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23화 (23/144)

23화

“비행이 몇 시간 밀렸어. 공항 근처에 눈이 많이 와서.”

- 알아. 어제 여기도 눈 되게 많이 왔거든. 항공기 몇 대 결항되고 그랬어. 거기 간 사이에 전화 한 번 정돈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었네.

“해도 되는 거였어?”

- 한 기장 같은 마이 페이스가 일상인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가 전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데.

“너 또 거북해할까 봐. 배려한 거지.”

- 그거 한마디 했다고 복수하는 거야?

“내가 전화를 안 하는 게 너한테 복수거리가 되나 보지?”

불현듯 입을 다문 모양인지 차영의 목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태주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당황해하고 있을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화를 걸기 잘했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데, 차영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 그딴 헛소리 할 거면 끊어.

“그렇겐 못 하지. 뭐 읽어? 책 읽고 있다면서.”

- 「자본론」이랑 「논어」, 「인간 불평등 기원론」.

“진짜? 의외네.”

- ……같은 인문 서적 읽고 있다고 허세 부리고 싶은데, 그냥 잠이 안 와서 가벼운 에세이 봐.

“그것도 의외고.”

- 무슨 책을 읽어야 의외가 아닌데?

“생텍쥐페리 「야간 비행」이나 「남방 우편기」 같은 거?”

정곡인 모양인지 또다시 차영은 대꾸가 없었다. 「야간 비행」은 책장 가장 쉽게 손이 닿는 곳에 꽤 여러 번 펼쳐 본 듯한 낡은 모양새로 꽂혀 있었다. 게다가 아주 옛날에 출간된 서적이었다. 아마 굳이 지금 읽고 있는 게 아니더라도 평소 그가 무척 좋아하는 책 정도는 되리라.

당황하면 쉽게 뒷말을 못 하는 습관으로 미루어 그는 거짓말에 서툰 게 분명했다. 그런 차영의 귀여운 면면들이 자꾸만 태주의 눈에 뜨이고, 귀에 들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 별로 할 말 없는데……. 그쪽이 하면 되잖아.

“이건 칵핏에서 너랑 무전 교신할 때도 생각했던 건데…….”

신중한 음성이 차영이 만든 말줄임표 사이를 파고들었다. 상대도 태주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듯 아주 가느다란 숨소리만 들려주었다.

“너 목소리 되게 좋고…….”

- 그 말을 한 기장한테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되게 야한 거 알아? 듣고 있으면 기분 이상해져.”

- 뭐?

“생긴 건 금욕주의자 같은데.”

- 농담 그만해.

“나 빠른 시일 내에 네 신음 소리 들어 보고 싶어.”

뚝. 수신이 끊기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한 태주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전화가 끊긴 게 맞았다. 다시 걸어 보니 이번엔 받아 주지조차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또 한 번 더 걸어 봤지만 차영은 매정했다.

네 번의 시도까지 해 보려던 태주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진짠데. 바보.”

휴대폰을 푹신한 침대 위에 휙 내던진 그는 의자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 제 고개를 꺾었다. 뒤편의 협탁 위에 있는 리모컨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모니터를 켜서 영화 채널을 켜고 제목들을 눈으로 훑었다.

“거기 뭐가 있었더라. 「탑 건」, 「패신저 57」, 「콘 에어」…….”

차영의 집 책장 아래에서 보았던 DVD 목록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봤다. 그러면서 화면의 목록을 뒤져 보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인 「탑 건」 정도만 유료로 시청할 수 있었다. 그걸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른 리모컨으로 객실의 불을 끈 그는 팔을 괴고 아주 오래된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 * *

항공기는 순항 중이었다. 눈 온 뒤 하늘이 워낙 깨끗하고 맑았다. 이대로 한 시간가량 운항하다 보면 목적지에 무난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태주가 옆의 선재에게 먼저 식사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조종석에서는 기장과 부기장이 같이 식사할 수 없었다. 같은 메뉴를 먹지도 못했다. 식재료에 이상이 있기라도 할 시에 두 기장 다 탈이 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 먼저 식사를……. 아, 선배님. 객실 연락인데요. 이거 받고 먹겠습니다.”

선재가 조심스럽게 인터폰을 들었다.

“네, 칵핏입니다. 네, 아……. 지금요? 그 승객분한테 설명은 하셨어요? 진짜요? 막무가내 손님들 상대하는 매뉴얼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해당 손님 명단이 어떻게 됩니까?”

당황한 눈빛을 한 그가 태주의 눈치를 살폈다.

“뭔데.”

“선배 직접 받아 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태주가 인터폰 재연결을 하자 무척 난감해하는 승무원의 초조한 음성이 직통으로 꽂혔다.

- 한 기장님. 여기 비즈니스 클래스 갤리 듀티인데요. 승객 중 한 분이 기내에서 흡연을 하셨습니다.

“하…….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러는 손님이 나오네요. 일단 법대로 하세요. 항공 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 제23조 위반했다고 고지하시고요. 해당 승객한테 주의 주십시오.”

- 했습니다. 저희 승무원들이 계속 주의를 드렸는데 일부러 다른 승객분들 보는 앞에서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중년 남자분이고요. 다들 알음알음 몰래 피우는 거 아니냐면서 아까 전부터 너무 막무가내로 굴고 계셔서 다른 승객분들이 매우 불안해하십니다.

“했는데 계속 그런다고요?”

- 네, 게다가 객실 승무원 중에 남성 승무원이 현재 없어서, 사무장님이 말리시다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셨어요.

대충 유추되는 상황이 있는 태주는 가볍게 미간을 구겼다.

“브리핑할 때 이야기했을 텐데. 나 에둘러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 사무장님은 이미 주먹으로 안면을 가격당하셨습니다. 피를 많이 흘리셔서 현재 치료 중이십니다.

“하. 그 현장 승객들이 봤습니까?”

- 네……. 이분이 고객님들한테도 계속 시비를 거셔서……. 죄송합니다.

쯧, 그는 혀를 찼다. 오늘 함께 비행하는 객실 승무원들은 태주와도 여러 번 호흡을 맞췄던 베테랑 팀원들이었다. 어쩐지 왜 이런 간단한 일로 운항 중인 조종사들을 귀찮게 하나 싶었다. 승무원이 폭행당하는 것은 공항이나 항공사가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나 친절에 해당되지 않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승객들한테까지 위험이 미치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파장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선재가 제 몫의 기내식을 든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태주의 대응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흡연 문제는 탑승한 전 승객들의 안전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법적인 내용 다시 고지하시고, 아울러서 승무원 폭행죄도 물으세요. 당장 홍 기장 보낼 테니까 해당 승객은 같이 제압해요. 명단은 한국 항공 블랙리스트에도 올리고요.”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지금부터 상황 전부 영상물로 기록하세요. 법무 팀 제출용입니다.”

-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기장님, 비즈니스석 손님이십니다. 괜찮을까요?

“그건 무슨 논리야. 이코노미면 괜찮고 퍼스트면 안 괜찮습니까? 다 중요합니다.”

- 죄송합니다.

일방적으로 인터폰을 끊은 태주가 선재가 든 기내식을 힐끗 살폈다.

“식사 좀 이따 해.”

“저 지금 가야 되는 거죠?”

“기장이 칵핏 비우리? 일단 가서 설득해 보고 정 혼자 버거우면 나한테 다시 도움 요청해.”

“대응 매뉴얼은 있어요. 그런데 그래도 말 안 들으면요? 걷잡을 수가 없어지면…….”

“웬만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만에 하나 같은 승객을 폭행하기라도 한다면 그땐 가해자를 묶기라도 해야지 별수 있나.”

“헉, 승객 몸을 물리적으로 통제하면 빈축도 사고, 문제도 커질 텐데요. 아무리 승객 과실이 커도 과잉 대응으로 100퍼센트 징계감이에요. 언론에 알려지면 공분도 살 거고요.”

“기체는 폐쇄적이라 도망칠 데가 없어서 한 사람이 폭주하면 뾰족한 수가 안 나. 갈 길이 구만린데 그렇게라도 해야지. 대신 그 전에 승객들한테 승무원들과 승객 보호 및 더 큰 문제 예방 차원이라고 분명히 알려. 네 음성 영상에 확실히 녹음되게.”

“진심이세요? 선배 승객들 위험한 거 못 보잖아요. 그 아저씨도 우리 고객인데.”

그의 눈길이 엉거주춤하게 선 선재를 복부부터 쭉 위로 훑었다.

“이거랑 그거랑 같냐?”

이미 그의 시선 처리만으로도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한 선재가 끄덕끄덕했다.

“이 일로 문제 생기면 내가 전부 책임질 테니까 홍 기장 넌 시키는 대로 해.”

“그 어떤 뒷배보다 든든하네요, 회장님 외손자.”

“비꼬는 거지? 겸손을 미덕 삼아 아무것도 책임지지 말까?”

“농담도 못 합니까. 다녀오겠습니다.”

가요, 하고 대답하듯 벌떡 제 몸을 일으킨 선재가 도망치듯 조종석을 빠져나갔다. 전방의 화창한 날씨와 구름들을 보고 있던 태주는 승객 명단 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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