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30화 (30/144)

30화

황급히 출입문 쪽을 보자, 세워져 있던 차량도 어느 틈에 사라진 뒤였다. 당황해하고 있는 차영의 뒤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 정말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엄마, 혹시 방금 어떤 남자 지나가는 거 못 봤어?”

“웬 남자? 엄마 걸어오는 길엔 아무도 없었어.”

“아, 나 왜 이러지. 날이 추워서 정신이 같이 얼었나. 분명히 봤는데.”

여태까지 착시 같은 걸 봤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처음은 급작스럽게 오는 법이니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눈앞의 현실이 그가 본 게 틀렸다고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이상하게 자꾸 생판 남인 그 남자가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최소한 태주의 아버지는 아닐 터다. 그래도 어쨌든 관련이 있긴 한 인물일 것이다. 그날 그를 태워 갔던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건 태주도 간접적으로 인정했던 바였으니 착각한 게 아니었다.

“괜찮은 거야?”

“사람을 잘못 봤나 봐. 아빠한테 인사 다 했으면 우리도 이만 가요.”

“그래. 돌아가자.”

차영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그녀가 그를 일반실 출입문으로 이끌었다. 차영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완전히 납골당 건물을 빠져나간 뒤, 거대한 기둥 뒤에서 검은색 정장을 잘 차려입은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척 자세가 곧은 남자가 똑바르게 걷는 동안, 그가 내딛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몹시 희미하게 났다.

그는 차영 모자가 통과해서 나간 일반실 출입문을 묘한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VIP실로 걸음을 돌렸다.

* * *

〈생텍쥐페리 「야간 비행」이나 「남방 우편기」 같은 거?〉

태주가 가볍게 지나가듯 한 말이 계속 떠오르는 이유는 며칠째 그와 연락이 닿지 않기 때문일 터다. 차영은 거실 책장의 정 가운데 자리에서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을 꺼내 들었다.

사실 이건 그의 아버지의 책이었다. 덕분에 세월이 지나면서 낡았고, 많이 해졌다.

이 비교적 짧은 글은 몇 번을 읽어도 질리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작가의 묘사에 따라 절로 그려지는 밤하늘과 비행장의 풍경이 퍽 아름답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읽어 주던 책이라서 마음이 더 갔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때는 소설의 내용도, 담고 있는 메시지도 몰랐지만 그 순간 느꼈던 소박한 행복만큼은 훨씬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결이 다 일어나서 까칠해진 책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던 차영은 어느 한 면을 펼쳤다. 유감스럽게도 생각이 많아지는 문구가 눈동자에 각인됐다.

“르루, 자네는 살아오면서 사랑을 얼마나 많이 해 봤나?”

“사랑이라. 소장님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자네도 나처럼,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말이지?”

“네, 그다지 많지는 않았죠.”(*Saint Exupery, Night Flight, Houghton Mifflin Harcourt, 1974.)

황급히 책을 덮은 차영은 원래 있던 자리에 고이 책을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제집의 거실 창가에 서서 요사이 내내 텅 비어 있는 야외 주차장 태주의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공항에서도, 그리고 집 근처에서도 가끔 그의 기척을 찾았지만 볼 수 없었다. 참다못해 전화를 걸어 봤더니 해외로 로밍이 되어 있기에 황급히 끊었다.

그는 왜 비행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을까.

“아직 우리가 그 정도로 세세하게 사생활을 공유할 사이는 아니라 이거지.”

태주의 전용 주차 자리가 있는 부분을 겨냥해 유리창을 손가락 등으로 툭 두드린 차영은 나지막하게 궁싯댔다. 하긴. 그들은 친구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직장 동료도 아니었다. 아직은 단순한 공동 입주자, 혹은 넓은 의미의 협력 업체 직원 사이 정도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오래 지켜본 건 아니지만 여태까지의 지표로 미루어 한태주는 늘 혼자였다. 딱히 외로워 보이지 않아 천만다행인 일이다. 어쨌든 그런 그의 생활 패턴을 고려하면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또 일반적인 조건으로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지금 우리 관계는 뭘까.

그에게 정말 사랑할 시간이 있긴 한 걸까.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건 제집이 있는 이 건물, 야외 주차장, 그리고 저 편의점 정도가 다였다. 함께 영화를 한 편 봤고, 손바닥에 그가 일방적으로 입을 맞췄고, 손을 잡은 채 편의점에서 집까지 이르는 몇 분 정도를 거닐었다. 술을 몇 번 같이 마셨고, 식사를 두 번 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그와의 추억을 꼼꼼하게 되새기던 차영은 정말 별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 고개를 돌렸다.

〈아닌데. 넌 딱, 어디다가 정성스럽게 순서 맞춰서 촘촘히 붙여 놓을 성격인데.〉

실은 그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거실 벽면에 쪼르륵 붙여 놓은 마그넷들이 시야에 바로 들어왔다. 쭉 늘어서 있는 손바닥보다 작은 것들은 베이징, 모스크바, 그리고 태주가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1층 우편함에 넣어 두고 갔던 싱가포르의 겨우 세 개였다. 기차놀이 하듯 그것을 열 맞춰 나열해 둔 차영은 결국 휴대폰과 겉옷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 편의점까지는 금방이었다. 낯이 익은 점원과 인사를 나눈 그는 생수 한 병과 콜라 한 캔, 그리고 육포를 샀다. 건물 구석의 강아지에게 육포를 주면서 파라솔에 앉았다.

“아직 이름도 못 물어봤네. 넌 이름이 뭐야?”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열심히 꼬리를 흔들기에 대충 털의 색깔대로 초코나 호두 정도 되지 않을까 혼자 해석했다. 목을 축이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유일한 친구인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때 전화를 걸어 제 불안한 마음을 기댈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가끔 좀 외로운 기분을 야기했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경우에 편해서 이 상황을 변화시킬 엄두가 안 났다.

- 웬일로 전화야?

“왜 해도 뭐라 그래.”

- 용건 없으면 생전 안 하잖아.

“싸우자고 건 거 아니야. 끊을까?”

- 어우! 한 마디를 안 져 줘! 뭐 궁금해서 거셨는데. 길게는 통화 못 해. 곧 비행 있거든.

“바쁘구나.”

- 다녀오면 쉬는데 뭐. 그나저나 넌 납골당은 잘 다녀왔어? 아버지 기일 이쯤이었지?

“응. 뭐…….”

어설프게 말을 얼버무리는 모양새는 별로 이 화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했다. 그걸 잘 아는 도윤이 지레 그의 용건을 짐작하고 말을 이었다.

- 한태주 때문이야?

“갑자기 웬 한태주?”

- 뭐 그 사람 소식 궁금해서 건 거 아니셔? 안 그래도 선배들이 한 캡 이야기 하더라고.

“무슨 이야기? 비행 간 거 아닌가? 무슨 일 있대?”

귀가 솔깃한 사람처럼 서둘러 질문을 해 놓고 아차 싶었다. 단지 의외인 건 제 반응에 종종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는 도윤이 본인이 하고 싶은 말에 매몰되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 한 캡 이번 주는 비행 통으로 없을걸? 취소해 달라 그랬대. 아니, 야. 며칠 전에 한태주 퍼스트 타고 미국 놀러 갔다는 거야.

“미국? 거긴 갑자기 왜?”

- 나야 모르지. 친구들 만나러 갔나? 부모님 거기 산다는 소문도 있던데. 넌 몰랐어? 관제사 한 사람이랑 요즘 가까이 지낸다고 하던데. 난 당연히 너일 줄 알았지? 너 아냐?

쉽게 입이 안 떨어졌다. 그녀의 말마따나 요즘 가까이 지내는 관제사라는 게 자신을 가리키는 게 맞는 거 같긴 한데 정작 그는 태주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딜 갔다면 왜 간 건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도리어 태주와 사적으로 대화 한 번 해 본 적 없다던 도윤보다도 더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 아무튼 선배들 완전히 호들갑 떨더라. 난 몰랐는데 가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렇게 훌쩍 간대. 기장들 자기가 운항하는 비행기라도 퍼스트는 자리 없을 때 빼곤 앉아 보지도 못하는 거 알지? 자기 돈 내고 끊은 걸 텐데 한국 항공 뉴욕행 퍼스트면 티켓값만 얼마야. 1년에 열 번 미만으로 타도 이미 억대 되겠다. 걔 아버지 대체 뭐 하시니?

돌아가셨다던데. 차영은 속으로 대답하고 말을 아꼈다.

- 진짜 팔자 부럽다. 우리 아빠 반성해야 돼.

“팔자 좋은 건가? 그 사람은 다른 기장들에 비해 일을 되게 많이 하는 거 같던데?”

- 어, 맞아. 기장들 보통 성수기에도 100시간 훌쩍 넘기는 일은 별로 없는데 한 캡은 매달 거의 그 정도를 날거든. 심지어 중·단거리보단 장거리 위주고. 운항 팀장이 많이 맡겨.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 같던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어. 뭐 일 잘하니까 그러겠지.

“연봉을 남들보다 많이 받나 보지. 한국 항공 회장이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 뭐 특채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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