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퇴근길에 집 앞 편의점에 들른 태주는 휴대폰 화면에 뜬 연락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징계 겸 교육을 받기 위해 본사에 갈 때마다 마주치는 인사 위원장이었다.
정해진 업무 시간 외에는 웬만해선 본사의 연락을 받지 않는 태주였으나, 아까 전 기내에서 발생한 일 때문에 계속 무시로 일관할 수도 없었다. 제 목을 슥 긁은 태주가 별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표정에는 불편함이 역력했다.
“전화 올 줄 알았습니다. 뭐가 궁금하신 건데요.”
- 한태주 기장, 오늘 오후 18시 05분경 우리 항공 802편에서 있었던 상황 소명하십시오. 이 통화는 녹취 중임을 미리 알립니다.
“네, 제가 묶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게 가장 궁금하신 거 아닙니까?”
- 당시 현장에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을 벨트로 강압적으로 묶어 두는 조치를 취할 만큼 심각한 위험 사태가 발생했던 겁니까?
“당연합니다. 묶을 만하니까 묶었겠죠. 친절한 서비스가 생명인 승무원들이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명제는 머릿속에 없어요?”
- 해당 승객 측에서 한국 항공과 802편에 탑승한 승무원들을 상대로 법적인 절차를 고려 중이라고 합니다. 이미 언론에도 그 소식을 알렸고요. 이 일이 공론화되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본사 전체입니다. 한 기장께선 사측의 이미지 같은 건 안중에 없으신 겁니까?
그는 통화하는 동시에 캔 맥주와 안주 따위들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집어 들었다.
“고소하라고 하세요. 항공법을 어긴 건 기내에서 흡연하고, 만류하는 사무장과 주변 승객들을 위협하고 폭행해서 유혈 사태를 만든 해당 승객이 먼저입니다. 현장 앞뒤 상황 녹화가 다 돼 있는데 어디서 개소리 짖는 건지 모르겠네. 언론이 두드려 패면 우리도 화면 다 공개하면 될 거 아닙니까.”
-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한 기장님의 기본 근무 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국 항공은 승객이 최우선입니다. 최우선 주의라고요. 외국 생활을 너무 오래하셔서 한국말 이해 못 하시는 건 아니죠?
약삭빠르게 비꼬는 말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승객 최우선 주의를 한국 항공에서 나만큼만 지키면 아무 분란도 안 일어납니다.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열받을 일이 없거든요.”
- 본인이 분란을 자주 만드신다는 건 인정하시나 보네요?
“정말로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까? 나 비꼬는 거 정말 재능 있는데, 나도 달려들기 전에 적당히 하죠?”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인지 상대는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 어쨌든 책임 기장으로서 매우 과한 대처였습니다. 징계를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이미 다 결정하고 속 뒤집으려고 연락한 거 같은데.”
- 그러게 매뉴얼대로 승객을 설득했으면 될 일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태주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현장에 안 나와 본 책상머리 새끼들은 물정을 모른다니까.”
- 한태주 기장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녹취 중이라는 거 잊었습니까?
고른 제품들을 쏟아 내듯 계산대에 올려 둔 그는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기 위해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댔다. 바코드를 찍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지는데, 아무리 제복을 뒤져 봐도 지갑이 안 나왔다. 차에 두고 왔나 싶었다. 점원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태주가 잠시 나갔다 오려고 한 발을 내디뎠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카드 한 장이 쓱 나타났다.
돌아보니 차영이 있었다.
이곳에서 마주치리라곤 전혀 예상 못 했다. 태주가 진짜 차영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할 셈인지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자, 재빨리 차영의 카드로 계산을 마친 점원이 카드와 편의점 봉투를 함께 도로 내밀었다. 태주가 뭔가 반응할 기회도 주지 않고 두 가지를 전부 챙겨 든 차영이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태주는 잠자코 그를 따랐다.
“아무튼 됐고요.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알아들었으니까 잔소리 그만 집어치우고 인사위 일정 잡히면 소환이나 하세요. 끊습니다.”
- 한태주 기장. 이보세요, 한태주 기장!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태주는 득달같이 다시 전화가 걸려 오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나온 뒤 주변을 둘러보니 차영은 건물 구석에 있는 강아지 집 앞으로 가서 가공 소시지를 까 흔들고 있었다. 강아지가 야무지게 받아먹으면서 꼬리를 흔드는 모양새가 서로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닐 텐데 아주 친밀해 보였다.
머리끝까지 짜증이 가득 차 폭발할 지경이었던 태주는 그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기묘하게 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차영이 많이 보고 싶었다는 게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피부에 절로 스며들었다.
그는 천천히 차영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 쪽에서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차영이 귀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한 캡이 한국 항공 아주 뒤집어 놨던데. 뉴스에서 봤어.”
“벌써 뉴스에 났어?”
“요샌 실시간이야. 혼자 20세기 사시나. 그러게 승객을 왜 묶어? 정신 나갔어, 진짜.”
“그런 건 정당방위라고 하는 거야. 나도 어지간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어.”
“좀 전엔 누구랑 싸워? 그 얘기 하는 것 같던데.”
“있어. 본사 직원.”
태주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차영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한태주 씨는 늘 맞는 말만 하고 항상 맞는 행동만 하는데 적도, 미워하는 사람도 왜 그렇게 많을까? 이런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어?”
“안 해 봤어. 해 봐야 돼?”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 이거 한국에서 되게 유명한 속담인데. 내가 미국에서 안 살아 봐서 모르겠어. 거기도 이런 거 있을라나.”
미소 띤 낯으로 물끄러미 차영을 내려다보고 있던 태주가 말을 교묘하게 돌렸다.
“나 미국에서 살다 온 건 어떻게 알았어.”
“수작 부려도 소용없어. 공항 직원 중 반은 알아.”
“안 추워? 내가 안아 주고 싶다.”
“엄청 추워. 그런데 안아 주지 마.”
“왜, 어째서.”
차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덜덜 떨면서 쪼그려 앉은 제 몸을 더 웅크리는 모양새가 정말 많이 추워 보였다. 태주는 작은 고양이 같은 그 모습에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영은 이쪽에는 관심도 별로 주지 않고 계속 눈앞의 강아지만 쳐다보고, 귀여워해 주느라 바빴다. 안 봐 주는 그가 섭섭하다면 너무 성급히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다고 탓할는지도 모르겠다. 차영은 자신이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까맣게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주는 애써 아쉬움을 감추고 덤덤하게 내뱉었다.
“네 옆에 사람 있다.”
“알아.”
“그렇게 강아지가 귀여우면 한 마리 키우지 그래?”
“어차피 종일 계속 같이 있어 주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그래. 이대로가 좋아.”
“차라리 나를 데려다 키우든가.”
태주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차영은 기가 막힌다는 양 픽 웃었다.
“한 기장 같은 말 안 듣는 생명체를 어떻게 키워? 주제 파악이 어지간히 안 되시나 봐?”
“넌 원래 정이 그렇게 많아?”
“그렇게 많진 않은데. 없는 것보단 낫지 않아?”
“착하고.”
“못된 것보단 낫지 싶고.”
“끌어안는 거 안 되면. 키스는 해도 돼?”
대화 주제에서 동떨어진 뜬금없는 소리를 했더니, 차영은 그제야 태주를 돌아봐 주었다. 놀란 듯했다. 서로의 눈동자가 향한 시선의 끝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재채기를 몇 번 했다. 다행히 태주가 빤히 바라보는 데에는 그런대로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차영은 애써 호흡을 차분히 정리하고, 늦었지만 침착하게 대꾸했다.
“한태주 기장, 잘 들어. 관제 기관에서 이륙 관제를 할 땐 우선하는 순서가 있어. 장거리 노선, 출항 방향, 비행 고도……. 이런 걸 종합적으로 다 따져서 가장 적합한 비행기부터 순차적으로 띄운다고.”
“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순차적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우린 지금 당장 침대로 직행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거든?”
“아니야, 되게 이상해. 한 기장도 남자고 나도 남잔데 이성애자로 살아온 둘이 만나서 다짜고짜 키스부터 하는 게 말이 돼?”
“난 이성애자 아닌데. 이성을 좋아해야 이성애자 아냐?”
“그럼 그 외의 성애자라는 거야? 나한텐 게이 아니다 어쩌고 해 놓고?”
“그것도 딱히…….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아닌데. 자빠뜨리고 싶은 남자 없었거든, 너 외에.”
태주가 무척 자연스럽게 차영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순간 멈칫한 차영이 손을 척 내밀어 그의 폭주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기다려야지. 내가 관제 주기 전까지 그쪽이 모는 비행기 이륙도, 착륙도 안 하잖아. 상식에서 벗어나는 건 그냥 한순간 일탈이야. 난 그쪽이 나한테 상식이 될 과정이 필요해.”
그들의 관계를 이륙이라고 친다면, 최종 목적에까지 도달하는 데 차영이 고려할 만한 어떠한 제반 사항도 태주 측에서 제공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터다. 농밀한 스킨십에 대한 에두른 거절인 셈이다. 불확실한 걸 싫어하는 태주는 차영을 탓하는 대신 질문을 바꿔 물었다.
“뭐, 좋아. 그럼 내일 영화 볼래?”
“볼래.”
즉답이 떨어지자 의외로 태주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본다는데 표정 왜 그래? 물러?”
“누가 물러 준대.”
결국 픽 웃음을 터트린 그가 손을 내밀었다. 차영의 눈길이 물끄러미 그 위에 닿았다.
“거기 순서 좋아하시는 분. 손부터 잡자.”
“잡고 뭐 하자고.”
“걷자고, 집까지. 오늘 손 정돈 잡아야 내일 끌어안지. 내가 마음이 급하거든. 머릿속이 아주 문란한 편이라.”
차영은 망설여지는지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괜스레 어둠이 내려앉아 캄캄한 좌우를 한 번 둘러보게 됐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도 잠시간 고뇌하던 차영이 뼈마디가 곧은 태주의 손만 계속 응시하며 열없이 되물었다.
“뭐 얼마나 문란한데?”
“글쎄,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계속 이것저것 해 봐야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겠는데. 일단 관제 사인 전부 무시하고 멀쩡히 날던 비행기 떨어뜨리고 싶다는 건 알겠어.”
“…….”
“뭐 해. 이차영. 손 떨어지겠다.”
입매에 아주 부드럽게 걸린 태주의 미소가 겨울밤처럼 근사했다.
제 심장이 숨 가쁘게 뛰는 것을 느낀 차영은 결국 결심한 듯 그의 손을 잡고 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