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무튼 한 기장이 뉴욕에 갔다는 거지. 그것도 여행으로 놀러.”
섭섭한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건 단순히 자신이 속이 좁아서는 아니리라.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던 찰나였다. 마침 수화기 건너편에서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잠깐만 차영아. 뭐라고요? 아…… 진짜요? 선밴 그걸 왜 기억하고 있어요?
희미한 목소리가 담고 있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도윤이 근처에 있는 동료들과 따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뭔데 그래?”
- 아, 별건 아니고, 작년에도 한 캡 이맘때쯤 그렇게 길게 쉬었대. 그땐 한국 항공으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여서 그랬는지 병가를 공식적으로 냈었다는데.
“병가?”
- 어, 그래 놓고 그때도 아주 멀쩡한 상태로 퍼스트 탔대. 선배 중 하나가 본인이 그때랑 이번이랑 둘 다 객실 서비스를 해서 기억하고 있다네. 미국에 가족 있는 거 맞나 봐.
“그렇구나. 잘 알겠어.”
- 그런데 한태주랑 둘이 친한 거야 아닌 거야? 속 시원하게 대답 안 해 준다, 너?
“그냥 입주민이라고 했잖아.”
없는 소리는 아니지만 솔직하지 않은 대답인 것도 사실이었다. 제 유일한 친구에게 눈속임을 하고 있다는 게 불편해진 차영은 이만 통화를 종료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지내다가 언젠가 태주와의 사이가 보다 깊게 진전되기라도 한다면 그땐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될까. 평범한 이성애자인 그녀가 어떻게 볼까 걱정이 됐다. 물론 언제나와 같은 좋은 친구로 남아 주겠지만 아직은 정작 차영이 자신이 없었다. 첫 만남부터 그에게 깊이 끌렸다는 걸 머리론 알면서도 줄곧 모른 척했던 건, 이런 일상의 균열들이 겁이 나서였는지도 모른다.
사서 걱정을 하며, 전화를 먼저 걸어 놓고 끊을 만한 핑계가 뚜렷이 없어 망설이는데 운 좋게도 상대가 먼저 제 생각과 같은 말을 꺼내 주어 안도했다.
- 나 운항 브리핑 하러 가야 되거든? 또 통화해. 웬일로 이차영이 전화 다 했는데 수다 더 오래 못 떨어서 섭섭하다.
“나도. 또 통화하면 되지.”
- 너 엄청 비싸게 굴잖아. 게다가 어째 요새 너랑 이야기하면 한태주 이야기가 9할인 느낌이야. 다음엔 널 향한 나의 일방적인 우정에 대해서 심도 있게 이야기해.
차영은 픽 웃었다.
“응, 조심해서 다녀와.”
통화를 종료한 그는 으쌰, 하고 몸을 일으켰다. 쓰레기를 통에 버리고 초코인지 호두인지 알 수 없는 털이 복슬복슬한 포메라니안에게는 또 보자는 손 인사를 했다.
미국에 한태주의 가족 같은 건 살고 있지 않을 터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직접 1년에 몇 번 얼굴을 보러 갈 정도로 친밀한 사이의 친구가 있다는 것도 상상이 안 갔다. 인생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래된 연인 정도라면 모를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차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할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한 가지씩 쓸데없는 것들을 의심하게 된다. 그가 잡히지 않아 불안한 것이다.
〈그런데 한태주랑 둘이 친한 거야 아닌 거야?〉
잘 모르겠다. 그와 친한 건지 아닌지. 며칠 내내 그의 연락을 기다려 봤지만, 여전히 차영의 휴대폰은 그로부터 걸려 온 전화로는 울리지 않고 있었다.
* * *
탑장의 부친상 때문에 들른 장례식장은 인산인해였다. 본인이 살면서 덕을 많이 쌓은 건지, 자녀들이 사회생활을 성실하게 잘한 건지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제 일이라도 되는 양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하고 상주인 가족들을 위로했다.
동료들과 함께 부의금을 내고 안으로 들어온 차영도 탑장과 맞절했다.
“심장 마비라고 들었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운이 나빴어. 아무튼 다들 와 줘서 고맙다.”
도리어 아버지를 잃은 탑장 쪽이 직원들을 위로하듯 어깨를 토닥였다. 여직원들 몇몇은 그의 덤덤한 표정을 보고 설움이 북받친 모양인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차영의 눈에도 그의 다소 피곤하고 지친 얼굴 아래에 감춰진 슬픔이 보였다.
탑장은 단순한 나이 대로만 따지면 직원들의 큰형뻘이 됐다. 배려심이 넘치고 성정이 다정해서 아버지처럼 잘 챙겨 주곤 했던 덕분에 평상시엔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도 아직은 부모님과 영영 헤어지기에는 버거운 나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문을 마친 직원들이 식당으로 가서 일을 돕는 사이, 탑장이 상주석을 비우고 차영을 따로 불러 세웠다.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상주다 보니까 내가 자리를 옮길 수가 없어. 관제탑 며칠 비울 생각하니까 신경이 쓰이네.”
“걱정 마세요. 탑장님 안 계시면 다들 더 긴장하고 잘할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만 네가 특별히 좀 더 긴장해라.”
“저도 초보인데요. 선배님들한테 그렇게 전할게요.”
“그래도 현장에서 상황 읽는 걸로는 너 따라올 놈이 없어. 내가 제일 믿는 거 알지? 무슨 일 생기면 너만 소환해서 미안하긴 하다만, 의지가 돼서 그래.”
그들의 업무는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실속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라 최대한 침착하게 공항의 전반적인 상황을 인지하고 판단하는 일이 요구됐다.
눈으로 활주로를 보고 상황을 읽어 낸 뒤, 귀로는 교신한 조종석의 음성을 들으면서, 동시에 입으로 관제 명령을 내려야 하는 복잡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순발력이 무엇보다 필요해서, 이해력이 좋고 퍽 난감한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줄 아는 차영의 기지들이 종종 빛났다. 그럴 때마다 탑장은 그를 입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했다.
“잘하라는 말씀으로 듣고 명심할게요. 탑장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차츰 무뎌지겠지. 나도 자식이 있잖냐. 아버지 돌아가신 것보다도 그 조그마한 애들이 나중에 커서 지금 내가 느낀 감정을 비슷하게 느낄 생각을 하니까 그게 제일 슬프다.”
그는 좋은 탑장이기 이전에 좋은 아버지인 것 같았다. 차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시간을 오래 빼앗았다고 느꼈는지 번뜩 정신을 차린 탑장이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차영이 넌 다시 관제소로 들어가 봐야 하나?”
“네, 오늘 야근해요.”
“고생 많네. 먼 길 왔다 갔다 하느라. 밥 꼭 먹고 가라. 육개장 맛있더라.”
차영을 서둘러 식당 쪽으로 보낸 그는 다시 조문객맞이를 하기 위해 분향실로 들어갔다. 복도에 남겨진 차영은 잠시간 망자의 가족들이 벗어 놓은 신발들을 눈에 담았다. 다들 급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온 모양인지 점잖지 못한 화려한 운동화부터 굽이 높은 하이힐, 낡은 스니커즈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그 위로 겹쳐지는 익숙한 장면이 있었다.
2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경찰서로 달려갔던 어머니의 신발이었다. 언제나 꼼꼼하고 준비성이 투철하던 그녀의 구두가 양쪽이 짝짝이여서, 그녀의 손을 잡고 경찰서에 갔던 그는 그날의 흐트러진 어머니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다행히 탑장에게는 비통함에 무뎌지리라는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주변에 가족들이 죽은 경우를 심심찮게 봐 왔을 것이고, 연륜을 통해 배웠으리라. 실제로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차영조차도 때로 그가 그리웠지만 평범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왜, 제 어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 남편의 죽음에 아직까지도 도저히 무뎌지질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깟 사랑이 뭐라고. 그냥 일정한 시기 동안 미친 듯이 사람을 뒤흔드는 호르몬 작용이 아닌가. 태어난 이상 대부분 겪는 한순간의 열정이다. 어떤 소설의 대화처럼 시간이 없으면 못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그런 것일 뿐이다.
안타깝고 쓸쓸한 생각들에 매몰된 차영이 제 눈가를 우울하게 접고 있는데, 때마침 그를 깨우듯 먼발치에서 후배 한 사람이 차영을 향해 손짓했다.
“차영 선배! 식사 됐어요!”
“응, 지금 가.”
제 기억 속 과거라는 수렁에 정신이 갇혀 있던 차영은 제 이름이 들리자마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 * *
하루가 길었다. 탑 내에 탑장이 함께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무척 컸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로드 맵을 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실수가 없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덕분에 직원들의 피로도는 평소의 배가됐다.
교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영의 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공항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입고 있는 코트가 어깨 위에서 유달리 무겁다고 느껴질 즈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CAL 한태주 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