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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27화 (27/144)

27화

“네가 이렇게까지 챙기는 걸 보니 홍선재라는 아이와 꽤 친한가 보구나.”

“제가 친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기장한테 다 미뤄서 나만 살아남고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테니까 하는 수 없이 나서는 겁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어차피 같이 일하는 전 승무원들도 다시는 절 신뢰하지 않을 거고요. 외할아버지 사업가시잖아요. 똑같은 일이 다른 기장에게 생겼었다면 해당 책임 기장을 문책하셨을 겁니다. 사안을 냉정하게 보세요.”

“그걸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사고를 쳐?”

“제 문제이기도 하니까 외할아버지가 또 덮어 주시겠죠. 원래 일 그런 식으로 처리하시는 거 잘 압니다.”

“저놈이……!”

노인은 분노로 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다가 날 선 눈동자로 태주를 쏘아보았다.

전 세계를 아울러 모든 갈등 상황은 더 아쉬운 사람이 한발을 물러서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물체를 쳐다보듯 태주를 노려보던 문 회장은 끝내 졌다는 듯이 뒤쪽의 안 실장을 향해 손짓했다.

“엉덩이 무거운 이놈이 직접 여기까지 움직인 걸 보니 보통 아끼는 녀석이 아닌 모양이다. 홍선재라는 직원 보직 해임 인사는 철회해. 언론 홍보 팀을 좀 더 가동해서 최대한 사측에 피해가 없게 무마하라고 전해. 당시 현장 영상이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적당히 우리 입장에 유리하게 편집해서 인터넷 등지에도 올리고, 언론사에도 제출해. 최대한 잘 손써서 해결해 봐. 안 실장 능력 좀 보자고.”

태주의 예상대로 문 회장은 미운 놈에게 떡 하나를 더 물려 줄 셈인 것 같았다. 수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안 실장은 꽤 능력 있는 비서이자 전술가였다. 대충 일이 마무리됐다고 판단한 태주가 묵례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노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얼굴은 치료하고 가거라. 그런 꼴로 다니면 체면이 상하는 법이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복도를 나서는데 모퉁이에 걱정스러워하는 낯빛을 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외할머니가 있었다. 제 뺨에 난 핏자국을 미처 감추기도 전이었다. 아차 싶은 태주가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상처를 눈에 담은 듯했다.

“얼굴이 왜 그러니? 네 외할아버지가 이랬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 양반은 좋게 말로 하지 꼭 뭘 던져. 언제쯤 버릇 고치겠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거 잊으셨어요? 외할머니가 포기하세요.”

농담을 건네도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 태주를 보는 그녀는 차마 상처 위에 균이라도 옮을까 뺨을 만지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어루만지듯이 쓸어내렸다.

“약 바르고 가.”

“정말 별거 아니에요. 빨리 가 봐야 돼요.”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오면 꼭 일분일초라도 더 있기 싫은 사람처럼 가 버린다.”

“조만간 또 올게요.”

끝내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는 안 한다. 그녀도 태주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주차장까지 나와 배웅을 하려고 해서, 그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본가의 주차장은 난방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자택 외부에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너무 안 좋은 데다 연말에 봤을 때보다도 뼈밖에 없을 정도로 더 깡말라서 조금이라도 예기치 못한 찬 바람을 쐬게 만드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나오지 마세요.”

“네 아버지한테는, 새해에 다녀왔니? 신년 인사 해야지.”

“이제 슬슬 다녀오려고요.”

“기일 맞춰서 가려는가 보구나. 그러고 보니 며칠 안 남았네.”

“그러려고요.”

“혹시 올해도 미국으로 가니? 아버지 유골 안치해 둔 납골당이 아니라?”

“네, 이제 앞으로도 계속 그럴까 싶어요.”

“왜? 번거롭잖아.”

그건, 거기에서 우연히라도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분에 넘치는 하나를 갖는다는 건 그 가치에 해당하는 수많은 편리함을 잃는다는 걸 뜻한다.

“저 진짜 가요. 계세요.”

이 화제에 대해서 묘하게 태주가 회피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도 더 캐묻는 대신 그의 등을 두드려 격려하기를 택했다. 빠르게 본가 대저택을 벗어난 태주가 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룸미러로 얼굴에 난 상처를 보다가, 온몸의 힘이 다 빠진 듯 운전대에 제 머리를 박고, 그렇게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 * *

태주가 오늘 함께 조종간을 잡게 된 건 선재가 아니었다. 보통 운항 팀에서 스케줄을 짤 때 그의 선호도를 고려하여 선재와 합을 맞추게 하는 일이 잦았던 터였다. 그러나 오늘 태주와 함께 브리핑을 들으러 나타난 건 다른 부기장이었다.

운항 팀장은 선재가 비행을 나오지 못하게 된 저간의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는 모양인지 그에게 뭔가 묻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태주는 이미 자신을 통해 그 문제가 해결됐고, 선재도 곧 복귀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함구했다.

아무리 남들이 무슨 말들을 하는지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도, 어디에서 갖가지 소문들이 퍼져 나가는지 정도는 손바닥 위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었다. 뻔했기 때문이다. 매일 수십, 수백 명의 승무원들이 다녀가는 운항 관리 팀의 사무실은 바로 그 요새였다. 굳이 불씨를 던져 줄 필요는 없었다.

“아, 그리고 이번 비행에는 전신 화상을 입은 환자 한 분이 동승합니다. 피부 이식 수술을 해외에서 받기로 하셨다네요.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한 기장님.”

일지에 서명을 하던 태주가 팀장을 슬쩍 쳐다봤다. 막상 시선이 마주치자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기에, 태주도 모른 척했다. 대신 그는 테이블 위의 탁상 달력을 가리켰다.

“이날부터 이날 사이. 내 비행 일정 어떻게 되죠?”

“다음 주…… 한 기장님 프랑크푸르트 4박 5일 일정 있으신데요.”

“한 주 통으로 비울 수 있어요?”

“네, 뭐 일정이야 다른 분으로 대체해 드릴 순 있겠습니다만.”

“비워요. 그리고 비행기 한 자리 예약 좀 부탁하죠. 뉴욕행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평소엔 항공 일정 조정 일절 안 하시는 분께서 뉴욕행 티켓 예매 부탁하실 때마다 꼭 스케줄 한 주 내내 취소해 달라고 하시니까요.”

제 행동반경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떤 경우든 유쾌한 일은 아니다.

물론 비행에 관련된 사건이라면 운항 팀장이 세세하게 아는 것이 당연하고, 또 지향해야 하는 일이지만 비행 일정을 취소하고 어딘가에 가겠다고 하는 일은 전부 태주의 사적인 영역이었다. 기억력이 좋아 머릿속에 탑재하고 있던 정보라 해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예의인 셈이다. 태주는 살짝 상체를 테이블 위쪽으로 기울여 팀장을 은근한 눈치로 바라보았다.

“운항 팀장님은 저한테 아주 관심이 많으시네요. 피차 서로 예의를 전혀 안 지키는 깊은 사이가 되고 싶으신 모양인데. 이참에 사귈까요?”

당황했는지 팀장이 움찔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아시니 다행이네요. 앞으론 다시는 저한테 실례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지난번처럼 좌석은 퍼스트로 하시겠습니까?”

그는 가볍게 끄덕였다.

“예매 확인증은 항상 하는 것처럼 사내 메일로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티켓값은 따로 청구하세요.”

모자와 캐리어를 챙긴 그가 먼저 나서자, 과묵한 부기장이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 * *

활주로 위 하늘은 청명하고 푸르렀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기라서 사방이 하루 중 가장 맑고 밝았다. 유리창 너머로 항공기들을 살펴보고 있던 차영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뒤이어 모니터에 별자리처럼 예쁘게 수놓여 있는 각 항공기들의 표식들을 눈에 담았다. 한태주를 태운 한국 항공 기체는 현재 인천 공항으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비를 챙겨 든 차영이 관제를 요청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보통 관제탑에 연락하는 일은 부기장이 도맡아 했으나, 차영과 알게 된 뒤로 태주는 본인이 직접 이착륙 허가를 받기 위해 교신하곤 했다. 영악한 그는 이미 차영이 제 목소리를 무척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한국 항공 272, 방금 포인트 통과했습니다.」

태주였다. 차영은 괜히 그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장비들을 손에 꽉 쥐어 봤다. 며칠 국경선을 넘은 곳에 머물던 그가 드디어 자신이 있는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게 차영을 안도하게 했다.

「타워입니다. 한국 항공 272. 34번 좌측 활주로에 착륙 허가합니다.」

- 「기상 상태는요? 바람 체크 부탁합니다.」

「바람은 320도 방향에서 12노트로 불고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34번 좌측 활주로에 접근 중입니다.」

「네, 시야는 맑습니다. 안심하고 착륙하시기 바랍니다.」

- 「착륙하면 잠깐 봐.」

헙. 제 입을 막은 차영이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다행히 다들 제 할 일로 바빠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유리창 너머를 직접 직시하던 차영은 장비들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망원경 너머를 아름다운 명화라도 감상하는 사람처럼 홀린 듯이 들여다봤다. 태주를 태운 항공기가 무사히 활주로에 접근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승무원들은 승객들이 전부 하기한 다음에야 비행기에서 내려와 대지를 밟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착륙하면’이라는 건 족히 20, 30분 정도는 뒤를 말하는 것일 터다.

“이차영, 거기서 뭐 해. 비행기 너희들 구간에서 미친 듯이 밀린다! 너희 섹터 일 안 해?”

탑장의 경고를 듣고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온 차영은 다시 장비를 굳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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