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공항 일각의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태주가 맞았다. 꽤 멀리서 봐서 실루엣만 겨우 인식 가능했지만 한국 항공의 절도 있는 제복 차림에, 저 정도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은 도윤이 증언해 준 대로 드물었으니 착각은 아닐 것이다.
다리를 척 꼬고 앉아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를, 지나다니는 여자들이 힐끔대면서 쳐다봤다. 무리 지어 가는 승무원들 중 몇몇은 살갑게 인사도 건넸다.
누가 무슨 말을 걸든 대충 씹고 넘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동료들의 공손한 인사에는 그도 제대로 대응했다. 다만 추가로 뭔가를 더 묻는 데에는 불손한 태도로 응수했다. 그는 여지 한 조각 주지 않고 제대로 잘하고 있는데, 천천히 걸으면서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차영은 그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나빴다.
왜 평상시에 그가 숱한 뒷말에 시달리는지를 자신이 직접 봤기 때문일 터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그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이 제 눈에도 보였다. 사실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 필요 이상으로 미움을 받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그의 앞이었다. 벤치 맞은편에 우뚝 서자, 차영의 다리부터 천천히 위로 끌어 올린 태주의 시선이 마침내 얼굴에 닿았다.
“와, 너 생각보다 길다?”
장비 너머가 아니라 실제 목소리를 듣고 나니 여기까지 걸어오며 나빠졌던 기분이 어이없을 만큼 쉽게 풀리려 들었다. 차영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양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댁이 더 길어.”
“그건 나도 알고. 너 늦었다.”
“부른다고 아무 때나 막 나올 수 있는 줄 알아?”
“관제사들 두어 시간씩만 일하고 중간중간 쉬잖아. 능률 높인다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 가지고.”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아? 툴툴거림이 배가됐네.”
“알지도 못하면서.”
“모르면 알려 주면 되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틀린 소린 아니라서 할 말이 없었다. 차영이 괜히 땅만 툭툭 차고 있는데, 그가 덧붙였다.
“언제 퇴근해?”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언제 퇴근하냐고 물어? 지금 낮이야.”
“그러면 난 집에 누가 데려다줘.”
“또 나 운전기사로 쓰려고? 나 오늘 야근이야.”
“넌 무슨 야근을 이렇게 밥 먹듯이 해?”
“나 그쪽이 생각하는 것보다 바빠. 공항 24시간 열려 있는데 일할 사람은 부족하니까 5일에 한 번은 야근하고, 가끔 밤샘 근무도 해. 나만 하는 것도 아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차영은 순간적으로 제 마음속에서 이는 의문이 있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이렇게 밥 먹듯이’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에게 야근한다는 사실을 노출했던가 하는 질문이었다.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랬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차영은 궁금증을 해소하는 대신 태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일하는 사람 왜 나오라 그랬는데?”
“나 내일 다시 비행 있어서 또 며칠 못 봐. 오늘 드라이브나 할까 했지.”
“좀 전에 장거리 비행하고 귀국했잖아. 한태주 씨는 안 쉬어?”
“일정이 좀 꼬였나 봐. 가까운 데니까 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길래 알았다고 했어.”
“어디로 가는데?”
“싱가포르.”
단답과 함께 태주가 차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중력의 힘을 받아 아래로 축 처져 있는 마른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야외였다. 깜짝 놀란 차영이 그의 손길을 매정하게 쳐 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들의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없어 보였으나, 이번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허리를 살짝 숙인 차영이 낮게 힐난했다.
“미쳤어?”
그러자 그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다시 뻔뻔하게 차영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억지로 붙들고 있기에 차영도 완력을 써서 벗어나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손을 비틀고 있는 와중에 뭔가 손바닥에서 살결이 아닌 다른 것의 촉감이 느껴져 멈칫했다. 차영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했다고 느꼈는지 그제야 태주도 제 손을 떼어 냈다.
“이거…….”
차영이 제 손바닥 위를 내려다보았다. 하단에 모스크바라고 적혀 있는 마그넷이었다. 차영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마그넷이라고 말을 하면 되지. 혼자 난리 치게 만드니까 재밌어?”
“나야 그 재미에 공항 오지.”
“진짜 성격……. 그런데 정말 꼬박꼬박 사 오네. 한 기장 혼자서 관광지 돌아다니면서 이런 거 막 사나 보지?”
실은 이 질문을 통해 진짜 묻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 공항 등지에서의 일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직접 목격할 수도 있었고, 도윤에게 물어도 됐고, 직원들을 통해 귀동냥을 듣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나 버린 태주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그의 입을 통해 듣지 않는 이상 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 질문 혼자서가 핵심이야, 관광지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걸 사느냐가 핵심이야?”
눈치 빠른 그가 행간의 의도를 이미 읽어 낸 모양이다.
“둘 다.”
“사람이 꼭 경험을 직접 해 봐야만 아는 게 아니다. 텔레비전 같은 것도 좀 보고 살아. 인터넷도 종종 접속해 보고.”
“무슨 뜻이야?”
“이런 건 요샌 각 나라 국제공항에 다 팔아.”
“…….”
“그리고 당연히 혼자 놀아. 나 성격에 하자 있는 거 잊었어? 걱정할 거 없어.”
“누가 걱정한대?”
“넌 얼굴에 다 티나.”
하지만 태주는 얼굴에 별로 티가 안 났다. 그 때문에 자신만 초조했다.
바로 이런 순간들에 특히 그랬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그가 어떤 속마음을 품고 자신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건지 짐작이 쉽게 가질 않아 불안했다.
평소의 습관을 돌이켜 보면 도리어 태주보다 자신 쪽이 훨씬 침착하고, 감정 변화의 폭도 완만했다. 그런데 막상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할 때를 보면 판도가 뒤집혔다. 그는 자신의 기분을 잘 읽지만, 차영은 그가 어려웠다. 심지어 문제집과 달리 답안지도 없었다.
“내가 지난번에 준 마그넷은 어디에 붙여 놨어?”
이 질문을 들은 차영은 머릿속에 지난번 태주가 주었던 베이징 마그넷을 어디다 뒀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솔직히 말하지 않을 셈이었다.
“책상 위에 대충 버려 놨다. 왜.”
“아닌데. 넌 딱, 어디다가 정성스럽게 순서 맞춰서 촘촘히 붙여 놓을 성격인데.”
“매번 뭐 대단하게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척이야.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진짜 아니야?”
“아니라니까?”
목소리를 높여 놓고 차영은 도리어 본인이 움찔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보편적 명제를 태주가 지금 이 순간 떠올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이봐, 학생. 나중에 가정 방문 한 번 더 하면 바로 걸릴 거.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착각은 개인의 자유라고 본다. 내 책임은 아니지만.”
“개수는 네가 정해.”
“뜬금없이 무슨 개수?”
“그거 몇 개째 주는 날 우리가 정식으로 사귈지.”
순간 말문이 막힌 차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셰익스피어가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던데. 부끄럽고 난감한 나머지 지금 이 순간 눈이 되어 녹든, 흰빛이 되어 사라지든 양단간에 하나는 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주가 덧붙였다. 고장 난 엔진처럼 탈탈거리는 차영과 달리 그의 표정은 분명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목소리는 녹을 듯이 달콤했지만, 언중의 의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했다.
“시기는 네가 정하라고. 대신 그때 무조건 나한테 와라, 차영아.”
그는 한국 항공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에이스 조종사였다. 여행지 수십 군데를 채우는 데는 아무리 길어 봤자 두세 달가량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미 그가 제 손에 넘긴 것만 두 개째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몹시 당황한 차영이 제 손에 쥔 마그넷을 힘주어 쥐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접속사가 나오면 안 되는 타이밍인데.”
태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남자 안 사귀어 봤어. 그래서 막 그쪽이 잡아끄는 대로 이끌려 가면서도 좀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잡고 있는 손이 남자 손이라는 걸 인지하면 되게 이상한 기분도 들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으면서 나랑 사귀고 싶을 정도로 나 좋아해? 얼마나 봤다고?”
“너랑 자고 싶어.”
“아하, 신음 소리가 듣고 싶으시다?”
“여차하면 사귀기 전에 들려줘도 돼. 넌 사인만 줘. 내가 또 실행력은 있는 편이라.”
“하……. 그럼 머릿속만 문란하신 게 아닌데? 그리고 그게 다야? 자고 싶다?”
“마음이야 천천히 크게 키워 가면 되는 거지.”
빤히 태주를 내려다보던 차영이 괘씸하다는 양 그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퍽!’ 걷어찼다. 어떤 사안에 있어서든 경험치가 적은 사람들은 해당 사안에 귀여운 환상을 갖고 있다. 차영의 경우는 낭만적 연애에 관한 환상이 있었다. 덕분에 태주의 대답이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차영은 태주가 앓는 소리를 내든 말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등져 걸었다.
“윽……. 이차영 관제사!”
가다가 돌아본 차영이 그를 한심하다는 눈길로 쏘아봤다.
“최대 열 개. 그 이상은 못 기다려.”
“미친놈. 열 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혼잣말하듯 궁싯댄 차영이 다시 태주로부터 돌아섰다. 뒤통수에 시선이 꽂혀 드는 걸 느꼈으나 더는 그를 마주 볼 엄두가 안 났다. 귓전이 홧홧한 기운으로 달아올랐다.
관제탑을 향해 걸어갈수록 조금씩 태주는 멀어지고 있는데, 그가 제게 했던 모든 말들은 도리어 해일처럼 가까이 몰려와 사위를 집요하게 어지럽혔다. 덕분에 목울대마저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가는 길에 있는 유리창에 제 얼굴을 힐끗 비춰 응시했더니, 역시나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헉…….”
마침내 모퉁이 돌아 인적이 드문 자리에 서게 된 차영이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그는 뒤늦게 손바닥에 움켜쥐고 있던 마그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계속 물리치려 애써 봤지만 태주의 낮은 음성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거 몇 개째 주는 날 우리가 정식으로 사귈지.〉
〈대신 그때 무조건 나한테 와라.〉
〈너랑 자고 싶어.〉
“하아…….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가쁜 호흡을 토해 낸 차영은 질린 기색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