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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29화 (29/144)

29화

일등석의 분리된 객실은 고요했다. 개중 한 자리에 태주도 착석해 있었다. 조종사 입장이 아닌 승객 입장으로 타 있는 상황이긴 한데, 종종 비행 때 마주쳤던 사람이기도 해서 승무원들은 그를 정확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소 헷갈려 하는 듯했다.

그들이 다른 승객들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기에, 태주는 귀찮다는 양 손을 내젓고 안대를 착용했다. 그러고는 애써 잠을 청했다.

아버지의 기일이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는 비명에 죽고 없어졌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이 그를 추모해 주고, 또 기억해 주어야만 했는데 일가친척도 하나 없던 고아인 아버지에게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그 무거운 몫을 늘 태주가 혼자서 전부 감당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태주가 단 몇 살만 더 많았더라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자신은 어른의 손길이 없으면 제 한 몸 돌보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어린애였다. 그 때문에 태주에 관한 모든 결정 권한은 실질적 보호자인 외할아버지 내외에게 있었다.

당시 문 회장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망자의 물건들을 전부 태워 버리라고 명령했다. 어린 태주는 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문 회장이 그걸 결정하는 게 크게 잘못된 일이란 걸 충분히 인지했으면서도 외할아버지가 두려운 마음에 차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그는 이제 어른이 되었으나 고인을 추억할 만한 매개체 하나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자연히 어떤 식으로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을 그리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만나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 몇 마디를 건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오늘도 저희 한국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부기장 홍선재입니다. 본 비행기는 한국 항공 091로 현재 대한민국 인천에서 출발, 미국 뉴욕 JFK 공항을 목적지로 하여 고도 35,000피트 상공을 순항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기내 방송을 귀에 담던 태주는, 문득 차영에게 자신의 미국행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너무 오래 혼자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서 제 일정을 그가 궁금해할 것 같다는 데까진 생각이 못 미친 게 사실이었다. 이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제 마음이 하는 소리에 비교적 솔직히 귀를 기울이는 태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닌 차영에게 자신이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그의 뇌리에 똬리를 틀고 앉아 다른 생각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또 누구의 외손자인지, 또 그들이 차영과 그의 가족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가 알게 되면 큰 상처가 될 터다. 도대체 왜 제 앞에 나타난 거냐고, 자신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태주는 여태까지 해 왔던 대로 제 존재를 감추고 그저 차영을 멀리서 지켜봐야 옳았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우리의 끝이 비극일 걸 알면서도 왜 나는 너를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지.

“후우…….”

자책이 담긴 깊은 숨을 몰아쉰 태주는 안대를 벗고 휴대폰을 꺼냈다. 기내에 있는 지금은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댈 수 있지만 내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착하면 전화를 해야겠지.

하지만 그래도 되나.

내가, 감히 너한테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갔다고 솔직히 말해도 돼?

휴대폰을 꽉 쥐어 본 태주는 창문을 올리고 바깥의 창공을 들여다보았다. 어지러운 제 마음속과 달리 유달리 구름은 희고, 하늘은 깨끗했다. 그게 마음이 아팠다.

* * *

1월 중순의 날씨는 여전히 차고, 또 찼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건 차영에게 그다지 긍정적인 기운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기일이 며칠 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새해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년 아버지의 유골함을 안치해 둔 납골당에 어머니와 함께 방문하는 것은 그들 모자의 연례 행사였다.

숙연한 얼굴을 한 차영은 유리창 안에서 웃고 있는 아버지를 눈에 담았다. 한국 항공의 제복을 차려입고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는 남자는 40대 중반 정도로 이곳에서 평생 잠자기엔 꽤 젊었다. 그가 죽은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엄마, 영정 사진 이거 바꿀까 봐. 매년 아빠 제복 입은 거 보니까 좀 그렇네.”

“뭘로 바꿔? 네 아버지 사진 죄다 제복 입은 것밖에 없어.”

“정 뭐하면 얼굴만 잘라서 쓰면 안 되나?”

“얘가 불경한 소리 하고 있어. 그 사람이 원했던 거야. 이렇게라도 뜻 지켜 줘야지.”

아버지의 꿈은 죽을 때 명예롭게 죽고, 그때의 제 장례는 공항장으로 치렀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사랑했고, 제 동료인 비행기를 존중했다. 직업 윤리에 누구보다도 충실했으며, 조종간을 잡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더할 나위 없이 드높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겸손했다. 모두 어머니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두 사람은 의외로 어머니 쪽에서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 사귀게 되었다고 들었다.

숙맥인 아버지는 번듯한 외모와 직장에도 불구하고 서른 중반이 되어 갈 때까지 진지하게 사귀어 본 여자 친구 하나가 없었다는 듯했다. 심지어 진도도 더뎌서 손을 잡는 것도, 입을 맞추는 것도 어머니가 먼저 했다고 한다. 간신히 결혼에 골인한 그들 사이에 늦둥이 차영이 태어난 건 결혼하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그렇게 차영을 낳아 키우던 몇 년 후, 그는 예기치 않은 항공 사고로 불명예 퇴직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항공은 그와의 선을 분명히 긋고 단칼에 아버지를 제명했다. 그는 제게 잘못이 없다, 억울하다 반론을 펼치지도 못했다. 이미 현장에서 처참하게 불에 타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유해를 회수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차영의 어머니와 차영만큼은 그의 결백을 믿었다. 그래서 백방으로 뛰어 봤으나 이미 경찰 조사까지 끝난 사건에 일반인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명예만이라도 지켜 주기 위해 영정 사진으로 제복 입은 것을 선택하는 일 외에는 말이다.

“납골당 위치라도 옮기는 건 어때? 엄마 연초마다 지방에서 왔다 갔다 하기 어렵지 않아? 명절이라도 끼면 차편도 찾기 쉽지 않고, 어쩌다 눈이라도 많이 오면 불편하고. 엄마 편한 데로 옮기자. 그러면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어.”

“너무 가까이 있으면 애틋한 것도 사라진다더라. 괜찮아, 1년에 한 번 이렇게 보는 것도. 네 입장에서 너무 가까워서 불편한 거 아니면 그냥 둬.”

그녀는 대답 끝에 고개를 가볍게 숙여 기도했다.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대충 상상은 갔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고 그를 안심시키려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 간 사랑의 결실인 차영의 축복을 빌어 달라고 말할 터다.

차영은 신중하게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리가 끼어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계절이 춥고도 추운 겨울이라는 건 아무래도 다른 계절에 비해 슬픈 일 같았다.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시신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추모하는 이의 슬픔도 함께 꽁꽁 어는 듯한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차영은 다시 영정 사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납골당에는 출입문이 여러 개가 나 있었다. 그들이 선 쪽은 일반실 입구였고, 모자가 선 반대편에 VIP용 출입문이 커다랗게 위치했다. 검은색 차량이 그 앞에 주차되더니,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놀랍게도 낯이 익었다. 예전에 집 앞에서 본 적이 있던 사람이다. 태주의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던 예의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태주에게 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쭉 빼서 남자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폈다. 거리가 멀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으니 동일 인물이라 속단하긴 어려웠다. 확신이 필요했다.

차영이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반대편으로 걸어가려 하자, 언제 눈을 떴는지 그의 어머니가 손목을 붙잡았다.

“너 왜 그래? 어디 가.”

“어? 아니, 누구 아는 사람 본 것 같아서.”

“여기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올 만한 사람이 있어?”

“아니. 그게……. 엄마, 여기 잠깐만 있어. 나 금방 올게.”

그는 그녀를 뿌리치고 VIP실 쪽으로 접근했다. 발소리를 최대한 낮춰 걸은 뒤 안쪽을 들여다봤는데, 분명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텅 빈 공간만이 차영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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