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완연한 봄을 거의 목전에 둔 어느 이른 아침.
기내에 한데 모인 운항 및 객실의 전 승무원들이 브리핑을 하는 중이었다. 앞에 선 태주가 부기장의 간단한 기상 고지 후 몇 마디를 보탰다.
“한태주 기장입니다. 오늘 우리 비행기 한국 항공 1701편입니다. 날씨는 홍선재 부기장이 방금 말씀했듯 맑고 쾌청합니다. 오늘 승객 중에 항공기 탑승 시 불안을 느끼는 승객이 한 분 계십니다. 사전 체크 리스트에 구역을 기재해 뒀으니 해당 듀티에선 확인하시고 좌석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도윤이 승객 목록을 눈대중으로 살폈다. 놀랍게도 정말 차영의 성명이 적혀 있었다. 아까 전 태주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더라면 채신머리없이 소리라도 질러 눈총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아까 전 정비고에 가서 항공기를 확인하고 돌아온 태주가 갤리로 들어가려던 도윤을 갑자기 붙잡았을 때, 그녀는 그가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만한 조건의 남자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던 터라, 결혼할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데이트 정도는 한두 번 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정작 잠시 시간을 내 달라고 요구한 그가 꺼낸 말은 전혀 다른 별에 있었다. 차영이 오늘 이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퍼스트 전담인 도윤이 특별히 신경을 기울여 달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차영이 항공기에 오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는 찰나, 아까의 태주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제가 억지로 추진한 겁니다. 아마 막상 공항까지 와도 안 타겠다고 할 수 있어요.〉
〈왜 그러셨는데요? 차영이 비행기 무서워하는 거 아시고 내린 결정인 거죠?〉
〈영원히 그럴 순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걘…… 걔가 왜 그러는지도 아시는 거예요?〉
태주는 그 질문에만큼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윤이 맥락을 바꿔 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덧붙였다.
〈처음에 기체에 탑승해서 경련했을 때도 제주행 비행기였다고 들었습니다.〉
〈그것까지 아시는 분이 또 제주도를…… 이거 혹시 차영이 괴롭히시는 건가요? 그러면 전 절대 협조 못 합니다. 한 캡이 뭔데 걔 상처 들쑤셔요?〉
〈이차영 관제사를 위해서예요.〉
〈그건 기장님 생각이죠.〉
〈네, 당연히 내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 생각으로 내가 움직일 순 없지 않습니까?〉
〈아니, 무슨 그런…….〉
그녀는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말도 찾질 못했다.
〈아무튼 신경 써 주세요. 계속 들여다보고요. 무슨 일 생기면 구도윤 씨 책임입니다.〉
〈그걸 제가 왜 책임져요? 타게 만든 사람이 책임지셔야죠.〉
〈객실에 탑승한 순간부터 하기할 때까지 승객의 안전은 승무원 관할 아닙니까? 구도윤 승무원 생각보다 프로 의식이 없네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저기요!〉
그는 발끈한 도윤을 두고 갤리를 그대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어 그를 멈춰 세운 도윤 덕분에 뒤를 돌아봤다.
〈저기 한 기장님! 잠깐만요.〉
〈뭡니까. 빨리하세요.〉
〈저기…… 저희 팀 비행이 갑자기 국내선 제주행으로 바뀌었거든요. 원래는 국제선 베를린행이었어요. 짐도 다 싸 놨는데.〉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뭐 문제 있어요?〉
〈아니, 같은 국제선도 아니고 변동 폭이 너무 크니까. 혹시 한 기장님께서 저희 팀을…….〉
그가 계속해 보라는 듯이 물끄러미 도윤을 직시했다.
〈……그런 힘까진 없으시겠죠? 아뇨,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워낙 허무맹랑한 가설이라 근거가 충분치 않았다. 순간 도윤의 머릿속에 차영을 위해 태주가 제 운항 스케줄마저 변경한 게 아닐까 싶어졌던 것이다. 만약 그가 한 일이라면 의도는 분명했다. 다만 똑같은 피고용인인 한태주에게 객실 승무원 팀을 통째로 제 입맛 따라 바꿔 댈 만한 커다란 권한이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굳이 그렇게까지 배려할 이유도 태주에게 없을 터다.
“다른 특이 사항 있습니까? 없으면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10여 분 전의 일을 곰곰이 되새겨 보던 도윤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인지하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정면에 선 태주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이미 그는 제 할 말을 모두 끝내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뒤였다. 자연스레 그녀도 볕이 스며들고 있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태주에게는 여러 가지 딴죽을 걸기도 했지만, 도윤은 차영이 정말 내키지 않는다면 누가 시킨대도 하지 않을 성미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만일 비행기에 탑승한다면 그건 차영에게도 극복의 의지가 있는 것이리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어쨌든 친구인 자신은 도울 의무가 있었다.
* * *
같은 시각.
차영은 오전부터 공항 터미널에 나와 있었다. 그가 공항에서 주로 머무는 곳은 이곳이 아닌 보다 구석에 있는 관제탑 안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차영도 여행객의 한 사람으로 여기에 서 있게 됐다. 성인이 된 뒤 이런 목적으로 공항 부지를 밟은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한 손에 겹쳐 쥔 지갑과 휴대폰이 오늘 차영이 챙겨 온 물건의 전부였다. 특별한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태주가 운항하는 국내선을 타고 제주에 갔다가, 같은 날 바로 그를 따라 돌아오는 매우 짧은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점심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을 테지만 제주에 한발 앞서 도착한 봄바람을 만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리라.
게이트를 통과한 차영은 면세 구역을 영혼 없이 걸었다. 머릿속을 비우고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에 대해 채워 넣었다. 태주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쉬는 날이었던 차영은 그와 간만에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면 어떨까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태주가 좀 먼 곳으로 떠나자기에 자연스럽게 동의했다.
그가 생각한 ‘먼 거리’와 자신이 생각한 것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운항 관리 팀에 의뢰해 없던 비행 일정까지 만든 태주는 이른 새벽, 제집으로 내려와 그들이 가야 할 곳이 경기도 외곽이나 강원도 등지가 아닌 제주도임을 알렸다.
그때 아연해진 제 얼굴은 거울을 못 봤지만 상상이 갔다.
물론 그 말을 듣자마자 차영은 거절하려고 했다. 그가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상대가 납득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은 분리되어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었으면 좋겠다고 차분히 설득하려던 찰나, 불현듯 자신을 믿어 보라면서 태주가 제게 했던 회심의 한마디가 떠올라 멈칫하게 됐다. 그 다정한 말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차영을 연신 괴롭혔다. 덕분에 차마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널 날게 해 줄게.〉
결국 자신은 그 짧은 한 문장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차영이 저벅저벅 걸었다. 탑승구까지 가는 길은 왜 이렇게 짧은 건지.
마침내 그는 이미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뒤에, 조심스럽게 섰다.
태주가 예매해 둔 제주행 티켓은 퍼스트 객실이었다. 승객 중 입장이 가장 우선이라, 미리 검표하던 승무원이 그를 따로 안내했다. 잔뜩 겁에 질린 그는 마음의 불안을 최대한 억누르고, 탑승교를 지나 올라탔다.
그러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 진짜 이차영이네.”
도윤이 인수인계를 받듯 바통을 물려받아 차영을 자리로 안내했다.
“도윤이 너도 이거 타?”
“응, 몰랐는데 나 이거 어제 갑자기 바뀐 거 있지.”
“갑자기? 왜?”
“일정 관리는 운항 팀에서 하는 일이니까 나야 모르지. 어쨌든 오늘 너 탄다는 소식 듣고 나니까 이차영 도와주라고 신이 옆구리 찌르나 보다 싶더라. 그런데 진짜 괜찮겠어? 아까 한 캡 말 들어 보니까 완전한 네 결정은 아닌 것 같던데.”
“잘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탔어? 내가 아는 이차영이 할 소린 아니라서 묻는 거야.”
“그러게 나도 왜 내가 이 말을 순순히 들어주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퍽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이 그를 향했다.
“걱정이네. 지금은, 괜찮아?”
“아직까지는.”
“이륙하면 지상이랑 기압 차가 있거든. 산소량 부족할 수 있어. 놀라지 말고. 뭐…… 나보다 이런 이론들은 네가 훨씬 더 잘 알 것 같긴 하다만.”
그녀의 익숙한 음성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뒤이어 탑승하는 퍼스트 승객들을 두루 살폈다. 다들 여행하는 즐거움으로 충만해 보였다. 자신만 우거지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도윤아, 나 지금 표정 어때?”
“평소랑 똑같아. 그래서 더 걱정돼.”
“…….”
“제주도는 금방 도착해. 한 캡이 워낙 능숙하게 잘하니까 눈 깜빡하면 도착해 있을 거야. 꼭 내가 아니더라도 승무원들 왔다 갔다 하니까 불편하면 바로 이야기하고. 아까 한 캡이 너 신경 써 달라고 당부해서 아마 다들 눈여겨보고 챙겨 주긴 하겠지만.”
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던 차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한태주 진짜 유난이다. 이게 병 주고 약 주는 거지 뭐야.”
“네 일인데 네가 그러면 어떡해? 내가 다 고맙더라.”
“도윤 씨! 승객분들 안내해 드려야지.”
두 사람이 살갑게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뒤쪽에서 도윤을 소환했다.
“네, 지금 갑니다!”
차영의 긴장한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린 도윤은 객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차영은 조그마한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정비사들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들과 토잉카들이 돌아다니는 모습들은 흔히 봐 왔던 풍경인데도 이질적이었다. 장소가 달라져서인 것 같았다.
하나둘씩 좌석이 차기 시작하니 불안이 극대화됐다. 정말 별생각 없이 반쯤은 떠밀려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뒤늦게 공포심이 몰아쳐 왔다.
미치겠네.
낮과 밤을 막론하고 하늘은 차영에게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바다 한복판과 비슷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인지도 흐리고, 또 언제 조금 삐끗했다가 아득한 해수면 아래로 삽시간에 빨려 들어갈지 모르는 그런 두려운 대상과 같았다.
무섭다는 생각이 반복되자 차츰 숨을 쉴 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주변 공기가 습하게 느껴졌다. 꼭 이곳이 물속인 것처럼 물살을 갈라야 할 것만 같았는데, 제 몸인데도 정복이나 통제가 전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움찔거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손이 병자처럼 후들거렸다. 온몸이 바스라질 듯 떨려 오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듯했다.
괴로운 숨을 삼키던 차영이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그러고는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바로 그때였다.
“어디 가십니까, 손님?”
제게 안정을 주는 익숙한 음성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주는 손길도 자신이 잘 아는 것이었다. 제 앞을 막아선 커다란 인영에게 시선을 던지자, 아니나 다를까. 태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