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42화 (42/144)

42화

까마득한 옛날, 한국 항공의 창업주 문현기 회장이 회사 설립 20주년에 했던 일은 기념일을 자축하기 위한 축하연도, 정재계 유력 인사들을 초대해서 즐기는 만찬회도 아니었다. 바로 한국 항공의 모체인 대영 그룹 본사 사옥 인근에 기념 재단의 건물을 짓는 일이었다.

그는 화려한 연회장에서 고급 샴페인을 드는 것 아니라, 공터의 한복판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주춧돌을 쌓고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고는 1년여에 걸쳐 외관이 화려한 건물이 완성되자 재단의 이사장으로 제 아내를, 또 나이 어린 딸을 이사로 선임했다.

이 일은 일각에서 빈축을 샀다. 그가 한 행위가 단순히 건물 한 채를 올리는 게 아니라 족벌 경영 체제를 공고히 하고 창업주 일가를 신성시하겠다는 노련한 목적임을 알음알음 눈치챘던 것이다.

다만 초대 이사장이었던 태주의 외할머니는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지금까지도 재단 내외의 일을 돌보면서 조용히 지냈고, 본사의 어린 대주주이자 재단 이사였던 어린 딸은 이미 사망하고 없어서 그의 원대한 목표는 흐지부지되는 모양새였다.

“그냥 차나 한잔하자고 부른 거야. 경계 안 해도 돼. 회장님은 안 오신다.”

아주 오랜만에 재단 건물에 방문하게 된 태주가 접견실의 출입문을 힐끗 살피자, 그의 외할머니가 눈치 빠르게 이 사실을 깨닫고 그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동안 그녀는 사이가 나쁜 외조부와 외손자 간의 관계를 완화해 보고자 꽤 부단한 노력을 행해 왔다. 그러나 웬만해선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태주가 오직 이 일에서만큼은 적극적이지가 않았다.

태주는 알겠다는 양 표면의 꽃무늬가 퍽 우아한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무심코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를 주시하는 그의 표정이 다소 난감해졌다.

“외할머닌 볼 때마다 마르시네요. 여전히 이유는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예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지. 이렇게 나와서 너랑 차도 마시고, 대화도 할 수 있는데 살 좀 빠지는 게 대수야?”

“하지만 건강 악화의 표식은 갑작스러운 체중 감소가 제일 먼저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네가 날 걱정하고 신경 쓰는 반만큼만 네 외할아버지한테 마음을 주면 얼마나 좋겠니.”

“저 붙잡아 앉혀 놓고 그런 말씀 하실 거면 돌아가고요.”

“매일 하는 소리잖아. 듣고 넘겨. 저녁은 먹고 가야지.”

그녀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가 서둘러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 태주의 정면에서 바로 보였다.

“내가 우리 태주 걱정 받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일 거야? 안 그러니?”

다소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태주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사람의 얼굴이 있어서였다. 그녀가 틀렸다고 말하면 많이 실망할 것 같아 끝내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데 비서가 두 사람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이사장님. 방금 차 대기시켰습니다.”

“그래요. 태주야, 일단 나갈까? 대영 그룹 영빈관은 회장님 귀에 우리가 한 이야기가 전부 들어갈 것 같아서, 내가 조용한 식당을 따로 예약해 놨어.”

태주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언제나 바쁜 태주를 배려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좀처럼 일방적으로 날짜를 잡아 방문해 달라고 하는 법이 없었다. 정 보고 싶은 일이 생기면 수일에 걸쳐 태주의 일정을 확인하고, 서로 타협한 끝에 그중 하루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짜고짜 전화가 걸려 와서 잠깐 보러 와 달라고 하기에, 제게 은밀하게 해야 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어나세요. 손잡아 드릴게요.”

그는 외할머니를 부축하려는 비서를 뒤로 물리고, 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그의 큼지막한 손을 붙잡았다.

* * *

두 사람이 함께 차량으로 이동한 곳은 꽤 먼 곳에 있는 조용한 한정식집이었다. 낮지만 든든한 산자락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물길이 나 있는 목 좋은 위치였다. 객실 창가에 서면 정원이 탁 트여 있는 게 바로 보였다. 초록색으로 만연해서 마치 숲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특히 잎사귀가 풍성한 나무들은 이곳에서도 봄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음을 여실히 알리고 있었다.

그들이 객실로 들어서자, 도착하기 전에 음식들을 모두 차려 둔 모양인지 상에 온갖 찬들이 가득했다. 일부러 태주를 위해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특히 자주 손을 대는 반찬들이 상 위에 일사불란하게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태주는 외조부모 내외와 거의 함께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그가 미국으로 완전히 생활 터전을 옮겼을 때에도,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태주를 보러 1주일에 한 번 꼴로는 무조건 와서 밥 먹는 모습을 보고 가곤 했다.

옛날 사람답게 본인이 직접 차린 식사를 하나뿐인 외손자에게 먹여 주고 싶었던 듯했다. 혹자는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만이 공생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신의 미숙했던 미성년기를 오롯이 그녀와 함께 보낸 셈이다.

“입맛에는 맞니?”

“아직 입에도 안 댔어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태주가 손 씻는 물에 두 손을 깨끗하게 헹군 뒤 가까운 곳에 있는 반찬부터 한 입씩 맛보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는 그녀는 숟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태주가 의아한 듯이 쳐다보면 그제야 정갈한 태도로 잣죽 정도만 몇 입 대고 말았다.

그동안은 짐작에 불과했던 것들이 확신으로 이어졌다. 음식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한다는 건 소화 기관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일단 모르는 체했다.

“정말로 널 부른 이유가 뭔지 많이 궁금하겠다. 안 물어보는 거야?”

“뭐…… 이유 있으시니까 부르셨겠죠.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 하실 거고요. 괜히 쓸데없이 오라 가라 하는 분도 아니시잖아요.”

“그럼. 우리 태주 바쁜 거 아는데. 실은 나도 이제 슬슬…… 주변 정리를 좀 할까 하고.”

한 문장 안에 그녀가 사용한 모든 어휘들이 꽤나 불안함을 조성했다. 확신에 재확신을 얻게 된 태주는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려 두고, 제 입 주변을 닦았다.

“외할머니, 어디가 얼마나 안 좋으신 건지 저한테는 말씀해 주시는 편이 낫지 않아요?”

그녀가 잠시 침묵한 뒤 어렵사리 입을 떼는 모양새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했다.

“눈치챘을 것 같았다. 별로 안 좋아.”

“어디가요. 주치의는 뭐라고 했어요. 위험한 거예요?”

“몸이야 자연스럽게 늙어 가는 거잖니. 시간이 갈수록 쇠하는 게 당연한데, 하필이면 치매 초기 증상까지 조금 있단다. 가족력이라서 아주 오래전부터 만에 하나를 위한 준비는 해 왔다는 거 너도 알 거야. 덕분에 아직은 괜찮아. 버틸 때까진 버텨 볼 생각이야.”

“약은 드시고 계세요? 초기엔 약으로도 통제가 가능한 걸로 알아요.”

“응, 얼마 전부터 열심히 먹고 있어. 가능한 한 추해지지 않게 의연할 자신도 있어. 하지만 언제 갑자기 확 나빠질지는 나도 알 수가 없으니…… 내 딴에는 정신이 더 심하게 망가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두고 싶었어.”

“이거 회장님도 아세요?”

“매일 아침 식사를 같이하는 사이인데 당연히 아시지. 내가 자꾸 깜빡깜빡한다는 걸 알려 준 게 회장님이야. 종종 아침 식사를 두 번 세 번 하자고 말한다는구나.”

아주 오래전에 그녀의 외할머니 쪽에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인 가족이 있다고 들었다. 그녀는 그게 한 세대를 건너뛰어 자신에게도 발현할까 걱정이 됐던 모양이었다. 까마득한 예전부터 주치의를 통해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태주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있는 제 외할머니는 언제나의 그녀와 같아서, 그런 병을 앓고 있다는 현실감도 없었고 점점 퇴행하게 될 모습이 상상이 가지도 않았다.

씁쓸한 숨을 삼킨 태주가 애써 덤덤하게 물었다.

“정리라는 말은 참 쉽네요.”

“태주야. 당장 내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할머닌 괜찮아. 뭐 언젠간 죽겠지만. 그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일어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남게 되는 사람은 괜찮지가 않다. 태주는 그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대체 뭘 어떻게 정리하시려고요.”

“내 주변에 있는, 아직 풀지 못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는 거지. 우선, 조만간 재단 이사장직을 내려놓을 셈이야.”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안 해요.”

“너무 싫다고만 하지 말고. 한번 생각은 해 볼 수 있잖아. 어떻게 안 될까?”

“죄송해요. 전 대영 그룹 감투는 쓰고 싶지 않아요. 계열사인 한국 항공에서 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해. 재단은 네 할아버지 다른 계열사들이랑은 성격이 다른 단체야. 처음엔 회장님이 자금도 비밀스럽게 융통하고, 식구들도 자연스럽게 본사에 끌어들일 생각으로 지으신 게 맞지만, 내가 수십 년 일하면서 재단의 체계를 완전히 바꿔 놨다. 대영 그룹이랑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어도, 이제는 수익금 생기는 족족 좋은 일에 써. 미혼모 가정들도 돕고, 치매 노인들도 지원하지. 이사장 권한도 아주 크단다. 그래도 안 될까?”

미혼모 보호 사업은 법적으로 결혼하지 못했던 상태에서 태주를 낳았던 제 어머니의 몫이고, 치매 노인 지원 사업은 앞으로 자신이 겪게 될 상황에 대한 걱정에서 발로한 것 같았다.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좋은 말로 회유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단순히 태주의 의중을 떠보는 말도 아닌 게 분명했다. 그녀가 조용히 내미는 서류 봉투에는 재단의 사업 동향과 자금 운용에 관한 본격적인 보고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