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른 아침, 밤새 뒤척이며 잠 못 들던 차영의 눈이 번쩍 떠졌다. 휴대폰 알람을 맞춰 두고 잔 기억이 남아 있어서 확인해 보니 아직 일어나려고 생각했던 시간이 되기 한참 전이었다.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직장 동료들, 그리고 도윤의 메시지가 남아 있어서 일일이 다 답장을 했다. 그러고는 휴대폰에 저장된 제 어머니의 연락처 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침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한 해의 시작.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하는 오늘은, 차영과 어머니에게만큼은 1년 중 그 어느 날보다도 끔찍한 하루였다.
잡념을 떨쳐 내기 위해 몸을 일으킨 차영은 일단 거실 환기부터 했다. 한겨울이라 공기가 몹시 찼다. 온몸을 떨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테라스 밖으로 몸을 쭉 빼서 건물 외벽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시선을 더듬어 올라가면 꽤 까마득하게 멀고 높은 곳에 7층이 있었다.
다행히 하늘은 맑았다. 운항하기에 무리 없는 청명한 한겨울 푸른 창공이었다.
“일어난 거야, 만 거야.”
인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건물 외벽과 하늘을 번갈아 지켜보던 차영은 서둘러 창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노트북 화면과 연결된 텔레비전을 켜서 한국의 날씨를 비롯한 전 세계 주요 도시의 날씨들을 확인했다.
“베이징…….”
트랙 패드를 움직여 가면서 한국과 중국의 화면을 왔다 갔다 해 본 그는 베이징의 하늘도 특별히 기상 악화될 기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라야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온몸을 담그고 있자니 은근한 불 위에 올라가 끓는 듯한 기분과 함께 온갖 더러운 것들이 죄다 씻겨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간밤에 달라붙은 맨살 위 먼지 따위의 불순물처럼, 씻고 나면 머릿속에 든 지저분한 잡생각들도 씻겨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깨끗하게 씻고 나온 그는 거울 앞에 앉았다. 머리를 말리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퉁퉁 부어 있는 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좌우로 턱을 돌려 가며 얼굴 상태를 확인하던 차영은 지난밤 태주가 남기고 갔던 말을 떠올렸다.
한태주는 때론 무례하고, 대부분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게 홀린 사람처럼 상대의 동력에 기대어 딸려 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그를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요즘 들어 부쩍 잦아졌다.
〈내가 아침에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를게, 얼굴 보여 줘.〉
물론 그는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행동 패턴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이 말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차영은 조금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반드시 지키려고 들 때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대던 차영은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이스 팩을 꺼내 얼굴에 냉찜질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확인하니 아침 내내 그를 분주하게 만들고 있는 예의 주인공이었다.
“아침부터 한 기장이 나한테 웬 전화야?”
- 일어났어?
“잠든 사람이랑 통화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받았겠지.”
- 벽두부터 퉁명스럽네. 그래 봤자 나 상처 같은 거 안 받아.
“네, 대단하시네요.”
대답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휴대폰이 진동했을 때의 몇 배는 놀란 차영이 황급히 뛰어가 인터폰을 확인했다. 네모난 화면에는 상대의 얼굴이 아닌 각진 어깨 위의 금색 견장만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근거만으로도 차영은 오전부터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태주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있는 모양인지 각이 잘 잡힌 제복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태주의 상반신이 차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선이 우아한 입술이 달싹이면서 ‘이차영’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보였다.
홀린 듯이 그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데 일순 늘씬한 콧대 위에 자리 잡은 날카로운 눈매가 화면 너머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해 가슴이 철렁했다.
당황한 차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뒤늦게 문을 열어 주려 인터폰 버튼에 손을 뻗었으나 연신 더듬거리는 바람에 잘 눌리지 않았다. 그를 더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직접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이미 출근할 준비를 모두 마친 태주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차영과 마주서자마자 희미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뭐야.”
“뭐, 뭐가?”
태주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은 차영의 손에 쥐어진 아이스 팩이었다. 황급히 현관의 신발장에 대충 치우긴 했으나 숨기기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차영이 가장 잘 알았다.
“아, 저거는 그냥…….”
“밤에 뭐 먹고 잤어?”
“한 기장이랑 밥 먹었잖아.”
“원래 잘 붓나 보지? 별게 다 귀엽네.”
“아니거든. 그냥 신년 되면 내가 컨디션이 좀…….”
“새해 왔는데 왜. 새 나라의 어린이가 아닌가 보지?”
왜 자신은 종종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해서 대답하기 싫은 질문들을 듣는지 모르겠다. 내심 난감해하던 차영은 애써 말을 돌렸다.
“어, 아니야. 한 기장 캐리어는? 안 가져가?”
“차에 싣고 다시 올라왔어.”
“왜?”
“얼굴에 얼음찜질하는 너 보러.”
“이거 진짜 그냥 한 거거든. 심심하기도 하고…….”
심심하단 말은 괜히 했다. 앞의 주장까지 힘을 잃게 만들었다. 차영이 살짝 고개를 돌려 자책하듯 미간을 구기고 있는데, 태주가 웃음기 하나 없는 음성으로 아주 진지하게 대꾸했다.
“누가 뭐래? 열심히 해.”
“아침은…… 안 먹고 가?”
“대충 때웠어. 너 진짜 일어나 있네. 쉰다고 해서 늦잠 잘 줄 알았는데.”
“그냥 눈이 떠졌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도. 너 보고 싶어서 금방 눈 떠지더라.”
“아, 왜 그래 진짜. 적응 안 되게.”
그리고 차영의 이 대답을 끝으로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태주가 빤히 차영을 지켜보고 있어서, 시선을 받아 내기 바쁜 차영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게 현관문을 하나 사이에 둔 채로 두 사람은 잠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차영의 얼굴을 훑고 있는 태주의 눈동자는 아주 집요했다. 꼭 하나하나 오밀조밀한 얼굴의 구석구석을 전부 눈에 담고, 머릿속에 새기겠다는 양 시선의 탐색이 끈질겼다.
그가 이렇게 나오면 차영은 당연히 불편해졌다.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오묘한 눈빛과 묘하게 달떠 있는 그들 사이의 공기는 탑에서 첫 상견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경험한 것인데도 차영에게 매우 낯선 기분을 몰고 왔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태주가 눈을 뜬 뒤부터의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차영은 왠지 그에게 제 모든 행동거지를 읽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할 말? 딱히 없어, 그냥 출발하기 전에 얼굴 보려고 온 거야. 눈에 좀 담고 가야, 더 선명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특별한 용건 없으면 그만 쳐다봐. 한 기장 지금 눈빛이 좀 거북해.”
“거북?”
“불손해.”
“어디가.”
자자고 하는 것 같다니까…….
“그냥 좀…… 부끄럽고 창피하게 만들어. 옷도 다 입고 있는데.”
“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 이렇게 쳐다봤어. 갑자기 의식하고 있는 건 너지.”
갑자기가 아니니까 문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셈이 되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신경은 쓰이나 보지?”
저렇게 야릇하게 쳐다보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차영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아주 어렵사리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별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는 색이 짙었다.
“이거 원래 어제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못 물어봤어. 너 비행기 무섭다고 했지. 해외 나가 본 적 있어?”
“어차피 하루걸러 하루 국경 넘으시는 분은 이해 못 할걸.”
“놀리는 거 아냐. 사실 관계 묻는 거야.”
어투도, 표정도 너무 진지해서 차영도 자연스럽게 그와 보폭을 맞추게 됐다.
“엄마 말론 아주 어릴 때 몇 번 해외에 다닌 적 있다는데 나한테 기억이 없어.”
“앞으로 여행지마다 마그넷 하나씩 사서 가져다줄게. 그런 거 자꾸 보다 보면 너도 다시 비행하고 싶어질지도 모르잖아.”
“마그넷?”
“실은 지난 비행에 파리 갔을 때 선물할까 싶어서 사 왔었는데 네가 웬 여자랑 있는 거 보고 열받아서 홧김에…….”
거기까지 들은 차영은 발끈했다.
“설마 버렸어? 나 주려고 사 왔으면 그 순간부터 내 건데 왜 한 기장 마음대로 버려, 그걸.”
“다시 사 오면 야심한 밤에 전화해도 받아 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