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어쨌든 그래서 비행기 경로를 다룰 수 있는 관제사가 됐어. 항공기는 아직 무섭지만 내가 그걸 통제하는 통쾌한 기분이 들어.”
“주안점이 꽤 흥미롭네.”
“그러는 그쪽은 왜 조종사가 됐는데?”
“나? 시력이 좋아서.”
청력이 좋다고 응답했을 때처럼 가볍게 넘기는 대답은 진의 여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심인가 싶다가 또 어느 순간 농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차영은 그를 좀체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기장 공사 출신 아니라고 했었나? 소문으로 대충 듣긴 했는데. 맞아?”
“응, 나 외국에서 자랐어. 원랜 다른 항공사에 있었는데 한국 항공에 스카우트된 거야. 그다음엔 너도 대강 알다시피 특채로 입사했고. 덕분에 눈총도 많이 받았어. 또 궁금한 거 있어? 없으면 내가 하나 더 물어보고.”
차영은 기꺼이 해 보라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이차영.”
“관제하는 입주민 아니고?”
농담하듯 대꾸했으나 태주는 웬일로 아주 진지하게 반응했다.
“나 지금 이차영한테 묻는 거야. 제대로 뭐라도 시작해 보기도 전에 나 혼자 오해하고, 속으로 계산기 두드리고, 지레 포기하고 그런 거 뭔가 치졸하고 싫어서. 네 답변에 따라 나도 움직일 거니까 신중하게 잘 대답해. 참고로 넌 적당히 거짓말을 할 권리도 있어.”
“서두가 왜 이렇게 길고 장황해. 질문이 뭔데?”
“나 며칠 전에 공항에서 너 봤어. 환승 구역에서 어떤 여자랑 희희낙락하고 있던데. 머리 이렇게 묶고, 한국 항공 제복 입은 객실 승무원. 나도 낯이 익었어.”
아마 도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공항에서 승무원 제복을 입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면 그건 열이면 열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그냥 잡담을 했을 뿐이다.
“희희낙락?”
“안 했어?”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아니시다?”
“그냥 대화한 거야. 봤으면 알은척을 하지.”
“걔 네 여자 친구야?”
“무슨 소리야! 그냥 친한 친구야. 걘 결혼할 남자 친구도 있어. 이 얘기 들으면 기함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 높여 발끈해 놓고 차영은 다소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물론 사실이 아니니 아니라고 부정하는 게 맞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부인할 건 없지 않나 싶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창피한 시기가 지나고 나니 태주가 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하는지가 아주, 대단히 궁금해졌다. 고맙게도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지금은 너한테 사귀는 사람 없는 거지?”
“그게 댁이랑 무슨 상관이신데?”
“없으면 됐어.”
“없다고 안 했어. 그리고 뭐가 됐는데?”
“뭐가 됐을 것 같은데?”
태주가 빤히 눈을 마주쳐 왔다. 피하려고 했으나 그럴 타이밍을 놓친 차영이 속수무책으로 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얼굴이 홧홧한 게 또 분명 붉어졌을 것 같았다. 차영은 연애 사업에 적극적이지 않을 뿐 연애 세포에 둔감하진 않았다. 그의 문제 출제 의도는 이미 파악했다.
“있어, 없어. 너 관제사잖아. 정확히 관제 사인 줘. 활주로에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야 나도 이착륙 경로를 짜고 접근등 찾을 거 아냐.”
“…….”
“그리고 분명히 언급했다시피 너한텐 회피성 거짓말을 할 권리도 있어.”
“……없어, 사귀는 사람.”
탐색하듯 차영을 살피던 태주는 우물쭈물하다 힘겹게 답변하는 그를 보며 귀엽다는 양 픽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그거면. 설거지 도와줘?”
“나야말로 됐어. 어디에 뭐 놔야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얼쩡거리면 방해만 돼.”
“나도 초대받은 김에 예의상 한번 물어봤어. 원래 설거지 안 하거든. 손에 음식물 닿는 기분 싫더라.”
어이없어하는 듯한 시선이 태주의 뻔뻔한 얼굴 위에 꽂혔다. 그사이 태주가 몸을 일으켜서 차영이 앉은 맞은편으로 제 상체를 숙였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차영이 제 입술 위에 두 손바닥을 겹쳐 방어막 치듯 막아 내자, 태주가 방향을 선회하기는커녕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당황한 차영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은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빠르게 치달리는 그의 항로를 도저히 발맞춰 따를 수가 없었다. 관제에선 이런 제멋대로인 비행기가 있으면 큰 난항이다. 성급하고, 변칙적이고, 전문가의 관제를 따르지도 않는다.
“한 기장 여기 오기 전에 혹시 술 마셨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갑자기 왜 이래?”
“넌 모르겠지만 난 갑자기 아닌데.”
“내가 몰랐으니까 갑자기가 맞는 거지. 그리고 한태주 씨 게이 아니라면서?”
“넌 사귀는 사람 없다면서.”
“그건 거짓말을 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 첫 만남도 영 아니올시다였는데 좀 성급하고 빠른 거 아닌가? 그쪽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모르겠고, 나 초보라 속도도 못 맞춰.”
“뭐가 빨라. 아직 못 했어. 네가 막았잖아. 키스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조금 전 태주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내려다보던 차영은 황급히 등 뒤로 손을 치워 냈다. 태주는 흥미로워하는 시선으로 그런 차영을 내려다보다가, 의자를 뒤로 뺐다.
“저녁 잘 먹었어.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내일 비행이 있어서 자 둬야 돼. 아……. 오늘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혼자 있기 싫었거든. 사실은 오늘이 귀한 날이 아니고 슬픈 날이라.”
“내가 맞았던 거네? 무슨 날인지 물어보면 싫지? 그런 거 싫어한다며.”
“생일이야.”
“…….”
“태어나서 아무도 진심으로 축하해 준 적 없던 생일.”
눈빛이 흔들리지도, 표정이 변하지도 않았으나 차영은 태주가 그 말을 하기까지 꽤 힘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유는 모르지만 느낌이 그랬다. 어느 틈에 그가 여전히 멍하게 앉아 있는 차영을 뒤로하고 금세 나가 버리기에, 뒤늦게 차영도 그를 따라나섰다.
주방에서 현관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태주가 신고 왔던 스니커즈를 꿰어 신고 나가려고 하자, 차영이 서둘러 붙잡았다. 다행히 그는 전처럼 자신의 손길을 우악스럽게 쳐 내지 않았다. 다만 막상 옷자락을 손에 쥐고 보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그런 차영을 보는가 싶던 태주는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굳어 있는 얼굴 앞에 손바닥을 휙 휘저어 보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차영이 그의 손을 야멸치게 쳐 냈다.
“내일 비행이나 잘해.”
“왜 남 일 이야기하듯 해. 네가 관제 안 해?”
“몇 시 비행긴데?”
“오후 2시. 베이징.”
“낮에 바로? 한 기장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지난 비행에서 체류 기간이 예정보다 좀 길었어. 원래 이쯤 가는 일정이 맞아.”
파리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는 또 멀리 국경의 선을 넘어간다.
“기장들은 남들 다 쉬는 날 제일 바쁘구나. 나는 연말부터 안 쉬고 일해서 내일은 쉬어. 신년이기도 하고. 따로 볼일도 있고.”
태주가 문득 차영의 깊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열린 건 한참 뒤였다.
“그러면 내가 아침에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를게, 얼굴 보여 줘.”
“무슨 얼굴을…… 보여 달래. 아침부터.”
“이번에 2박 3일 일정이거든. 가면 최소한 이틀은 못 보잖아. 새해인데 인사는 해야지.”
“뭘 2, 3일 가지고. 우리 얼굴 자주 보는 사이 전혀 아니었거든?”
“너 낯설고 창피해서 자꾸 뻗대지? 원래 처음엔 다 서먹서먹해. 만나는 횟수 늘리다 보면 금세 적응해서 익숙해질 거야.”
장난스럽게 입술을 가리키는 손길은 조금 전 일어난 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느물거리는 표정을 보아하니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익숙해지면 뭐, 어쩌게.”
“그러다가 사귀자.”
“…….”
“내가 뻔뻔해. 난 창피한 것도 없고 지치지도 않을 거니까 넌 계속 틱틱대도 돼. 간다.”
금세 진지해진 그 때문에 차영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최후의 방어수단으로 그를 억지로 밖에 내보낸 차영은 문을 닫고 도망치듯 주방으로 되돌아왔다.
헛기침이 자꾸 새어 나와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힘겹게 식탁 앞에 앉은 그는 좁은 식탁 위를 둘러보았다. 음식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다. 다른 찬들은 다 한 번씩 입에 댄 태주가 미역국만큼은 입에도 대지 않은 듯, 처음 펐을 때와 똑같은 양이 남겨진 채였다.
〈생일이야. 태어나서 아무도 진심으로 축하해 준 적 없던 생일.〉
아까 벤치에는 장례라도 치르고 온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어 놓고, 진짜 생일이 맞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무슨 사연이길래 아무도 진심으로 축하해 준 적 없다고 확정 짓듯 말하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사귀자.〉
태주가 남기고 간 나지막하고 단호한 음성을 떠올리며 문득 제 손등을 내려다보던 차영은, 그 위에 무척 조심스럽게 제 입술을 겹쳤다.
그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할세라 서둘러 떼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