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한태주…….”
“괜찮아?”
“아니, 전혀. 나 도저히 안 되겠어.”
태주에게서 벗어나 나가려고 하는데, 손목이 붙들렸다.
“진짜 나갈 거야? 네가 정말 무서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면 나도 두 번은 안 잡아. 강제로 타게 만들 생각 없어.”
“…….”
“침착하고, 네 마음에 귀 기울여 봐. 나 못 믿겠어?”
“믿어. 그런데 나 이거 타고 있다간 죽을 것 같아!”
“그건 믿는 게 아니지. 차영아, 너 절대 안 죽어. 나 있잖아. 이거 내가 모는 기체야. 난 내 비행기 안에서 내 승객 절대 죽게 안 해.”
그는 자신만만하게 확신했다. 차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강제로 타게 만들 생각은 없다면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난 널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 좀 치사한 방법을 쓰는 거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약간의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차영을 달래듯이 다시 자리에 착석시킨 태주가 직접 시트의 벨트를 매 주었다. 그걸 보면서 차영은 태주에게 약간의 실망을 주고 이대로 여길 벗어날까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윽고 태주가 살짝 허리를 숙여 앉아 차영을 올려다봤다.
“넌 이걸 풀 수도 있어.”
“자기가 채워 줘 놓고.”
“그래도 넌 풀 수 있어. 도박판에서 원래 얼마든지 발 뺄 수 있는 거니까. 중독성이 좀 있다는 게 문제지만.”
누구보다 극복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다. 다만 두려울 뿐이다. 그리고 눈앞의 태주는 그걸 도와주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고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제 문제에 매몰되어 있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사실들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가자 눈에 들어왔다. 제복을 갖춰 입은 기장이 나와서 승객 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니 다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등석이라 좌석 간의 거리가 있어서 망정이지 무슨 상황인지 고스란히 중계 방송을 할 뻔했다. 한껏 데시벨을 낮춘 차영이 태주에게 물음을 건넸다.
“이렇게 승객들 탑승 중에 칵핏 비워도 돼?”
“안 돼. 규정 어기고 나온 거야. 바로 다시 들어가 봐야 돼.”
“그러면 이만 가.”
“진짜?”
“응, 진짜.”
“운항 중엔 옆에 못 있어 줘. 저 안엔 외부인이 들어올 수가 없거든.”
“도윤이 있으니까 도와줄 거야. 빨리 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꼭 친동생을 대하듯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 태주가 허리를 세워 섰다. 그가 사라지고 나니, 존재감을 뿜고 있던 자리가 무척 허전해 보였다. 단단하게 채워진 시트 벨트를 풀고 싶은 욕망과, 이걸 견뎌 내고 싶은 욕구가 상호 간에 충돌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태주가 모는 항공기가 공포를 뛰어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직 이코노미석까지 전 승객이 탑승하지 않은 듯했다. 바꿔 말하면 내릴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차영은 눈을 차분히 내리감았다. 그러고는 양을 셌다. 한 마리, 두 마리 숫자가 늘어 갈수록 정신은 말똥말똥해져 가고 있었지만, 선명해져 간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두려움을 잠시간 잊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찰나였다.
그는 차분히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어릴 때처럼 바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도리어 어른이 되니 아는 것도, 들은 바도, 본 일들도 많아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기절하지는 못한 채로 이 불안을 느끼고 있자니 전 승객이 모두 탑승한 듯 문을 닫겠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그것은 곧 이륙 안내 방송으로 이어졌다. 기체가 뜨고 나면 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 한 사람만을 위해 회항해 달라고 말할 순 없었다. 엄청난 손실이고 민폐였으니까.
머릿속에 별의 모양들처럼 비행기 구간 사이 지도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이륙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역시 안 될 것 같다.
덜덜 떨던 차영이 벨트를 풀고 도윤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탑승하신 항공기는 한국 항공 1701편이며, 저는 이 비행기를 몰아 여러분을 제주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기장 한태주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뻣뻣하게 굳은 차영의 곁에 도윤이 서둘러 나타났다.
“차영아, 괜찮아? 얘 식은땀 좀 봐.”
그 뒤로 태주가 뭔가를 더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확한 언어로 차영의 귀에 꽂히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신뢰감 있는 음성이 자장가처럼 귓가에 맴돌다가 다급히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나 정신없이 몰아치는 머릿속 등지에 미립자처럼 작은 형태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린 차영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도윤과 최대한 분명하게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물 줄까? 얼음물 있는데. 아니면 따뜻한 거?”
“도윤아, 나 괜찮을 것 같아.”
“진…… 심이야? 너 지금 식은땀도 계속 나. 마그네슘 부족한 사람처럼 눈 위도 막 떨리고……. 동승한 의사 있는지 한번 물어나 볼까?”
“괜찮아, 아마도.”
“네 대답부터가 추측성인데.”
“진짜로. 좀 혼자 있고 싶어. 그냥…….”
네가 아니라 저 사람 목소리를 듣게 해 줘.
“……그렇게 해 주라.”
계속 걱정스러워하는 도윤에게서 눈을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기장인 태주가 조금 전 안내했던 건 이륙하겠다는 메시지였던 모양이다. 그의 몇 마디가 이어지는 사이 서서히 바퀴가 좌우로 이동하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자신을 태운 비행기가 서서히 지상과 분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됐다.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것처럼 기체가 조금씩 고도를 높여 갔다.
장거리 노선인 국제선에 비하면 제주로 향할 때의 운항 고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도 이미 차영은 하늘색의 깨끗한 창공에 마음을 빼앗겼다. 색이 우아하고, 결이 잘 정돈된 비단처럼 보였다. 언젠간 3만 피트가량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곳에서만 발견된다던 비행운을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막상 겪어 보니 난다는 건 별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귀중한 목숨을 하루아침에 앗아 갈 만큼 대단한 일이 못 됐다.
귀가 멍한 상태로 창밖을 내다보던 차영은 소리 없이 아직 남아 있는 두려움과 치밀어 오른 서러움을 함께 삼켰다.
* * *
내륙 지방과 달리 제주도는 이른 봄이 찾아왔다. 방파제 인근의 바닷가를 함께 걷는 동안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의 뺨에 부딪혔다.
원래는 태주가 식당을 예약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내리자마자 공항 화장실에서 구토한 차영 때문에 제주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일 따위는 꿈도 못 꿨다.
대신 그들은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사 들고 인근을 차로 드라이브했다.
태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영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기력이 달려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라야 겨우 의미 있는 음성을 내뱉을 수 있었다.
“여기 되게 가깝다. 진짜 한 시간이면 오네.”
“해 보니까 어때? 더 먼 데도 갈 수 있겠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게 한계인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하지 않은 대답 사절이야.”
“정말 잘 모르겠어서 그래. 지금 심정으로는 다시 돌아가는 길에 그냥 배 타고 싶어.”
“경험이 스승이야. 앞으로 거리를 조금씩 늘려 보자. 내가 도와줄게.”
그는 기체에서 자신을 설득했을 때처럼 분명하게 확신을 담아 말했다. 차영도 그랬으면 했던 터라 끄덕였다.
“어쨌든 한 가지 알겠는 건 나한테 한 기장이 계속 필요할 것 같다는 거야. 그쪽 목소리가 도움이 많이 됐어.”
이 말에는 덤덤하던 그의 안면이 설핏 굳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깊어진 눈매는 매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의 것 같았다. 잠시 태주의 기분을 살피던 차영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표정으로 덧붙여 물었다.
“원래 기장 방송 그렇게 많이 해? 까먹을 만하면 한 번씩 계속 한 것 같던데.”
“겨우 한 시간 비행에 아무도 그렇게 안 해.”
“그런데 왜 그랬어?”
“당연히 너 때문이지. 칵핏을 비울 순 없으니까.”
“공사 구분을 잘 못 하는구나?”
차영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으나, 태주는 그저 픽 웃을 따름이었다.
교신할 때, 통화할 때,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화할 때 듣던 태주의 목소리가 안정을 찾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한 시간가량은 차영의 머리에서 통으로 삭제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가 내뱉은 말들이 무엇이었는지도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귀 주변에서 맴도는 그의 음성 속 다정함이라든지, 어울리지도 않는 배려, 그리고 걱정과 염려들은 제대로 기억이 났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잖아.
그렇게 속삭이듯이, 차분하고 따뜻하게 달래 주는 그의 목소리 한 조각 한 조각이 차영의 뇌리에서 전부 생생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의아한 것이 생긴 차영이 걸음을 멈추고 태주와 시선을 교환했다.
“지난번부터 느낀 건데 왜 내가 비행기를 못 타는 문제에 대해서 유독 신경 써?”
“네 모든 걸 신경 쓰는데 그게 그중 하나인 거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가 의심을 사전에 차단하듯 이어 말했다.
“난 너랑 여행하고 싶어. 가까운 데도, 먼 데도. 여기저기 다니는 거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파일럿 됐겠지.”
“내가 파일럿이 된 건…….”
“눈이 좋아서라면서.”
“눈도 좋아서지.”
“안 웃겨.”
“네가 나한테 바라고 있는 것처럼, 난 안전하게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운반해 주고 싶어. 다치는 사람 없이. 운 나쁘게 험한 일을 당하는 사람 없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의외네.”
그가 여태까지 거짓을 말했다는 건 아니지만, 왠지 처음으로 태주의 솔직한 속내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한 것은 태주인데 도리어 차영이 멋쩍어졌다. 어쨌든 제 생각에 이런 마음만으로도 그는 분명히 좋은 파일럿이다.
“고마워.”
“뭐가?”
“그냥 다. 난 한 기장이랑 달리 고맙다, 미안하다 그런 말에 그다지 안 인색하거든. 그래서 계속 말할 거야.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용기를 줘서, 다시 도움닫기를 하게 만들어 줘서, 그때 옆에 있어 줘서.
마음의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내보여 줄 수 없다는 건 때론 참 불편한 일이다. 이 순간 자신의 기분과 생각을 태주에게 각인시키려는 듯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감사 인사를 내뱉은 차영은 스스로의 의지로 한 발을 더 내딛듯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앞서가는 차영을 잠자코, 애틋하게 지켜보던 태주는 그가 왜 안 오냐는 듯 돌아봤을 때라야 뒤늦게 따라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