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한태주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일단 좀 꼬였다는 거 하나는 알겠어. 에둘러 말한다는 건 상대와의 관계를 간단히 허물어뜨리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해. 누구나 다 그쪽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진 않아. 그래도 한 기장은 속병은 없겠다.”
“없을까?”
“있어 보여.”
“…….”
“예민하고, 외롭고, 슬퍼 보여. 그게 너무 신경 쓰이는데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
그래서 자신이 아는 다정함의 세계를 돌려주고 싶었다.
섣불리 판단하기 이를지도 모르나, 차영의 생각에 태주는 슬픔이 많은 사람 같았다. 그는 능숙하게 감추고 있었지만 차영만큼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곪은 상처의 크기도, 그 때문에 파인 깊이도 다를 테지만 근본적으로는 제 내면이 그의 것과 얼추 비슷하기 때문이다.
“건방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서 한 기장을 더 알고 싶다고 했잖아.”
“알면 다칠 텐데.”
어쩌면 태주가 자꾸만 저렇게 방어벽을 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같은 이유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진짜 모습들에 차영이 실망할까 봐 겁이 나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또 그런다. 겁주지 마. 절대 나 다치게도 하지 마. 진짜 용서 안 해. 남자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다고 했던 말 기억하지. 나 정말 어렵게 결정했어. 그러니까 너 나 울리면 죽어.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노력할게. 정말로. 최선을 다할게.”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쓸어 넘겨 주면서, 그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내뱉은 울리지 말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상하게 표정이 초조해 보였는데 찰나간에 스쳤던 것이라 착각인가 싶었다.
뒤이어 뺨에 입을 맞추기에 차영은 그의 촉감이 제 살 위에 닿는 동안 눈을 가볍게 감았다. 체온이 떨어져 나간 뒤에야 눈을 떴다.
“벌써 10분 다 지났겠다. 들어가자.”
“진짜로 이렇게 그냥 헤어지자고? 차라도 한잔 줘.”
“이 시간에 나랑 차 마시면서 뭐 하게?”
“머릿속의 관능적인 상상력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거지.”
“결국 야한 짓 하겠다는 거잖아.”
“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
차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이렇게 질척거려? 안 돼.”
“너무 거절이 빠른 거 아니야? 사람이 이렇게 차갑고 매정할 수 있어?”
“놀고 있다. 한 기장은 당분간 우리 집 출입 금지야.”
“어째서?”
태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접근 금지 명령에 발끈했다.
“한태주 씨 손이 내가 준비하는 속도보다 빠를 것 같아서. 게다가 우리 암묵적으로 이미 뭔가…… 내가 좀 더 손해 보는 포지션이지? 나 이런 거 처음이라. 창피해 죽겠는데 도저히 안 짚고 넘어갈 수가 없네.”
그가 픽 웃었다. 하지만 끝내 아니라고는 안 한다. 밉게 흘겨보던 차영이 그의 등을 밀자, 하는 수 없다는 기색으로 잠자코 따라 주었다. 열심히 도로 한가운데에서 퍼진 차를 떠밀듯 그를 직진하게 만들고 있는데 앞서가던 태주가 문득 생각났다는 양 말했다.
“아, 나 내일 신체검사 있어.”
항공사에 결과를 제출하기 위해 행하는 건강 검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차영도 태주처럼 몇 달에 한 번 꼴로 할 만큼 잦은 횟수는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비행하고 바로? 그런데 이러고 있다는 거야? 아, 이번엔 운항한 게 아니지.”
“너 퇴근하고 볼까? 저녁 먹자.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갈게.”
곰곰이 내일 일정을 생각하던 차영은 미세하게 한풀 꺾여 아쉬워하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 내일 야근하는데.”
“또?”
“내일은 터미널 관제 쪽이랑 왔다 갔다 할 것 같아. 설 앞뒀는데 빠지는 인력만 있고 사람이 부족해.”
“탑장 직무 유기 아냐? 언제 돌아오는데? 돈 많이 줄게 나오라고 해.”
농담으로 흘려듣기엔 너무나도 진지한 음성이었다. 차영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가끔 상상 초월 또라이 같…….”
“뭐, 나 너랑 데이트해야 되는데. 바쁘니까 열받잖아.”
뻔뻔하게 대꾸하는 표정에는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부친상 당한 분 급하다고 소환하리? 게다가 뭐 돈? 뭐 얼마나 부자길래?”
“되게 많이. 그리고 공항은 1년 중 명절이 제일 바빠. 이때 계속 쉬는 게 말이 돼? 본인 개인사는 개인사고, 일은 일이지.”
“한 기장은 공감 능력 같은 것도 없어?”
“네가 있으니까 됐어. 네가 이렇게 지적하잖아. 앞으로도 계속 혼내 주면 되겠네.”
차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꼬집자 그가 윽,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가르쳐야 하는 것일지, 알려 준다고 태주가 따라 주긴 할지 모르겠다.
“앓느니 죽지. 한 기장 비행은?”
“하……. 이차영 손아귀 힘이. 생각보다…….”
“생각보다 뭐. 혼내라며. 많이 봐준 건 줄도 모르고. 모자라면 더 꼬집어 줘?”
때리는 것보다 꼬집는 쪽이 훨씬 타격이 컸는지 흠씬 맞을 때도 얌전하던 태주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냐, 항복. 나 비행 모레 있어. 홍콩에서 1박 하고 올 거야.”
“그럼 저녁은 그다음 날 먹자.”
“음, 별수 없지.”
아마 앞으로도 이럴 게 뻔했다. 태주의 일정은 딱 규격에 맞게 정해져 있지 않고, 자신은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종종 생겼다. 그나마 근무 시간이 정해진 차영이 들쑥날쑥한 태주에게 맞추는 편이 나을 테지만, 사실 다른 관제사들에 비해 차영의 업무량은 꽤 과중한 편이어서 쉽지만은 않을 터다.
느릿하게 공동 현관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약속한 것도 아닌데 승강기 대신 계단으로 올랐다. 차영의 집 앞에 마주 선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마주 봤다. 태주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역력한 낯이어서, 차영이 졌다는 듯이 턱을 조심스레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먼저 들어갈게.”
“잘 자, 이차영.”
“한 기장도.”
“진짜 나 들어가면 안 돼? 그렇게 많이는 안 더듬을게.”
“안 믿어. 잘 가.”
그를 뒤로하고 겨우 문을 닫고 들어오자,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현관문에 기댄 채로 잠시간 서 있던 차영은 거실로 황급히 발꿈치를 들고 뛰었다. 벽면에 나열되어 있던 마그넷들 뒤에 오늘 태주가 건네준 것을 하나 덧붙였다. 이제 개수를 세는 게 의미가 없어졌지만 오늘까지는 세어 볼까 싶었다. 총 네 개였다.
물끄러미 그 위를 쳐다보고 있던 차영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부드럽게 걸렸다.
* * *
시기능 검사를 모두 마친 태주가 간호사로부터 겉옷을 받아 들고 있는데, 진찰실의 문이 노크와 함께 활짝 열렸다. 의사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희미한 약품 냄새가 풍겼다. 방문자 집단은 이 공항 인근 종합 병원의 원장을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의들이었다. 그들의 마중은 VVIP인 태주가 이곳에서 검진을 받을 때마다 반복되어 온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가려는 태주를 향해 묵례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원장마저 깡그리 무시하고 밖으로 나섰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다는 양 의료진들에게 손을 내저어 보인 원장이 홀로 그의 뒤를 쫓으며 말을 붙였다.
“요새도 단백질 잘 안 챙겨 드십니까?”
“저 안 먹습니다, 그런 거.”
“다른 조종사분들은 다들 잘 챙겨 드시는데 한 기장님만 소홀하신 거 알고 계시지요? 워낙 안구 건강이 타고나신 건 알지만 지금부터 관리해야 오래오래 조종간 잡을 수 있습니다.”
윤 원장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태주와는 아주 어릴 때 몇 번 마주쳤다가,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간헐적으로 소식만 전해 들었다.
그때만 해도 풋내기 의사였는데, 어엿한 조종사가 되어 한국으로 귀환한 태주가 다시 그를 보게 되었을 땐 한국 항공의 협력 병원 원장 직함을 달고 있었다. 태주는 친구의 아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며 그들 사이의 위계 서열을 인지시켜 주는 그가 꺼림칙했다. 겉으로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길 없는 이 남자가 소름 끼쳤다.
“얼마 전에 안 실장님 다녀가셨습니다. 특별히 신경 좀 써 달라고 하시더군요.”
“윤 원장 다른 기장들 왔을 때도 이러십니까?”
그는 태주의 간접적인 힐난에 그저 사람 좋은 웃음만 내보였다. 아니라는 응답이기도 했다.
“안 실장이 여기까지 왜 왔을까요. 윤 원장은 그 이야기를 저한테 왜 하시는 거고요.”
“한 기장님.”
“제 건강 검진 결과는 한국 항공에 제출하는 용도지 오너 일가의 호기심을 위해 사용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가족은 한 기장님의 건강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알 권리가 있지요.”
“그거 법에 안 걸립니까?”
“사주가 사원의 건강 문제를 알고자 하는 게 뭐가 문제가 됩니까.”
“방금 전엔 가족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사주도 되고 가족도 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빌어먹을, 병원을 옮기든지 해야지.”
현재 거주지와도 가까운 덕에 접근성이 좋았고, 또 공항 공사와 한국 항공 두 군데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대형 병원이라 매번 이쪽으로 방문해 오던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다음번엔 좀 이동이 불편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 마음이 편할 듯했다.
물론 그쪽으로 가도 제 건강을 기록한 차트가 외할아버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테지만 최소한 이 남자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되리라.
“나오지 마세요. 조폭도 아니고 왜 번번이 졸졸 쫓아다닙니까. 형님이라고 부르시든지.”
“드라마를 너무 보셨네요.”
“그런 거 볼 시간에 잡니다.”
“잠은 잘 주무십니까? 얼굴에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걱정 같은 거 없어요. 쓸데없는 관심 사절할게요.”
“식사는 제때 챙겨 드시는 건지요. 차트 확인해 보니까 영양 상태는 나쁘지 않았지만…….”
어느 틈에 주차장까지 쫓아 나온 윤 원장을, 태주가 차갑게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친구를 보는 눈빛이라고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만으로도 윤 원장을 완전히 힐난하고 있었다.
“제발 저한테 신경 끄세요. 그럴 시간 있으면 병원 관리나 똑바로 하시든지요. 정치질보단 체질에 맞으실 거 아닙니까. 어차피 제 뒤에 줄 서셔도 전 외할아버지와 달리 콩고물 같은 거 못 흘려 드립니다.”
오만한 태도로 꺼지라는 듯이 손을 까딱, 한 태주는 그대로 차량에 탑승했다. 그러고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퉁이를 돌면서 룸미러로 힐끗 보니 윤 원장은 가는 태주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들뻘인 자신에게 그런 비아냥거림을 듣고도 자존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도대체 그가 구체적으로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늘 찝찝했다.
생각이 많은 태주가 입술을 짓이기고 있는데 때마침 휴대폰에 알람이 울렸다. 내일 운항 일정을 다시 한번 고지해 주는 통상적인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