을 남겨 두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등 뒤에서 옷자락을 붙잡은 태주 때문에 멈춰 섰다.
〈왜 그래?〉
〈꼭 가야 돼? 안 가면 안 돼?〉
〈왜? 주장을 할 거면 무슨 이유인지 대고 아빨 설득해야지.〉
〈아니…… 모르겠어. 안 갔으면 좋겠어.〉
〈이건 꼭 가야 돼. 외할아버지가 부르신 게 아니었더라도 아빤 갔을 거야. 아픈 분이 있대. 얼른 다녀올게. 원래 어른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거든.〉
왜였을까.
이상하게 그를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건 어린아이 특유의 어떤 민감한 감각이었거나, 불행을 앞둔 이의 말로는 형용 못 할 불안한 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태주의 손을 어렵사리 떼어 낸 아버지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태주는 그렇게 서 있다가, 제 침대로 가서 누워 애써 잠을 청했다. 방금 전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땐 당장에라도 다시 쏟아질 것 같던 잠이 모두 달아나 버린 모양이었다. 시야가 말똥말똥했다.
눈을 질끈 감고 안간힘을 쓴 끝에 겨우 수마와 다시 전쟁을 치를 만반의 전열을 갖춰 가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아까 전 나가 버렸던 안 실장의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회장님, 태주 도련님 침실은 이쪽입니다.〉
‘안 실장 아저씨 맞는 거 같은데…….’
똑똑. 똑똑. 협탁 위를 손가락 등으로 두드리는 소리까지 이어졌을 때는 누군가 이쪽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손이 내는 효과음이 퍽 규칙적이었다. 이상하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침몰하는 배처럼 서서히 그의 위를 짓눌러 하강했다. 그 순간의 어린 태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잠든 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회한 두 사람을 제대로 속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는 건가?〉
뒤이어 들린 것은 외할아버지의 음성이 맞았다. 그래서 생생한 꿈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으니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추론 정도는 어린 태주의 사고 회로에서도 가능했다.
〈우리 태주가 클수록 나은이를 많이 닮아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만의 생각인가? 강단 있는 성격까지 똑 닮았어.〉
〈제 눈에도 그렇습니다.〉
〈한주혁이는 제대로 치웠나? 얼마나 걸리겠어.〉
마치 현재 기온이나 오늘의 날짜 따위를 묻는 것 같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투였다.
〈염려 마십시오. 확실한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지금 주기장으로 가는 길이니 곧 경비행기가 뜰 겁니다.〉
〈조종사는. 확실한 사람인가?〉
〈네, 보고드렸다시피 이정욱 기장은 우리 항공 소속 베테랑입니다. 부모도, 아무 지역 연고도 없습니다. 아내와 어린 아들 하나가 있긴 한데 특별히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후 처리는.〉
〈시신 수습도 지시해 뒀습니다. 윤 박사가 시신 감정 절차에서 도와줄 일이 많으리라 사료됩니다. 동석한 기장 부검 결과지는 저희 쪽에서 미리 전달했습니다.〉
〈윤 박사라면 한주혁이 친구 말인가?〉
〈그렇습니다.〉
〈달라는 거 아끼지 말고 떼어 줘. 대신 입막음은 확실히 하고.〉
〈염려하실 일 없도록 조치 제대로 취하겠습니다.〉
〈결국 태주만 세상에 혼자 남게 되겠네. 자식 잃은 나랑 외롭고 짠한 처지가 비슷하구나.〉
한숨 섞인 말의 끝맺음과 동시에 서서히 태주의 목울대 위로 다가오는 어른의 손이 있었다. 가볍게 콱, 누르자 태주의 입에서 단말마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윽……!〉
괴로워서 몸부림칠수록 손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때까지도 태주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속으로 공포심을 삼켜야만 했다. 이미 때는 늦은 데다 눈을 뜨면 더 험한 꼴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사실 같았다.
〈도련님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리 태주 말인가.〉
음성이 전파되고 있는 지점은 태주가 누운 자리를 기준으로 안 실장의 것이 보다 왼쪽, 할아버지의 것이 보다 오른쪽이었다. 그리고 후자의 것이 태주에게 더 가까이 들렸다.
아무래도 목을 조르고 있는 건 제 할아버지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