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43화 (43/144)

43화

안에 든 것들을 하나씩 꺼내 눈대중으로 살펴보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작정하고 부르신 거군요.”

“그런 셈이 되나?”

“이건 일단 읽어 보고, 신중하게 고민해 볼게요.”

“정말 고마워.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우리 태주밖에 없구나.”

“이 이야기가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동안 바쁘게 살아 그런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더라. 정원을 나 대신 돌봐 줄 사람도 미리 구해 둬야 되고, 명부전에 있는 우리 나은이 가끔 들여다봐 줄 사람도 찾아야 해. 무엇보다 정신 깨끗할 때 증손자를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지만 저 결혼 생각 없어요. 생전에 그런 거 볼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네가 아주 불효막심하다는 건 알고 있지?”

“면목 없습니다.”

특별히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건 아니다. 거부감이 있지도 않았다. 그다지 별 관심이나 흥미가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다만 언젠가부터 안정된 가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외할아버지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점점 제 안에서 확실해졌다. 최소한 문 회장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 줘서 그를 기쁘거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지가 않았다. 덕분에 그 문제는 아무리 애틋한 외할머니의 간곡한 부탁이라고 한들 서두부터 기각이었다.

“네가 정 그렇다니 별 뾰족한 수 있나. 원래 부모는 자식 못 이기는 법이지. 한번 말이나 꺼내 봤어. 아프다고 하면 좀 마음 약해져서 해 주려나 싶었거든.”

그녀가 농담하듯 건네는 말에 그는 픽 웃는 것밖에 돌려줄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수심이 깊어진 태주가 잠시간 상 아래에 둔 서류 봉투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태주에게 뭔가 달라는 듯이 본인의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자신의 손을 내미니 그 위에 카드 키로 보이는 네모나고 납작한 물건을 두 개 겹쳐 건넸다.

“이게 뭡니까? 어디 출입할 때 쓰는 카드는 아닌 것 같고.”

“금고 카드 키야.”

“저도 돈 있어요. 1인 가구 쓸 만큼 벌기도 하고. 부모님 유산도 아주 많이 남아 있고요. 또 외할머니가 이미 재산 증여 많이 해 주셨잖아요.”

“돈이라면 변호사 통해서 줬겠지. 그 카드로 열 수 있는 금고에 돈 같은 건 없을 거다.”

태주는 뭔가 크게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금고의 사전적 의미는 돈이나 귀중한 서류, 중요한 물품 따위를 간수하는 궤였다. 돈이 아니라면 본인에게 소중한 물건이 들어 있다는 말이었는데, 그걸 왜 자신에게 맡기려고 하는지 의아했다.

“외할머니 건가요?”

“아냐, 네 외할아버지 금고란다.”

“그러면 더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걸 왜 저한테…….”

“우리가 쓰는 부부 침실 안쪽에 회장님이 개인적으로 쓰시는 간이 서재가 작게 만들어져 있다는 건 알고 있니?”

“아뇨. 몰랐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그 서재 카드 키야. 금고는 그 안에 있어. 그리고 그건 안 실장도 수행 비서들도 아무도 모르는 금고야. 자택 청소할 때 같이하지 않고 반드시 거긴 따로 하시거든. 네 외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믿지 않으신다. 그래서 본인 판단에 제일 중요한 것들은 씨 뿌리듯 이곳저곳에 분리해 보관하셔. 안 보이는 곳에 뭐가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내 손이 닿는 건 본가 내가 전부여서, 너한테 줄 수 있는 것도 그게 다구나.”

물론 그런 치밀한 면이 제 외할아버지답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데다 사유 재산 일체를 관리하는 안 실장마저 모르는 은밀한 금고가 있다는 게 일차적으로 이해가 안 돼 사고 전개의 걸림돌이 됐다.

안 실장이 몰라야 할 물건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게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태주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전제들을 나열해서 가장 그럴싸한 것들을 취합하고 있는데, 그녀가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참고로 금고는 비밀번호도 있어야 열리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비밀번호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카드를 몰래 꺼내 와서 복사하는 데만 해도 아주 애를 먹었거든. 워낙 철두철미하셔야지. 하지만 회장님이 아무리 꼼꼼하셔도 결국은 나 같은 옛날 사람이잖니. 우리 똑똑한 태주가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전혀 모르시는 건가요?”

“글쎄다. 집 안에 두셨을 정도니 엄청 중요한 것들이겠지? 어쨌든 그게 언젠가 너한테 도움이 될 일이 있길 바란다. 내가 너한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미안해.”

“…….”

“그리고 이거.”

한꺼번에 여러 가지 숙제를 내 준 그녀는 아직도 모자랐던 모양인지 그의 앞에 뭔가를 더 내밀었다. 처음에 주었던 것처럼 누런색 서류 봉투였다. 그러나 재단 사업에 관한 자료들과 달리 아주 얇았다. 손바닥으로 더듬어 보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한 얄팍한 두께였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장까지 입구 부분에 박혀서 단단히 밀봉이 되어 있었다.

“뭐예요? 이건.”

“20년 넘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참 고민이 많았다. 그냥 종이 한 장일 뿐인데.”

조심스럽게 그 안을 열어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한 부부의 혼인 신고서였다.

“이거…….”

상단에 부부의 이름으로 아주 낯익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한주혁, 문나은. 제 부모님의 그리운 이름이었다.

부부는 혼인 신고를 못 하고 살림을 차렸다고 들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미국의 한 의학 병원 인근에 신접살림을 마련했다.

부모님이 없는 아버지는 나라가 해 준 법적 허락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었지만 어머니의 경우는 달랐다. 외할아버지가 끝끝내 반대를 하는 통에 계속 식을 올리기를 미뤄 왔던 듯했다. 동거하면서 자연스럽게 태주를 가지게 된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전하며 제대로 허락을 받으려고 했는데, 안 실장이 부부의 임신 사실을 한발 앞서 전하는 통해 대노한 외할아버지가 영원히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천명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버지와 외할머니 간의 대화 중 어린 태주가 엿들은 적이 있던 이야기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혼인 신고도 하고, 네 출생 신고도 하고. 할 일이 많았는데…….”

“이런 게 아직 남아 있는 줄은 몰랐어요. 다 소각한 줄 알았거든요.”

“다 소각한 거 맞아. 네 외할아버지가 나은이 공부하던 노트고, 입던 옷이고 그 애 손 닿았던 건 영정 사진 하나 남겨 두고 강제로 다 태워 버려서 없잖니. 그런데 그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네 엄마 친필이라서 그랬는지…… 네 아버지가 몰래 나한테 줬었어. 하나뿐인 나은이 유품인 셈이니 진작 너한테 물려줬어야 했는데,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어서 정말 미안해. 엄마 마음이라는 게 그렇더라.”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이슬이 되는 일을 참척이라고 한다. 그 애틋하고 아득한 참척의 슬픔에 젖어 있던 태주의 외할머니가 조용히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태주의 호흡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숨결을 정리하면서 낡아서 다 바래 버린 종이 위를 더듬었다. 까끌까끌했다.

계속 만지면 더 닳아서 가뜩이나 흐려진 잉크가 더 희미해질까 봐, 그는 황급히 떼어 냈다.

* * *

겨우 씻고 나온 태주는 넓은 거실 소파에 편안하게 엎드려 있었다. 대충 샤워 가운을 걸쳐 입은 그는 머리마저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손 하나 까딱할 기운도, 그럴 의지도 없었다.

심지어 아까 전부터 겉옷 안에 넣어 둔 휴대폰 진동 소리가 계속 울려 댔다. 그 규칙적인 소음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드레스 룸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서 방치해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온몸의 기력이 다 소진되고 없었다. 짐작건대 아마 신체가 아니라 정신의 기운이 죄다 방전된 것이리라.

그는 낮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서류 봉투, 그리고 카드 키에 눈길을 두었다. 다른 것들은 전부 차치하고 얇은 서류 봉투에 시선이 고정됐다.

만지면 닳을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든 태주는 수기로 또박또박 작성한 글자들을 눈여겨보았다.

‘혼인 신고서…….’

두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 주기라도 하듯 아버지의 것은 둥글고 다정했다. 반면 어머니의 것은 야무지고 반듯한 데가 있었다.

아버지는 떠올리면 그나마 추억할 것들이 있었다.

다만 가끔은 얼굴마저 사진으로 본 게 전부인 어머니가 많이 그리웠다. 그녀의 체온이 얼마나 따뜻한지, 어떤 좋은 향기가 나는지, 자신을 얼마나 다정한 얼굴로 바라봐 주는지, 태주는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움만큼 낯선 감각이 함께 수반됐다.

이제 그런 두 가지 혼재된 감정마저 무뎌져 평소엔 잘만 잊고 사는데, 이렇게 한 번씩 기억이 날 때면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테이블 위에 종이를 도로 내려 둔 태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여전히 진동 소리가 울려 댔으나 눈꺼풀을 들어 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는 까무룩 얕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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