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오랜만에 차영과 만나게 된 편의점 앞 강아지가 낑낑거렸다. 쪼그려 앉아서 손을 달라고 하니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앞발을 내미는 모양새가 그동안 많이 기다렸던 것 같았다.
강아지와 놀아 주고 있는 차영을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묵묵히 지켜보던 태주는 참다못해 한 소리 했다.
“나는.”
“뭘?”
“나는?”
“그러니까 뭐.”
뒤늦게 태주가 앉은 방향을 돌아보자, 그가 허리를 깊게 숙여서 차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낸 차영이 제 뺨을 한 손으로 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들의 뒤편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근방에 주차된 차량도 없었다.
“미쳤나 봐!”
“요컨대 사람만 없으면 되는 거 아냐.”
“요새 어떤 세상인지 몰라? 편의점 안에도 CCTV 카메라 있는 세상이니까 각별히 주의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너도 알겠지만, 여기 거의 사각지대야. 안 보인다고.”
“그래도! 이 세상에 100퍼센트가 어디 있어?”
“와, 치사하네.”
“그쪽이랑 달리 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거지. 한 번만 더 해.”
“더 하면. 이번엔 또 무슨 벌이 날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 눈이 막 빨갛게…….”
“그만해.”
그가 픽 웃었다.
“그건 그때 생각할 거야. 지금은 기분이 좋아서 죄질에 비해 매우 가볍게 처벌할 것 같아.”
“징계에 일정한 기준이 없고 기분 따라 하면 그게 징계야? 화풀이지? 이차영 관제사 이미 제주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이거지.”
솔직히 아무 일 없이 이곳으로 안전하게 되돌아오게 되어서 자신이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한 심리적 충만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태주가 무슨 볼멘소리를 해도 이내 덕담으로 치환되어 들렸다. 생글거리는 그의 뺨을 강아지가 부드럽게 핥았다.
동시에 차영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태주가 손을 불쑥 뻗더니 강아지의 턱을 살짝 밀어냈다.
“깜짝이야. 왜 얘한테 그래.”
“이거 내 건데 이 자식은 감히 어딜 핥는 건데?”
“놀고 있다. 본인 팔뚝만 한 강아지거든?”
“난 소유권 구분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야. 분명히 말하는데 거긴 내 땅이야.”
“어이가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
“거기도 내 절이야.”
그는 일갈하듯 내뱉고는 다리를 척 꼬고 멀리 주차장을 쳐다보았다.
때마침 골목 어귀에 진입하는 검은색 차량이 한 대 있었다. 왠지 태주의 눈에 익었다. 차영이 헛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으나, 호기심 때문에 계속 차영이 아닌 차량에 시선이 고정됐다. 시력이 좋은 태주가 뚫어져라 그것을 쳐다보다가 멈칫했다.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지고, 표정마저 몹시 안 좋아졌다.
“한 기장?”
어느 틈에 차영이 조용한 태주가 의아했는지 그를 다시 돌아봤다. 이 움직임을 미리 눈치채고 서둘러 표정을 정리한 태주가 차영과 눈을 마주쳤다.
“아직 날씨 춥다. 그 개새끼 그만 예뻐해 주고 넌 이만 들어가. 질투 나.”
“개새끼라니.”
“용법이 틀렸어?”
“아니, 물론 맞지만……. 불손하게 들리니까 그렇지. 이렇게 쪼끄만 애한테.”
“크든 작든 내 거 핥은 개새끼인데 강아지님이라고 불러 드리리?”
“진짜.”
힐난하듯 째려보자 그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양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차영은 막무가내로 나오는 그에겐 익숙했다.
“뭐, 좋아. 그런데 나만 들어가? 한 기장은?”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이 주변 한 바퀴만 더 돌려고.”
“나도 같이 갈까?”
“다음에. 넌 오늘 무리해서 일찍 들어가 쉬는 게 낫겠어.”
“혼자 있고 싶다는 이야기를 꽤 어렵게 하시네. 삐졌어?”
“에둘러 말하는 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면서.”
그는 기억력이 좋고, 응용력은 더 좋았다.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차영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라는 듯이 그가 손짓해서 그 항로를 따랐다. 공동 현관까지 바래다줄 셈인지 태주가 차영의 곁에서 함께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일 봐.”
아쉬움을 뒤로한 채 먼저 들어가는 차영의 뒷모습을, 태주가 끝까지 주시했다. 자취를 감춘 뒤에도 계속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태주는 물끄러미 건물을 올려다봤다. 마침 차영도 집에 들어간 모양인지 2층 그의 집에 밝은 불이 켜지는 게 보였다.
잠시 후, 태주는 아주 느긋하게 뒤돌아섰다.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마침 천천히 주차장으로 진입한 검은색 차량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 한 사람이 내렸다.
“도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 실장은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는 그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 * *
자택 인근의 항구 근방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완연했다. 어두운 바다를 비추고 있는 불빛은 일견 화려했지만 한편으로는 밤에게 세력이 많이 밀려 공허했다. 이곳에서 출발해 어딘가로 떠나갈 배들도 쓸쓸한지 뱃고동 소리로 서럽게 울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차량 안에 앉아 이 풍경을 지켜보고 있는 태주의 눈에는 모든 게 신파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입을 다물고 있던 태주가 조수석의 안 실장을 향해 불쑥 내뱉었다. 앞뒤로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무척 심각한 기류가 흘렀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조금 더 물러서라는 수신호를 보낸 안 실장이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업무용 패드를 내밀기에, 일단 태주도 받아 들었다. 화면 속에는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태주가 제주 국제공항 청사에서 차영의 어깨를 부축하는 장면이나, 함께 화장실로 들어서는 장면, 또 주차장에서 같은 차를 타고 있는 장면, 혹은 언젠가 편의점 앞에서 추운 날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 같은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패드를 쥐고 있는 태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주도까지 사람 붙였어요?”
“제주도까지 붙인 게 아니라 사진 속에 있는 분에게 붙인 겁니다.”
“말장난하지 말죠. 그딴 건 내 화만 돋운다는 거 알 텐데.”
“…….”
“안 실장 당신 아직도 부지런하게 이 짓 합니까? 이젠 나이도 지긋하신데 여전히 정력이 넘치시네요. 부모님 사이에 제가 생긴 것도 당사자들이 고백하기 전에 고해다 바치셨죠. 외할아버지가 아버지한테 필요 이상으로 거부감을 갖게 된 덴 당신 책임도 있어, 알아?”
그 부분은 인정한다는 양 안 실장이 잠시간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도, 태주도 피차간에 시간을 경제적으로 쓰는 사람이었다. 침묵이 길진 않았다.
“도련님, 그분이 이차영 씨라는 건 알고 계신 겁니까?”
“내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길 강아지 구경하는 머저리일까 봐 그러는 겁니까?”
“그러면 우리 항공 전 조종사인 이정욱 기장의 외동아들이라는 것도 잘 아시겠군요.”
분노를 가라앉히려 창밖의 풍경에 애써 관심을 두고 있던 태주가, 확 고개를 돌렸다.
“대체 두 분이서 뭘 하시는 겁니까.”
“뭐 하는 거 같아. 상상력 부족한 안 실장을 위해 내가 설명해 드려야 되나?”
“무슨 생각이신지를 여쭙는 겁니다.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이차영 관제사한테 접근하셨다는 건 짐작됩니다. 이 관제사가 전세로 얻은 집 전세금이 시가에 비해 지나치게 터무니없더군요. 그분이 계약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도련님이 해당 건물을 매입하셨고요. 혹시 그냥 노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쨌든 상대가 너무 안 좋습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같이 노실 수 있는 상대 중 단연 최악입니다.”
“충고가 과한데.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 하고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도련님도 도련님이지만 추후에 이차영 관제사에게 큰 상처가 될 겁니다. 이차영 관제사가 도련님이 누구 아들인 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그딴 것도 생각 안 해 봤을까 봐.
태주는 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러나 이 순간 안 실장의 말에 반박할 근거가 제게 없었다. 분노로 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속내를 어지럽히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다. 태주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끝내 얼마나 큰 상처를 입게 될지 같은 건 아무런 상관도 관심도 없었다. 각오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된 차영이 많이 괴로워질 걸 알기에 제 욕심으로 그의 주변을 맴돌고 이 아슬아슬한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일이 매 순간 고통스러웠다.
차영에게 너무 미안한데, 이기적인 자신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일, 조만간 회장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나한테 먼저 왔으면 그 정도 생각은 하고 온 거 아닙니까.”
“도련님께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고자 온 것뿐입니다.”
또 한 번 제 인생을 망치겠다고 선언하는 안 실장의 딱딱한 말투가 유독 거슬렸다. 참아 주다 못 한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패드를 차량 앞 유리에 확 던져 버렸다.
타악! 계기판에 부딪혀서 기계의 유리가 산산이 조각나 파삭 깨지고 말았다. 파편이 튀어 안 실장의 얼굴과 목울대 쪽에 자잘한 상처를 입힌 것 같았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차분하게 목을 닦아 냈다. 태주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통증이라도 느껴지나 봐? 난 안 실장 인간 아닌 줄 알았는데.”
“회장님과 저 사이에 비밀은 없습니다. 아무리 이러셔도 저는 보고를…….”
안 실장이 덤덤하게 대꾸하던 바로 그 순간, 태주의 눈동자가 잔인하게 빛났다. 이윽고 그가 뒤에서 안 실장의 머리채를 잡고 확, 당겼다.
“윽……!”
“없어?”
안 실장이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찾지 못하고 연신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완전히 손아귀에 장악한 머리채를 다시 한번 난폭하게 휘두른 태주는, 뒤이어 남자를 향해 고개를 기울여 음산하고 싸늘하게 명령했다.
“이 좆같은 새끼야.”
“으윽…… 읏!”
“그럼 만들어.”
그러고는 안 실장의 이마를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내쳐 창문에 처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