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입술을 달싹이던 차영의 뇌리에 아무도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준 적 없었다는 태주의 말이 번개처럼 잠시 꽂혔다가 사라졌다. 그런 이유라면 왜 태주의 생일이 귀하지만 슬플 수밖에 없었는지 너무나 납득이 됐다. 동시에 좀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런 제 연민을 태주는 읽어 낸 것 같았다.
“불쌍하게 보지 마. 난 그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별로 불쌍하게 자라지도 않았어. 매우 부유하고, 안락한…….”
“그러니까 성격이 그 모양이지. 부족한 게 있어야 겸양과 겸손을 배운다고. 알기나 해?”
“아, 이차영 넌 그런 거에 매력을 느끼는 타입이야? 우리 천생연분인가. 나 결핍 많아. 네 기준에 좀 모자라면 앞으로 몇 개 더 만들어 올게.”
그의 능청에 차영이 픽 웃었다.
“특별히 불쌍하게 본 건 아니야. 내가 누구한테 연민 가질 군번도 못 되고. 어떤 마음인지 잘 안다는 눈빛 보낸 거야.”
사람들의 위로란 건 늘 그때뿐이고. 다들 그 슬픔의 무게에 관해서는 쉽게 잊는다. 나중에 술자리에서나 ‘맞다, 걔네 아버지 돌아가셨지?’ 하는 정도의 가십성 안줏거리 정도가 될 뿐이다.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사람 정도일 터다. 그리고 차영은 그의 슬픔에 깊이 공감했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 그래서 처음부터 신경이 쓰였나 싶었다.
“잘 안다……. 의미심장하네.”
“응, 그래서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 한 기장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어?”
“어릴 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실은 나도 아빠 엄청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 미취학 아동일 때 갑자기 아빠의 존재가 내 인생에서 통째로 사라졌어. 게다가 어릴 때 일 같은 건 생생히 기억하기 쉽지 않으니까 추억할 게 많진 않은데……. 이상하게 아빠의 어떤 모습들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워낙 차영의 아버지가 다정한 성격이어서 그랬는지, 그가 안아 들거나 목마를 태워 줬을 때, 혹은 졸려 하는 차영을 앉혀 놓고 책을 읽어 줄 때 따위의 따뜻한 느낌들은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히 잘못한 일이 있으면 혼을 내기도 하고, 가끔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놀아 달라는 자신을 밀어냈을 때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것들은 죄다 삭제되고 좋은 것들만 남았다. 이래서 다들 추억은 미화된다고 하는 모양이다.
“내가 아버지 파일럿이었다고 말했던가? 실은 우리 아버지도…… 한국 항공에 계셨어.”
무심한 태주의 시선이 차영을 정면으로 향했다.
“차영아.”
“응?”
“네 이야기는 천천히 해 줘. 하나씩. 사탕 수북이 옆에 쌓아 놓고 하나씩 껍질 까는 것처럼. 느긋하게.”
“갑자기 내 개인적인 이야기 해서 부담돼? 나 좀 촌스러웠나? 부담 주려던 건 아냐.”
“그냥 널 더 천천히 오래 알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너도 나 때문에 힘든 이야기들 급하게 털어놓을 필요 없어.”
성격이 급하다고 할 땐 언제고. 별말 아닌데 섭섭했다.
처음부터 그는 늘 이랬다 저랬다 굴면서 차영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말을 놨다가 높였다가, 차갑게 무시했다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가. 또 진도 같은 건 더디게 빼지 말자는 듯 급작스럽게 다가왔다가, 막상 제 이야기는 천천히 듣겠다고 말한다. 그의 무게가 가늠이 안 갔다. 덕분에 태주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 의식하고, 신경 쓰고, 궁금해지고, 결국은 안달복달하며 쳐다보게 됐다.
억울해진 차영이 뭔가 더 말을 하려는 찰나, 태주에게 급히 전화가 걸려 왔다.
“난 괜찮아. 받아.”
“회사 일이라서. 금방 올게.”
“여기서 받아도 돼. 어제 일 때문 아니야? 사실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아 좀 걱정돼서. 한 기장만 괜찮으면 나도 같이 듣고 싶어.”
하는 수 없이 태주가 앉은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무표정했으나,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수화기 건너편의 음성은 퍽 곤란해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홍 기장? 무슨 일이야.”
- 선배, 저 선재인데요. 하루 종일 망설이다가 연락드려요. 저 보직 해임 된다는 소식이 있어서요. 쉬고 있으면 한국 항공 산하 LCC로 추후에 불러 주신다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보직 해임? 네가 왜. 어제 일 때문이야?”
- 네, 그런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건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런 일로 쉬시는 날 연락드려서 정말 죄송한데. 저 조금 더 한국 항공에서 경력 쌓고 싶어요. 제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들리는 소리만으로 대충 상황을 파악한 차영의 눈길이 걱정을 담고 태주를 향했다. 골치 아프다는 양 이마 사이를 좁힌 태주가 알겠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대꾸한 뒤 전화를 끊었다.
“가 봐야 되지? 급한 일인 것 같다.”
“미안. 차는 다음에 마시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냐, 택시 타면 돼.”
“데려다줄게. 어차피 가는 길이야.”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서둘러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 * *
퍼억!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업무용 패드가 태주의 어깨를 맞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태주의 맞은편에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잔뜩 노한 얼굴로 앉아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 회장의 곁에 선 안 실장이 태주의 근처로 다가와 패드를 들어 그의 손에 쥐여 주려 하자, 태주는 냉랭하게 거절했다.
“눈이 있으면 그 뉴스들을 네가 읽어 봐라.”
노기를 가득 띤 문 회장의 음성이 우두커니 선 태주를 따갑게 찔렀다.
“안 봐도 훤해요.”
“조용히 경력 쌓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런 시끄러운 사고를 쳐.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거야?”
“외할아버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네가 내 혈압을 한계까지 올리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얌전히 몇 년 조종간 잡다가 경영 수업을 받고 있으면 현장 경험 있는 경영진으로 추대해 주겠다는데 왜 언론에 벌써 쓸데없는 일로 이름이 오르내리게 해!”
“객실 승무원들과 승객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처사였습니다.”
“그래도 저놈이 끝까지 잘했다고!”
참다못한 문 회장이 책상 위의 다기로 된 잔을 던지려고 하자, 이번엔 안 실장이 황급히 노인의 손길을 막아 냈다. 노인은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태주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못마땅해하는 기색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아주 낮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에도 색깔이 있으면 짙고, 무게가 있으면 육중했을 터였다.
“부기장 선에서 꼬리 잘라.”
태주는 바로 반기를 들었다.
“부당한 처사입니다.”
“일 벌여 놓고 말이 많구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전혀 몰랐던 건 아니고 설마설마했어요. 이 사태를 이용해서 절 어떻게 잡으려고 하실까. 외할아버진 제가 생각했던 중 가장 치사한 방법을 고르셨네요.”
“그런데 정말 이 녀석이……!”
“책임 기장인 제가 시킨 겁니다. 책임을 물으실 거면 홍선재 부기장이 아니라 절 보직 해임 하셨어야죠. 그게 원칙입니다. 한국 항공에 문제가 생기면 회장님이 책임지시죠. 그거랑 같은 이치예요. 제가 기장인데 누구더러 다 뒤집어쓰라는 겁니까. 벌써 판단력 흐려지셨어요? 그 정도면 이만 은퇴를 하세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문 회장은 안 실장의 한발 앞선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제 앞에 놓인 물건들을 태주를 향해 던졌다. 서류철과 만년필, 조금 전 던지려다 실패한 다기까지 전부 태주의 몸 위에 맞고 떨어졌다. 이윽고 두꺼운 책까지 태주에게 내던지자, 그것은 태주의 뺨을 맞고 떨어졌다. 얼굴에 기다랗게 상처가 남았다.
제 손등으로 뺨 위의 혈흔을 훔친 태주가 차갑게 내뱉었다.
“저 비행하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함부로 제 몸에 상처 내시면 안 됩니다.”
“버릇없는 놈.”
“홍선재 부기장 인사 명령 철회해 주세요.”
“내 밑으로 들어와. 경영 전략실에 자리를 마련해 두마.”
아무래도 문 회장은 협상을 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이미 삶의 노선을 달리한 자신을 본인 입맛대로 요리하길 원한다면, 그도 이에 합당한 무언가를 내놓아야 이치에 맞았다. 그러나 문 회장은 적당히 회유를 해도 모자랄 판에 줄곧 ‘무조건’ 따르라며 억지만 쓰고 있었다.
심지어 태주는 외할아버지에게 바라는 게 없었다. 단 한 가지 외에는 말이다. 만일 그가 제게 아버지를 돌려주고, 문 회장 때문에 가족을 잃은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 준다면 의향이 있었으나 그건 물리적으로도 산술적으로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가정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의 회사를 자신이 물려받게 되는 건 발생하지 않을 사건이란 의미다.
“그건 몇 번이나 말씀드렸죠. 일 잘하는 CEO들 고용하시라고요. 여긴 한국 항공 기장으로서 온 겁니다. 제 요구 사항은 명령 철회, 그거 한 가지입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시끄럽다. 입 닥치고 들어오라면 들어와. 어디서 배워 먹은 것도 없이 네가 원하는 것만 들어 달라고 떼를 써. 네가 열 살 먹은 어린애야?”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부들거리는 문 회장에게 태주가 쐐기를 박았다.
“홍 기장 보직 해임 지시 안 거둬 주시면 저도 사표 써요. 원랜 외할머니 돌아가시면 한국 뜨려고 했는데, 시기를 좀 당겨 보죠. 당연히 다신 안 돌아와요. 전 외할아버지와 같은 땅에서 숨 쉬는 것도 싫거든요.”
“지금 늙은 할아비를 협박하는 거냐? 태주 너 대체 왜 이렇게 속을 썩여!”
한 세대를 건너뛴 두 사람이 첨예하게 서로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