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분명히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이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이미 버튼을 누른 뒤였다. 별수 없이 차영은 입을 열었다.
“네, 이차영입니다.”
- 이 냉담한 목소리는 뭘까?
“…….”
- 이차영?
“듣고 있으니까 말해.”
- 너 무슨 일…… 아니다. 얼굴 보고 이야기해. 아직 공항이지? 잠깐 보자. 탑승동으로 넘어와서 터미널로 들어오면 공항 직원들 사무실 있어. 거기 비상계단 타고 위층으로 올라오면 옥상 정원.
“한 기장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싫어.”
- 안 오면 후회할걸?
“그건 내가 판단해. 끊어.”
- 차영아, 여기 야경이 예뻐.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래. 여기 서 있으면 밤하늘 나는 기분이 들기도 하거든.
어울리지 않게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듯한 투였다. 그의 육성을 귀로 새기듯이 들으면서, 차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은 밤이었다. 날씨는 추웠고, 하늘은 꽤 청명했지만 새까만 색이었다. 시종일관 쌀쌀맞게 대꾸하던 차영은 제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나 차영은 이번엔 받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터미널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뛰기 시작했다.
“헉, 허억…….”
가쁜 숨을 내쉰 그가 이윽고 옥상으로 통과하는 철제문 앞에 섰다. 전망대를 구경해 본 적은 있지만 이곳은 완전한 통제 구역이라 공항에서 일하면서도 입성한 적이 없었다.
이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몹시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꼭 천국으로 가는 문턱을 밟기 직전인 것처럼 설렜다.
밤하늘을 나는 기분. 매일 조종간을 잡는 한태주가 그렇다고 말했으면 그럴 터다.
관계자 외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영문 표지판을 힐끗 본 차영이 조심스럽게 철제문을 열었다. 여전히 제 손의 휴대폰은 몸체를 덜덜 떨어 대느라 바빴다. 주머니에 도로 넣은 뒤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던 옥상의 땅을 발로 디뎠다. 출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는 걸 알게 된 태주가 밤하늘 아래에서 차영을 돌아보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몰아쉰 차영이 공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상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그와 동시에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넓게 펼쳐진 비행장이 밤의 장막으로 뒤덮여 있는 모습은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임무를 지니고 반짝이는 도심의 불빛이 청사와 활주로는 물론이고 공항 주변 도로에서도 어룽거렸다. 그야말로 조용하지만 내실 있게 화려한 밤의 축제였다.
하늘의 희미한 구름들은 오늘따라 달을 가리지 않고 온전하게 제빛을 발하도록 좋은 자리를 기꺼이 내주었다. 청명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듯, 용감하게 상승하는 비행기들의 모습은 너무 황홀해서 눈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 서늘한 바람이 차영의 얼굴 위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아마 약한 북풍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아득한 머리 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차영은 괜히 발을 굴러 봤다. 딛고 있는 건 땅이지만 태주의 말대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무척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자 뽀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별들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는 하늘길을 나는 태주는 이 모습의 수백, 수천 배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해 왔을 것이다. 차영은 갑자기 숨이 막힐 정도로 그가 부러워졌다.
“전화 다시 걸었는데 왜 안 받아?”
밤하늘이 주는 화려한 광경에 마음이 쏠려 있던 차영은 태주의 음성을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뒤늦게 몇 미터 전방의 그를 주시했다.
그는 공항에서 맞닥뜨렸을 여느 때의 모습과 달리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편안한 평상복에 질이 좋아 보이는 어두운 회색 코트를 걸쳤다. 옷걸이가 좋아서인지 어느 쪽이든 근사해 보였다. 밤하늘을 머리 위로 둔 태주는 아주, 쓸쓸해 보이고 또 가슴이 터질 만큼 자신을 설레게 만들었다. 차영은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응? 왜 안 받느냐니까.”
“왔으면 됐지.”
“이리 와 봐. 안아 보게.”
“꿈 깨.”
그러나 거절의 말과 달리 차영은 천천히 태주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선 채 자신만 이동하고 있어서, 창피한 기분에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은 아직도 차영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인지 제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여전했다. 차영은 태주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 통화를 종료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이 의아했다.
[세입자]
그가 전화를 걸고 있던 건 자신이 맞았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제 주머니 속의 진동도 멎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호칭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차영이 그를 쏘아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태주는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가 차영을 향해 씨익 웃었다.
“왜 웃어? 재수 없어.”
“이차영 오랜만이다.”
“그게 할 말이야?”
“무슨 말을 더 해야 되는데? 나 그런 거 서툰 거 알잖아. 가르쳐 줘.”
“넌 내가 전화를 안 받는데 쫓아 내려오지도 않고 여기서 기다린 거야?”
“아, 올라올 거 같아서. 이차영 관제사가 이런 절경 놓치는 바보로는 안 보이거든.”
차영은 발끈했다.
“그런 말 아니잖아. 한 기장은 왜 그렇게 늘 여유 넘쳐? 나만 초조해하게 만들고.”
“그래 보여? 아닌데. 나 태어나서 이렇게 필사적이었던 적 없었어.”
“거짓말.”
차영은 억울한 마음에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소리가 날 만큼 거세게 쳤다. 태주는 별 저항 없이 맞아 주었다. 그래서 차영도 고삐가 풀렸다. 계속 그를 마구 때리고 있자니 그마저도 전부 받아 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차영의 두 손에 힘이 풀려 간다고 스스로 느꼈을 즈음, 그도 상대의 기동력이 약해졌다고 동시에 느꼈던 것인지 차영을 와락 품에 안았다.
강제로 끌어안긴 채로 차영은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무슨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감정들이 몰려와서 버거웠다.
그리움, 조바심, 애틋함.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었지만 평소 차영의 평이한 어조와는 달리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화가 났다는 걸 아는 모양인지 태주가 슬쩍 상체를 떼어 내서 차영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그러게. 반성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딴 거 보여 주면 용서할 줄 알아?”
“그래도 하늘 너무 예뻐서 조금 풀렸지?”
개자식. 그 말엔 반박할 계제가 없어 차영이 잇새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미국에선 즐겁게 잘 보내셨나 봐?”
“넌 전화를 왜 했다 끊었어.”
“별로 용건이 궁금하지도 않았던 건지 다시 안 걸어 본 사람이 할 질문은 아닌 것 같네.”
“그냥 용서해 주면 안 돼?”
“이유도 모르고 그럴 순 없어.”
“얼마 전에 아버지 기일이어서, 가족이 같이 살던 집에 다녀왔어. 매년 이맘때쯤 가.”
이런 이유라면 할 말이 없어진다. 어떤 의미에선 퍽 교활한 응답이지만 차영의 마음을 아주 간단하고 짧은 문장으로도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내 친구 말론 가끔 뉴욕에 훌쩍 가기도 한다고 하던데…….”
“문득 부모님 생각날 때마다 가기도 해.”
“아버지 기일이…… 이맘때구나. 거주지 말고 공통점 하나 생겼네. 우리 아빠도 이맘때쯤 돌아가셨거든.”
이렇게 비슷한 부분 자꾸 찾기 싫은데.
그러면 지금도 감당이 안 되고 있건만 태주가 훨씬 더 애틋해질 것 같았다.
“미리 말을 할까도 했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어디 갈 때 누구한테 보고하고 그랬던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말할 생각을 못 했고, 도착해선…….”
뒷말을 고르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채 끝맺지 못했다. 그들은 가볍게 끌어안은 상태 그대로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다가 태주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차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뉴욕이라고 적히고, 도시의 명물이 그림으로 그려진 반짝이는 마그넷이었다.
“본인이 조종간 잡은 거 아니어도 이 선물 주는 거였어?”
“그런 조건 하나하나 따지기엔 내가 좀 급해서. 갈 길이 멀다. 앞으로 내가 따박따박 행선지 보고하길 바라면 그 여행 선물 한 다섯 개 정도 깎아 줘.”
차영은 어이가 없었다.
“마그넷 열 개 타령한 건 한 기장이잖아. 난 이거에 관해서 아무 말도 안 했어.”
“미친놈이 열 개 같은 소리 한다는 말을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긴.”
그가 쓸데없이 귀가 좋고 기억력은 더 좋아서 차영은 뒤늦게 곤란해졌다.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차영의 이마에 태주가 기습 공격을 하듯 입을 맞췄다.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입술이 과감하게 행선지를 변경했다. 입술에 가볍게 스치듯이 그의 온기가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그때까지 차영은 가만히 태주의 품에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