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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22화 (22/144)

22화

“늦은 밤에 굳이 왜 나한테 전화를 해. 한 기장은 애인도 없어?”

“너 지금 나 떠보는 거야, 아니면 너한테서 아주 떨어뜨리고 싶어서 수 쓰는 거야. 넌 내가 애인이 있으면서도 너한테 꼭두새벽부터 찾아와서 치대는 양아치로 보여?”

항공사 기장들은 연봉이 높고 대외적으로도 그럴싸하게 비춰지는 직종인지라 사귀는 사람이 없는 미혼 조종사가 아주 드물다는 듯했다. 게다가 한국 항공은 항공사를 소유하고 있는 모기업이 국내 10대 대기업 중 하나인 우리나라의 명실상부 국적기였다. 이런 사실들을 도윤으로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하자면 떠본다기보단 확인 절차 정도 됐다.

“뭐 해. 나 시간 없어. 빨리 대답해. 가야 돼.”

그가 손목시계를 보면서 응답 없는 차영을 향해 채근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늦은 시간 사생활을 방해해도 되겠냐고 애걸하는 쪽이 왜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다고 불쾌해했을 터다. 그러나 차영은 이런 태주에게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리어 그다운 태도로 느껴진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베이징이랬지? 마그넷 꼭 사 와.”

이 대답을 들은 태주가 부드럽게 씨익 웃었다. 시원한 입매와 잘생긴 얼굴이 너무 근사해서 가슴이 떨렸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구나 싶어질 때마다, 차영은 몇 번이고 할 말을 잃었다.

“다녀올게.”

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 난 뒤, 태주는 자취를 감췄다.

기다란 뒷모습을 지켜보던 차영은 혼자 남겨지게 되자 그의 살결이 닿았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이스 팩으로 열심히 문질러 댔던 두 뺨의 냉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손등을 대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후끈거렸다.

“하…….”

깊은숨을 내쉬어 본 그는 천천히 현관에 등을 기댔다.

* * *

폭설이 내렸다.

새해가 밝았다는 것을 알리듯 신년의 하늘이 맑은가 싶더니, 겨우 이틀 사이에 유례없는 눈사태가 일어 지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눈발은 이상하게도 수도권 지역에서만 그 위상을 떨쳐 댔다. 덕분에 아래 지방과 서울의 온도 차가 꽤 됐다.

도저히 항공기가 뜰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김포 공항이 먼저 공항 활주로의 일부 폐쇄를 명했다. 뒤이어 인천 공항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몇몇 항공사 측들은 승객들의 원성을 감수하고 전격 결항을 결정했다. 이미 이륙한 비행기의 대다수도 황급히 회항했다.

“눈이 대륙 쪽으로 올라가는 거 같던데요? 지금도 아래 지방은 하늘 깨끗하대요. 수도권 눈사태 사진 보면서 다들 놀란다는데.”

이착륙하는 비행기 편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터미널과 탑의 비행장 관제사들도 할 일을 잠시 멈추게 됐다. 탑장을 비롯해 관제탑에서 근무하고 있던 직원들은 사무실 한편에 모여서 아주 오랜만에 다 같이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래? 출근할 때 난 죽을 뻔했는데. 땅덩이 좁은데도 다른 거 보면 웃긴다.”

“우리 활주로는 언제까지 폐쇄할 것 같대? 운항 관리실에 전화해 봤어?”

“네, 한꺼번에 많이 와서 그렇지 눈 내리는 건 반짝 이러고 마나 봐요. 조금만 기다리면 연락 준대요. 제설만 제대로 하면 큰일은 없을 것 같은데……. 제설하는 직원들이랑 지상직 승무원들이 고생들 좀 하겠어요.”

“이런 일로 연착되면 공항은 진상 다발 구간 되더라고.”

“나였어도 열받죠. 빨리 여행 가야 되는데, 숙소 예약 같은 거 어그러지면 누가 책임져요.”

항로가 막히고 비행기 편이 돌연 취소되면 가장 곤란을 겪는 것은 클레임을 직접적으로 받는 공항과 항공사의 직원들이었다. 지금 이 시각 혼돈으로 가득 차 있을 터미널을 떠올리며 관제탑의 직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저마다 각자 그들에게 마음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내는 듯했다.

“우리만 여기서 이렇게 한가하게 있으니까 이상하네. 야간 관제 때보다도 더 조용해.”

“그러게요.”

계속 동료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차영은, 혼자 동떨어진 섬처럼 그들 뒤편에 서서 평화로운 유리창 너머를 감상하듯 지켜봤다.

야심한 밤에 전화를 하겠다고 엄포 아닌 엄포를 놨던 그는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차영은 지난 이틀 내내 잠을 설쳤다. 차라리 그런 말이나 하지 말지. 이쪽은 새벽 내내 언제 걸려 올지 모르는 그의 연락을 막연히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걸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그건 안 내켰다. 그의 말대로 그가 아직은 좀 낯설고 이런 상황이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다.

이틀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차영은 태주가 남기고 갔던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한 번도 축하해 준 적이 없었다는 그의 생일 말이다. 언뜻 짐작되는 이유는 그가 태어났을 때 뭔가 치명적으로 나쁜 일도 함께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은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보던 차영은 둥그런 모양으로 된 관제탑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처음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이제 와 생각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멋있었다.

탄탄하고 늘씬한 몸을 감춘 각이 잘 잡힌 제복 차림과 조막만 한 얼굴에 담겨 있는 차가운 인상,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할 유려한 얼굴, 좌중을 압도하는 커다란 키, 그리고 상대를 탐색하는 듯한 집요한 시선과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까지. 그 느닷없는 등장 장면에서 그는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었다. 모자랄 게 없어 보이는 그런 한태주가 왜 자신에게 이러는 것일까. 게다가 차영은 그와 같은 남자였다.

태주를 떠올리다 보니 그가 내일 오전 비행기로 돌아올 예정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저기, 탑장님.”

“응? 왜, 차영아. 야, 아니 근데 너 무슨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그래?”

“얼굴요?”

동료 관제사의 책상 위에 있는 손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 본 차영은 깜짝 놀랐다. 양 뺨에 약간 불그스름한 홍조가 떠 있었다. 미약하긴 했지만 밝은 불빛 아래인 데다, 평소에 특별히 안색이 바뀔 일이 없었던 차영인지라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러고 보니 왠지 가슴 한편도 여느 때보다 빨리 뛰고 있는 듯해서 기분이 안 좋았다. 안 좋은 징조기 때문이다.

“아, 그…… 여기 좀 더운가? 우리 기상 상황 악화되면 중국 쪽은 우리보다 상황 안 좋죠?”

“갑자기 웬 중국?”

“네, 베이징이나……. 공항 난리 날 것 같은데. 연착 많이 될까요?”

“공항 이용자 수는 많은데 그거에 비하면 그쪽은 약간 그런 감이 있긴 하지. 왜, 누구 중국 갔어? 제때 못 올까 봐? 그때 그 승무원 친구?”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면 네가 여행 가게?”

그러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후배 한 사람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차영 선배는 엄청 어릴 때 말곤 비행기 안 타 봤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특별히 탈 일이 없었어.”

“하긴 요새 돈만 있으면 한국에서 지내는 게 제일 좋대요. 여행할 데도 많고요.”

웃으면서 끄덕인 차영은 다시 메인 로드를 벗어나 갓길로 빠지듯 대화에서 빠져나왔다. 눈발이 날려 창밖 이곳저곳 달라붙는 모양새가 꽤나 위협적이었다. 시야가 좁은 조종석에서 저걸 보게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해 보던 그는, 이내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 버리고는 관제실을 벗어났다.

* * *

먹구름이 몰려오면 곧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늬바람이 지속되면 하늘이 맑아지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듯, 모든 기상 변화에는 징조가 있었다. 눈이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폭설이 왔고, 그 탓에 태주가 운항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비행기 편은 결항됐다.

항공사들은 기상 상황이 좋아지면 승객들이 탈 수 있을 만한 다음 비행기 편을 수배하느라 바빴다. 태주의 일정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결정에 따라 뒤로 미뤄져서, 그는 인근 호텔에서 강제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시간쯤에는 제집 침대에 누워 있어야 맞았다.

창밖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눈들은, 아직 누군가 밟지 않아 새하얀 색이었다. 물끄러미 그걸 보며 차를 마시던 태주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제 코트 안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사실 이곳에 도착하던 날부터 매일 걸어 볼까, 말까를 수십 번도 고민했다. 정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 그렇게 장고 끝에 내린 결정은 번번이 ‘안 된다’였다. 그래서 오늘은 오래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가 차영의 이름을 찾아 통화를 시도하는데, 상대는 전화를 받은 게 분명한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다 휴대폰 울려서 아무거나 막 누른 거 아니야? 왜 말이 없어.”

- 누가 할 소릴.

이쪽에서 먼저 음성을 들려주니 득달같이 푹 잠긴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잤어?”

- 아냐, 책 읽어.

“휴식 시간에 독서라니 너랑 어울리네. 잘 지냈어?”

- 그럭저럭.

무시하지 않고 응답 자체는 친절하게 돌아왔지만 답변의 내용이나 차영의 말투가 묘하게 퉁명스러웠다. 태주의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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