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육중한 비행기들이 활주로에 부드럽게 진입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그럴싸했다.
멀리서 볼 땐 손가락보다도 작은 아담한 크기로 보이지만 저 기체 아래에 제대로 서게 된다면 수십, 수백 명의 사람 모두에게 완전하게 그늘이 되어 줄 만큼 크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으나 그 고철의 무게를 견디듯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착지하고 있을 터였다.
관제탑 안에 있던 차영은 아까부터 모니터와 유리창 너머의 활주로를 번갈아 보면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관제사가 멀티플레이어의 역할을 해야 한다지만 그 해당 역할 중에 ‘잡생각’ 같은 것은 없을 터다. 그런데 차영은 한 개의 몸으로 그것까지 감당해 내느라 무척 바빠 보였다.
항공기들이 접근하는 항로들을 보면서 각 항공기의 조종사들과 교신을 하던 차영은,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한국 항공의 기체 위치를 제 눈에 꽉 차게 담았다.
저 안에 태주가 탑승해 있었다.
- 「여기는 한국 항공 632. 타워 응답 바랍니다.」
역시나, 태주가 직접 관제 요청을 해 왔다. 언제 들어도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나지막한 음성이 차영의 귀에 달콤하게 감겼다. 장비를 손에 꽉 쥔 차영이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응대했다.
「타워입니다. 한국 항공 632. 34번 좌측 활주로에 착륙 허가합니다. 바람은 310도 방향에서 9노트로 불고 있습니다.」
- 「34번 좌측 활주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곧 착륙하겠습니다.」
「오늘도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한태주 본인의 안전을 잘 사수해 주어 돌아와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생명에 경중 같은 건 없지만 심정적으로 더 귀한 목숨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푸른 하늘을 보다가 한국 항공의 거대한 비행기가 서서히 하강하는 모습까지 눈에 담은 차영은 다음 순서의 비행기들을 착륙시키기 위해 다시금 관제를 시작했다. 책상 위를 눈으로 더듬어 다음 운행표들을 연달아 살피는데 무음으로 돌려 둔 휴대폰이 반짝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하니 태주였다.
그는 사무실 뒤편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 따위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동료들을 힐끗 살폈다. 곧 있을 점심시간은 한 시간가량으로 시간대를 잘만 맞추면 태주의 얼굴을 잠깐 볼 수도 있을 듯했다.
* * *
공항 청사 내에 조성된 직원용 도서관은 바깥의 혼잡한 터미널과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그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제복 차림의 태주는 그 고요한 책장 복도 사이를 소리 죽여 걸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건 태초에 불가능했던 모양인지 그의 눈에 항공기나 조종사 업무에 관한 서적들이 모여 있는 칸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마치 미지의 세계인 하늘을 갈망하듯 위로, 더 위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들어 올리니 관제 업무에 관한 전문 서적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차영의 집에서도 본 적 있던 책 제목들 같아서, 가장 두꺼운 것으로 한 권 꺼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뒤에 불쑥 나타나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삐걱거리면서 철제문이 열리는 소리와 이쪽저쪽을 돌아보며 까치발을 들고 걷는 듯한 인기척은 조금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태주가 기다렸다는 양 팔을 뒤쪽으로 확 꺾었다. 동시에 제 뒤에 선 상대의 손목을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다시 위치를 반대편으로 돌려서 어깨를 단단히 쥔 뒤, 책장에 밀어붙였다.
놀란 차영이 입을 살짝 벌렸다. 태주는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양 천연덕스럽게 차영의 입술 위를 제 손바닥으로 막았다. 혹시나 내뱉을지 모르는 비명을 차단한 것이었다. 덕분에 차영의 따뜻하고 다정한 눈매가 더 잘 부각돼 보였다.
가볍게 한쪽 다리를 움직인 태주가 차영의 허벅지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워 넣었다. 그렇게 섣불리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위치를 고정했다. 여전히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태주를 보고 있던 차영이 자신의 입을 가로막은 그의 손을 붙들어 내리자, 처음부터 목적은 이것뿐이었다는 듯이 태주가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읍…….”
처음 입술이 닿았을 땐 차영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빠른 시간 내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차영이 눈을 가볍게 감는 순간, 그는 태주가 제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뻗어 책을 한 권 밀어 넣는 기척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는 뒤늦게 상황 파악을 끝내고 태주를 밀어냈다. 당황한 나머지 넓은 어깨를 마구 내려쳤다. 그 와중에도 소리가 멀리 새어 나갈까 거칠게 때리지도 못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누구 오면 어쩌려고.”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한껏 작아지고, 낮아졌다. 차영이 속삭이듯 탓하니 태주가 일부러 더 보란 듯이 발갛게 물든 입술에 쪼는 것처럼 입 맞췄다.
물론 도서관에 들어오자마자 태주를 찾느라 여기저기 둘러본 덕에 이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곳은 넓은 의미에서 엄연한 자신들의 직장이고, 또 불특정 다수가 언제든지 오갈 수 있는 공공장소이도 했다. 태주는 조심스러운 차영과 정반대로 지나치게 과감하고 겁이 없었다.
“그만해, 진짜로.”
다시 그의 스킨십이 농밀해지려고 해서, 차영이 혼신의 힘을 다해 밀어냈다. 태주는 오른편으로 고개를 살짝 빼서 주변을 살펴보더니 차영의 뺨을 정성껏 붙잡고 입술을 머금듯이 삼켰다. 졌다는 양 한숨을 가볍게 내쉰 차영의 눈이 자연스럽게 감겼다가 떠졌다.
“내가 봤을 때 한 기장은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 공항 직원들 점심시간이야. 그 사람들 밥 먹지 여기 안 와.”
“그래도 그렇지. 여기까지만 해.”
“더 하면?”
“더 하면 우리 첫 싸움을 여기서 하게 될 거야.”
“너 어떻게 화내는지 궁금해. 눈 막 빨갛게 충혈되고 그래? 진짜 섹시하겠다.”
“아, 그걸 보고 싶으시다 이거지? 보여 줘?”
차영은 정말 화를 낼 준비가 돼 있었다. 이 상황에 진심으로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그렇게 강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능글맞고, 뻔뻔한 데다 짓궂기까지 한 태주를 결코 이길 수 없는 탓이 컸다. 태주도 그 마음을 느꼈던 모양인지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그가 책장에 등을 기댄 차영으로부터 작은 보폭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들은 각자 등 뒤에 책장을 두고 마주 봤다.
“한 기장 여기서 혼자 무슨 책 봤어?”
“항공 정비 업무의 이론과 실전.”
“그런 책도 있어?”
“글쎄. 그럴싸하지 않아? 이론서들 제목 다 그렇잖아.”
“그래서 정비사들의 고충에 대해서는 좀 깨우쳤어? 예전에 정비 팀장님 쥐 잡듯이 잡은 것도 반성 좀 하고?”
“무슨 소리야. 반성은 잘못한 사람들 몫이지. 대신 그때 이후로 정비 팀에서 올리는 시말서 눈에 띄게 줄었잖아. 그리고 조종사가 훨씬 더 고충 많아.”
“다들 어렵고 힘들어.”
“내 일이 제일 어렵고 힘들어.”
너무 그다운 대답이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한결같았다. 짐작건대 어떤 난관이 닥쳐와도 그와 함께 있다면 큰 장애 없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태주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차영은 빤히 그를 쳐다봤다. 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여태까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태주를 직시하고 있으면 알 것 같기도 했다. 부디 그도 그렇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 번만 더 하면 안 돼?”
“자꾸 왜 그래.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여기 밖이야.”
“알아. 그러니까 한 번만. 짧게 끝낼게. 진짜 약속.”
“하…….”
차영은 흘겨보면서도 선뜻 안 된다고 거절하지 않았다. 그게 긍정적인 뉘앙스라고 느껴졌던 모양이다. 태주가 다시금 한 걸음 다가와서 차영의 턱을 붙잡고 보드라운 입술에 제 살결을 부딪쳤다.
자연스럽게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핥고,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과감히 갈랐다. 통로의 주인은 머뭇거리면서 출입문을 열어 주어도 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가 항복을 선언하고 부드럽게 제 입술 사이를 벌렸다.
“읏…….”
암묵적 허락과 동시에 혀를 매끄럽게 밀어 넣은 태주가 차영의 입 속을 휘젓듯이 탐색했다. 좁고 뜨거운 공간에서 마주치게 된 두 개의 혀끼리 가볍게 얽혔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치아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 살덩이가 입에서 빠져나갔다.
하아. 숨을 고르면서 차영이 제 몸을 제대로 지탱해 서기 위해 뒤편의 책장을 손으로 짚는데, 태주가 한쪽 손을 끌어다가 무언가 작은 물체를 쥐여 주었다. 홍콩의 야경을 형상화한 마그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