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34화 (34/144)

34화

새벽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리는 마치 미장센이 훌륭한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군데군데 가로등이 희미한 불빛을 내뿜으며 켜져 있었고, 인적은 드물어서 고요했다.

한동안 눈이 쌓여 있던 도로를 깨끗하게 치워 내서인지 계절감이 그다지 없었다. 입술 사이를 벌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뿌옇게 서리는 김이 아니었다면 외국의 선선한 밤거리처럼 보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건물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두 사람은 일부러 이 근방을 함께 걸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거리를 산책하던 그들은 기다란 골목을 총 세 번 왕복한 한 뒤라야 겨우 자신들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먼저 작별을 고한 건 차영이었다.

“이제 들어가자.”

“벌써?”

“벌써 아니야. 우리 한참 걸었어. 나 추워.”

헤어짐이 아쉬운 태주가 싫다는 대답 대신 차영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으려던 차영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그런데 나 왜 세입자야? 아까 한 기장 휴대폰 보니까 나 세입자라고 뜨더라.”

그는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건물을 힐끗 올려다봤다.

“이 건물이 내 거야.”

응당 차영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내가 계약서 쓸 때 건물주 이름은 한태주가 아니었는데?”

“이런 거 담당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 내가 한 층 전체를 다 연결해서 쓰겠다니까 건물주가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걸 트냐고 하길래 그냥 시가대로 매매했거든. 얼마 안 됐어.”

“아, 그래서 입주자 명단에 이름이…….”

“아마 없었을 거야. 서류상 7층은 아직 빈집으로 되어 있을 거라서.”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으나 듣는 차영은 충분히 놀랐다. 어떤 사람의 생활 수준을 나타내 주는 지표는 단순히 동산이나 부동산 따위가 아니다. 그 돈을 대하는 태도다. 막연히 있는 집 자식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짐작했던 규모를 가뿐하게 웃돌고 있는 듯했다.

차영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가 문득 제집의 카드 키로 보이는 물건을 내밀었다. 덕분에 차영도 이게 얼마나 의미심장한 물건인지 오래 생각할 타이밍을 놓치고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이거 날 왜 줘?”

“내키면 놀러 와. 7층. 연결돼 있으니까 내려서 아무 출입문으로나 들어오면 돼.”

“한 기장 진짜 너무 급해. 난 아직 우리 집 카드 키 주기 싫어. 감추고 싶은 것도 많고.”

“넌 천천히 해도 돼. 부담 갖지 마.”

“하지만 부담이 가.”

“그래서 앞에 전제 달았잖아. 내키면 놀러 오라고. 나 더 알고 싶다며. 봐야 알지.”

주니까 일단 받긴 했는데, 막상 그걸 손에 쥐고 있는 차영의 기분은 아주 오묘했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부담이 되는 한편 커다란 설렘도 있었다. 본인의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차영에게 아무런 조건도, 경계도 없이 공개하겠다는 의미였으니까. 차영에겐 아직 준비 기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제 쪽에서 먼저 태주를 집으로 초대한 바가 있긴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사건이었고 또 자신의 통제하에 발생한 상황이기도 했다. 완전히 권한을 넘기는 것과는 목적부터 달랐다.

“이차영, 우리 진짜 그만 들어가? 나 너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솔직히 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은 그와 같았던 터다. 답변을 망설이는 차영을 눈치챈 듯 태주가 쐐기를 박으려 연이어 물었다.

“걷기는 많이 걸었고 괜찮으면 차로 한 바퀴 돌까? 내일 일찍 나가 봐야 돼?”

“실은 아직 탑장님 자리가 공석이어서 업무 분담해야 돼. 아, 부친상 당하셨거든.”

“그러면 딱 10분만.”

웃음을 터트린 차영은 제 주머니에 카드 키를 고이 넣어 두고 태주를 따라 걸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올 땐 차영의 차를 타고 왔다. 그래서 주차장 태주의 자리는 여전히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차영이 자신의 차 키를 꺼내 들려는 찰나, 태주가 주차장 출입구 근처에 있는 차량 한 대에 시동을 거는 것이었다.

항상 주차장 제일 끝줄에 세워져 있던 세단이었다. 왜 이런 고급 차량을 이렇게 오래 방치해 두는지 모르겠다고 스치듯이 생각했던 적이 있어서 기억했다.

“설마 이것도 한 기장 차야?”

“갖고 싶어? 줄게. 이게 키야.”

“아니, 잠깐만. 난 그런 말이 아니라…… 잠깐, 잠깐.”

그가 차 키를 내밀며 동시에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 주어서, 차영은 일단 손으로 행로를 가로막았다. 이건 단지 느낌이긴 하나 태주가 소유하고 있는 차량은 이게 다가 아닐 것 같았다. 의아한 듯한 태주의 시선이 차영의 굳게 다물린 입술 위로 향했다.

“왜 그래?”

“이걸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이야기하는데. 우리 집은 되게 평범해. 어머닌 선생님이셨는데 퇴직하시고 지금 지방에 있는 요양 병원에서 봉사하는 겸…… 박봉에 소일하고 지내셔. 아마 계속 같이 지내다 보면 내 배경이 한 기장 눈높이에 안 맞을 수도 있어.”

“지금 개인 정보 공개 시간인가? 너랑 나 중에 누가 더 급한데?”

“그런…… 한 기장한테 우리 엄마 보여 주겠다, 이런 의미로 한 말 아니니까 앞서 나가지 마. 어차피 엄만 나보다 훨씬 더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 1년에 많아야 서너 번. 휴일도 없이 일하시니까.”

그녀가 일부러 휴가를 내는 건 1년 중 단 하루였다. 아버지의 기일. 바로 며칠 전이다. 아마 그걸 시발점으로 그녀는 또 올 한 해를 숨 가쁘게 달릴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인 차영을 때로 그리워하면서, 그러나 정작 만나러 올 엄두는 내지 못하면서, 그렇게 말이다.

“왜 그 연세에 휴일도 없이 일하시지?”

“혼자 있으면 잡생각이 많아지니까 그게 싫으신 것 같아.”

“네가 같이 있어 드리면 되잖아.”

“우린 서로 아주 사랑하는데, 또 보면 고통스러워. 엄만 날 보면 죽은 아빠 생각이 많이 나나 봐. 아마 그래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걸 거야. 한가하면 여가 시간에 날 보러 와야 되는데 바쁘면 그 핑계로 안 그래도 되잖아.”

자신의 취직이 결정되자마자 그녀가 한 건 이곳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 지역에서 가장 먼 데로 내려가는 일이었다. 섭섭했지만 차영은 그 누구보다도 그녀의 그런 선택을 이해했다.

“보고 싶지 않아?”

“당연히 보고 싶지. 종종 보고 싶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엄마가 그래 줘서 편해. 막상 날 보면 엄마가 아파해서 내 마음도 편하질 않더라.”

안 지 10년이 넘은 도윤에게조차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 없던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태주의 앞에 털어놓으면서, 차영은 왠지 가슴 한편이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 이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제 은밀한 속마음을 고백할 곳을 찾아 유랑하는 모양이다.

“난 이해가 잘 안 되네.”

“뭐, 아마 한 기장은 아마 사람들 사이의 이런 섬세한 배려들에 대해서 이해 못 할 거야.”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괜찮은 집 자식이라는 거지? 아버지는 파일럿에 어머니는 선생님이셨고 본인은 공항 철 밥통이고.”

“그렇게 들렸다면 한태주 씨는 머저리고. 딱 봐도 내가 너무 기우니까 하는 소리야.”

“너 생각보다 속물이다. 돈 이야기 바로 하는 걸 보면.”

그가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가볍게 반응하고 있다는 걸 안다.

“소비 습관에 대해서 말하겠다는 거야. 생활 방식이 다르다면 서로 맞춰야 하는 거잖아.”

“필요한 건 내가 다 할 건데 네가 왜 그런 걸 걱정해.”

“이래서야. 한 기장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걸 혼자 다 할 의무는 없어.”

“혹시 이차영 관제사 눈에 나 좀 엉덩이 가볍고 변덕 심해 보이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긴 해.”

“걱정하지 마. 넌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난 네가 누군지, 매일 뭘 하는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고 선택한 거니까.”

그의 이 말은, 차영의 귀에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꼭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끈질기게 지켜봐 왔고, 그래서 이차영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확정적이고, 단정적인 말투였다.

“한 기장이 날 골랐어?”

“먼저 반한 건 나였지만 결국엔 너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지.”

“하여튼 잘 빠져나가. 앞으로 두고 보겠어.”

“너 방금 분명히 ‘앞으로’라고 말했다. 오늘부터 우린 사귀는 거고.”

“계속 유치하게 그런 거 따지고 있어. 애야?”

“왜 따지면 안 되는데. 네 말대로 우린 남자끼린데 진도를 나가려면 남녀 사이보다 훨씬 더 관계를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는 거잖아. 아니면 설마 너 나 갖고 노는 거야? 노선 확실히 해.”

“그런 게 아니라……. 알겠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몹시 진지한 얼굴로 태주가 끄덕였다. 그를 흘겨보던 차영이 태주의 가슴팍을 손등에 원망을 가득 담아 툭 쳤다. 한 번 더 치려고 하자 그가 차영의 손을 덥석 붙들고 끌어다가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 위에 입을 맞췄다. 당황한 차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의 가장 구석이고, 뒤로 담이 높이 올라 있었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슴을 몰래 쓸어내렸다.

“진짜 겁도 없이…….”

“난 에둘러 말하는 거 싫어. 하고 싶은 말 따로 있는데 빙빙 돌리는 거. 본인 좋은 사람 되자는 연막작전에 속는 기분이야. 너 왜 내가 너한테 실망할까 봐 계속 지레 걱정해? 네가 여기서 구걸하고 있어도 난 너 좋아해. 돈 보고 좋아할 거면 내 결정은 네가 아니었겠지. 그런데 난 너한테 사귀자고 말했잖아.”

물론 감동적이고 고마운 말이지만, 태주는 결국 애써 덮고 넘어갈 뿐 끝내 제대로 납득하지는 못할 영역이리라. 자신은 그와 입장이 동등해지고 싶었다. 일방적으로 챙김받고, 배려받기보단 그에게도 좋은 것들을 많이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가시적으로 보이는 차이들이 생겼다면, 뭘 해 줘도 그의 기준치에 미달될까 지레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