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왜 이렇게 순순해. 뺨을 한 대 쳐야지.”
“너한텐 매도 아까워.”
“조금 전에 나 꽤 얻어터진 것 같은데, 잊은 건 아니지?”
“말장난을 시도할수록 점수가 실시간으로 깎일 거라는 말을 꼭 전해 주고 싶다.”
“팁은 그게 다야? 반대로 어떻게 해야 점수를 쌓을 수도 있는지도 알려 줘야지.”
“그럼 입을 닥쳐. 나 지금 생각 중이야. 조금 전 한 기장이 한 키스를 어떻게 돌려줄지.”
대답과 동시에 차영의 눈가에 뭔가 결심한 듯한 기색이 스쳤다.
이윽고 태주에게 안겨 있던 제 상체를 뒤로 조금 뺀 차영이 그의 멱살을 쥐듯 셔츠 깃을 끌어당겼다. 태주가 어설프게 상체를 숙이자 눈높이의 균형이 적당하게 맞춰졌다. 바로 정면에서 시선을 교환하고 있던 그들은 별말이 없었다.
“차영아, 나 기대해도 돼?”
태주가 불쑥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은근하게 물었다.
“입 닥치라니까.”
분명한 말투로 쏘아붙인 차영은 제 아랫입술을 살짝 감쳐물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용기를 내 태주의 입술 위에 제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맞물렸다.
그들은 에워싼 공기는 차가웠고, 이곳에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을 태주의 살결 위도 얼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닿은 자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서서히 입술을 떼어 낸 차영이 떨리는 눈동자로 태주를 보고 있다가, 이번엔 아예 눈을 감았다. 그는 고개를 다시 기울여 태주의 것을 제 입 안에 머금었다. 보드라운 입술을 정성껏 빨았다. 그런 뒤 제 축축한 혀끝을 태주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매끄럽게 밀어 넣어 은밀한 틈새를 침범했다.
서로의 혀가 닿는 순간, 그 야릇한 촉감에 당황한 차영이 태주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아…….”
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눈을 뜨니 태주가 들끓는 눈동자로 차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영은 그 눈길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만 절박하게 붙들고 있었다.
“이게 네 대답이야?”
“응, 이게 내…… 읏!”
차영이 내뱉은 나지막한 음성이 공기 중에 채 흩어지기도 전이었다. 그는 차영의 등을 안정적인 자세로 감싸고, 한 손으로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동그란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차츰 두 개의 입술이 질척하게 맞물렸다. 냉랭한 공기가 깊게 연결된 두 사람을 어루만지듯 에워쌌으나 살결이 맞닿은 자리만큼은 열기로 달아올랐다.
“차영아, 입 열어 줘. 안에 넣고 싶어.”
“으응, 읏…….”
두 개의 육감적인 혀가 상대의 입 안을 넘나들었다. 축축한 혀가 서로에게 겹쳐지면서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울려 퍼졌다. 창피해진 차영의 손이 갈 곳을 잃고 잠시 헤매다가 결국 차가워진 태주의 뺨을 감쌌다. 그의 볼과 귓가를 어루만지듯이 쓸자 태주가 고개의 각도를 더 기울여 깊이 차영의 입 속으로 침투했다.
이 체온의 마주침 때문인지, 아니면 꽤 오래 참아 왔기 때문인지 태주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심스러웠던 그의 행동이 조금씩 강도를 더해 갔다. 뜨거운 입 속의 살덩이가 난폭하게 겹쳐졌다. 끊임없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외설적이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마른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태주는 차영의 호흡이 버거워지기 시작할 때쯤 천천히 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차영은 참아 왔던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 짧은 틈을 못 참고 다시 태주가 입술을 부딪치려 고개를 기울였다. 차영은 일단 그를 받아 주었다. 그러다 자꾸 혀뿌리까지 얽어 버릴 기세로 집요하게 입 속을 헤집어 놓자 도저히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워져 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며 밀어냈다.
“한태주, 하, 한태주, 그만.”
“싫어. 그만하라고 하지 마.”
“숨 막혀.”
숨이 달린다는데 계속 붙들고 있을 순 없었던지, 태주가 아쉬움 가득한 눈길을 보내며 자세를 고쳤다. 그러나 그는 입술만 자유롭게 놓아줬다 뿐이지 차영의 인체 이곳저곳을 괴롭히는 일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 뺨을 감싸고 있던 손바닥에 입을 맞추더니, 붉은색으로 살짝 달아올라 있는 양 뺨과 눈두덩 위에도 꼼꼼하게 키스했다. 차영은 싫지 않은 마음에 고스란히 그의 초조함에서 발로한 행위들을 받아 주고 있다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한태주 진정해. 누가 보면 나 도망가는 줄 알겠어.”
“…….”
“나 한 기장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가까스로 차영이 내뱉은 말은 태주에게 꽤 의외로웠던 모양이었다. 그가 투명한 눈동자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마치 생각을 읽어 내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무슨 의도였는지 다시금 가볍게 차영의 촉촉해진 입술 위에 새가 부리로 먹이를 쪼아 먹듯 쪽쪽 입을 맞췄다.
그가 이 간지러운 행위를 멈출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고 있던 차영이 하는 수 없이 이어 물었다.
“대답 안 해?”
“많이 실망할지도 모르는데.”
태주의 음성이 그답지 않게 조금 조심스럽다고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그건…….”
“네가 결정한다고?”
“응, 그러니까 다 알려 줘. 감추고 싶은 단점들까지 다.”
“사귀어 주면.”
“방금 전 내 대답 뭘로 들었어?”
“좀 더 직관적이고 분명하게 말해 줘.”
“앞으로 한 기장 하는 거 봐서. 오늘은 아니야.”
“와, 이차영 관제사 순진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계산적이네.”
차영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스무 살 넘어서까지 순진하면 이 각박한 세상 어떻게 살아.”
그러다가 불쑥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스튜어드들 중에서 게이가 많다던데. 기장들도 그런가?”
“누가 그래?”
“그냥 친구가. 걔 말로 외항사 다니는 승무원 중에 게이 많다고 그랬던 게 생각나서.”
“몰라, 관심 없어. 그런 거 왜 묻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태주도 차영처럼 픽 웃었다.
“너랑 자고 싶다고 했던 것 때문에 그래? 농담도 못 하냐?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 게이 아냐. 그냥 네가 좋은 거야.”
“그 말 농담이었어?”
“그건 당연히 아니지.”
“뭐 이래? 항상 뭐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더 파고들고, 그를 알고,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두 사람은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태주가 살짝 고개를 틀어 차영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윽고 다시 시선을 내려 차영과 눈길을 부딪친 그가 확신을 주듯 대꾸했다.
“보이는 걸 믿으면 돼. 이차영 네가 믿고 싶은 거. 그게 정답일 거야.”
원하는 대로 춤을 춰 주겠다는 다짐처럼 들린다면 너무 듣기에만 좋은 꽃노래인 걸까.
“이거 혹시 기술 거는 거야?”
“거는 거면? 넘어왔어?”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것 같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제 안에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가뜩이나 녹록지 않아 보이는 데다 남자이기까지 한 거대한 산, 한태주를 좋아하려는데, 자신의 마음속까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건 본인의 등산 피로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아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 초조했던 마음의 근원 말이다.
한태주가 보고 싶었다.
그가 궁금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면서도 특별하게 대해 주지 않고 훌쩍 여행을 떠나 버린 그에게 섭섭했다. 그래서 더 심하고 못되게 화를 내고 싶은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런 원망들이 분말 하나 남기지 않고 죄다 풀리려는 것 같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태주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있던 차영은 눈을 깜빡여 봤다. 차가운 바람 냄새와 그의 시원한 향수 내음이 함께 어우러져 차영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때, 오늘 밤 야경은 마음에 들어?”
태주의 이어지는 질문에, 뒤늦게 차영도 그의 향기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야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오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던 풍경이 다시금 제 안에 들어와 박혔다.
유도로와 활주로 등지의 움직이는 비행기들과, 거대한 터미널 이곳저곳에 들어와 있는 밝은 불들, 또 막차를 놓친 사람들의 모습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였다. 더 멀리 시내의 경치는 더욱 근사했다. 검푸른 하늘, 그 위에 장식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는 별들, 더 멀리 있는 바다와 차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 이 모든 근사한 절경이 차영을 사로잡았다.
밤하늘을 나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마음에 들어.”
“나는?”
“은근슬쩍 물어보지 마. 오늘은 그 대답 못 듣는다니까?”
단호하게 대꾸한 차영이 야경보다 더 흥미로운 태주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역시 계산적이네. 순진하진 않지만.”
태주는 농담 섞인 대답과 함께 차영을 결박하듯 꽉 끌어안았다.
미묘한 슬픔이 그의 눈가를 찰나간 스쳤으나, 차영은 미처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