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25화 (25/144)

25화

자동차 극장엔 영화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차영이 심사숙고 끝에 고른 영화는 한국에서 제작하고 유명 영화배우 신의건이 열연한 것으로 애증과 용서에 대한 단상을 다룬 몇 년 전 작품이었다.

교외의 한 한적한 자동차 극장에는 주차된 차량이 꽤 있었다. 시간은 오후 5시쯤. 겨울이라 해가 짧아 금세 사위가 어두워졌다. 덕분에 한껏 고즈넉해진 분위기는 일반 영화관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정도를 벗어나 훨씬 운치 있었다.

카 시트를 뒤로 약간 젖힌 차영과 태주는 영화 내용에 집중했다. 특히 스크린에 빨려 들어갈 듯이 열중해서 관람하던 차영은 생각보다 극중 내용에 이입이 많이 됐는지 불안한 장면이 나오면 배우와 함께 손을 떨고, 기쁜 장면이 나오면 함께 웃었다. 영화가 중반을 치달아 갈 때까지 두 사람 모두 별말은 없었다.

“와, 신의건 쟤 진짜 잘생겼다.”

“내가 낫지 않나?”

혼잣말하듯 꺼낸 말에 즉답이 돌아왔다. 차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신의건도 빼어난 미남이긴 했지만 ‘남자’가 좋은 건 아니었던 차영은 오직 한태주하고만 키스가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그걸 태주에게 말해 줄 의향은 조금도 없었다. 대신 그저 손을 더듬어 음료를 마시려는데 그 위를 덮는 온기가 있었다. 옆자리에 힐끗 시선을 던지니 언제부터 저렇게 앉아 있었던 건지 아예 몸을 모로 틀어서 제 쪽만을 주시하는 태주가 바로 보였다.

“한 기장은 영화 안 봐?”

“네가 더 재밌다.”

퍽 곤란해할 말을 던지고 이쪽의 반응을 보며 재미있어하는 건 그냥 그가 즐기는 일종의 유희이자 취미인 모양이다. 그런 태주에게 장단 맞춰 줄 생각은 없었던 터라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서 노닥거려도 돼? 오늘 아침 뉴스에도 한국 항공 나오던데.”

“홍보 팀이 알아서 하겠지.”

“겁도 안 나? 직위 해제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래?”

무슨 질문을 하든 쉽게 답변하는 그가 이 질문에만큼은 잠시 생각할 것이 있는 듯했다.

“이차영.”

“왜, 또 무슨 이야기 하려고.”

그가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름을 부르면 차영은 자연히 긴장하게 됐다. 처음 태주가 저렇게 나왔을 땐 도윤과의 관계가 그저 친한 친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받고, 그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금 더 확실히 하고자 했었다. 이번엔 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저러는가 싶어 어깨가 조금 굳었다.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다가 괜히 손을 더듬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바람에 이내 관뒀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불러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든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피부 아래가 간지럽고, 얼굴이 붉어질 것 같고, 심장이 조금 더 가속도를 내어 뛰려고 준비하는 듯한 그런 어설프고 웃기는 기분 말이다.

“왜 쫄고 그래? 저녁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던 거야.”

그 말에 차영이 안도한 듯, 혹은 실망한 듯 굳어 있던 어깨를 누그러뜨리고 자세를 편안히 고쳤다.

“뭐야, 놀랐잖아. 나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럴 것 같았어. 그래서 내가 예약했거든.”

“왜 물어봤는데?”

“그게 예의 같아서. 너 인사치레 그런 거 좋아하잖아.”

“와, 진짜 말본새는 안 변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게 원활한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손짓까지 섞어 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차영을 태주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데 그 눈빛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왠지 살갗이 타는 듯한 느낌에 차영은 괜히 말을 얼버무리게 됐다.

“예의라곤 죽으로 쑤려고 해도 없으면서 저번부터 되게 있는 척은.”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노선이 안 잡혔다. 차영이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앞 유리창 너머 넓고 커다란 스크린 속 주연 배우들이 농밀한 스킨십을 시작했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 다시 태주를 보는데, 그가 차영의 턱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려고 해서 차영이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의 얇은 피부 위에 제 입술을 부딪쳐 가볍게 키스했다.

“이제 겨우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있는데 너무 앞서 나가신다.”

“너 비행기의 평균 속력이 얼만 줄 알아? 매일 그거 몰다 보면 자연히 성격도 급해져.”

“한 기장 다른 사람이 본인 만지는 거 되게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싫어해. 무방비할 때 건드리면 그게 진짜 싫더라고.”

“싫은데 왜 나한텐 이래? 틈만 나면…….”

“그거랑 이거랑 같냐? 밀폐된 공간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손 놀리고 있으라는 건 솔직히 고문이지.”

예전에 그가 잠들어 있다가 제 목을 졸랐던 일이 불현듯 떠오른 차영은 괜스레 미운 기분이 들어 팝콘을 던져 버리고 도로 영화에 집중했다. 태주에게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그때 그의 손아귀 힘만으로 난 목의 자국 때문에 며칠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만 했다. 이제 와 그땐 왜 그랬던 거냐고 물어보기도 뭐해서 애써 묻어 두고 있는 중이었다.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주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다시금 자세를 잡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영화 내용 같은 건 더 이상 눈에 안 들어왔다. 결국 차영은 빠삭하게 이해했던 전반부의 내용과 달리 후반부의 내용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 * *

극장 인근에는 주변 경치가 근사한 프랑스 요리 전문점이 위치해 있었다. 그곳 객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늦은 시간이라 어둑어둑해진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눈의 호강으로도 버거운데 음식 맛이 훌륭했다. 아마 한동안 가끔 오늘 저녁이 생각날 것 같았다.

태주는 식사 예절이 좋았다. 손짓은 깔끔했고, 욕심부리지 않았다. 지난번 제집으로 급조한 식사 초대를 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입은 짧되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잘 먹는 듯했다.

식사를 거의 끝낸 그들은 마무리하듯 가볍게 와인 잔을 부딪쳐 건배했다. 차를 가져온 태주 대신 음용은 차영 혼자 했다.

“입엔 맞아?”

“맛있어. 야경 때문에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배불러.”

“다행이네. 아, 이거.”

그 순간, 그가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아무리 비행기 주행 속도에 맞춰 성격이 급해졌다 하더라도 반지 같은 엄청나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물건은 아닐 터다. 최대한 부담을 내려놓은 차영이 상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조그마한 마그넷이 들어 있었다. 아래에 베이징이라고 적힌 것을 보니 이번 여행에서 사 온 것 같았다.

꺼끌꺼끌한 표면을 만지작거리던 차영의 입가에 절로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태주를 쳐다봤는데, 생각보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서 놀랐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차영은 문득 한태주라는 인간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언젠가 그의 지갑 속에서 발견했던 가족사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 기장 호구 조사는 여전히 싫지?”

“사람 성격 바뀌는 거 봤어? 난 일곱 살 성격 그대로야.”

“그래도 몇 가지 물어보고 싶어서.”

“기꺼이 내 한 몸 희생할게.”

“또 거창하기는.”

그가 픽 웃었다. 해 보라는 양 가볍게 손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뭔데. 물어봐.”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 사진 생각이 갑자기 나서. 의사…… 같던데 두 분 다.”

“아버진 맞는데 아마 엄만 의대생 시절인 걸로 알아.”

차영이 그걸 보고 짐작했던 가설 전부가 맞아떨어졌다.

“어머니 맞지? 그 사진에선 임신하신 거 같았어.”

“응, 그게 나야. 그런데 어머니가 날 낳다가 돌아가셨어. 그때부터 아버지 손에 컸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엔 외할머니 손에 컸지. 부모처럼 다 채워 주셨던 건 아니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 주셨어. 아버지도 되어 주시고, 어머니도 되어 주시고.”

“외할머니랑 사이좋구나. 세상 모두와 적일 것 같았는데 놀랍네.”

“그렇긴 한데 사실 내가 좋은 손자인 건 아니야.”

“일곱 살 성격 그대로라서?”

“그런 것도 있고, 이제 다 컸으니까. 데면데면해.”

예상보다 태주의 대답은 훨씬 성실했다. 그리고 차영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약한 탄식을 내뱉었다. 첫 단계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당사자는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덤덤히 말하지만 차영으로선 그의 상처를 계속 후빈 듯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어쩐지 아주 옛날 사진뿐이더라.

그의 얼굴까지 등장하는 사진은, 어머니가 이미 죽은 뒤라 영영 찍을 수 없게 돼 버렸기에 남은 게 그거 하나뿐인 듯했다. 세상에 오직 단 하나뿐인 것이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지갑 속에 고이 넣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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