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차영의 집은 본인을 닮았다. 한눈에 보면 꽤 단조롭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가구들도 꼭 필요한 것들만 적당한 자리에 위치해 있었고, 거실 한편을 가득 채운 책장은 운항과 관련된 서적들로 빼곡했다. 두꺼운 두께의 책들 앞에 한두 개씩 놓여 있는 작은 모형들은 항공기와 열기구들이었다.
“찰스 린드버그 나셨네.”
열기구 미니어처의 동그란 상단부를 만져 보던 태주는 귀엽다는 양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책장 하단에는 영화 DVD들도 몇 개 꽂혀 있었다. 역시 서적들처럼 비행과 관련된 영화들이 대다수였다. 「탑 건」, 「패신저 57」, 「콘 에어」 같은 옛날 영화들이었는데 이 낡은 취향들만으로도 다소 아날로그 인간형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허리를 세운 태주는 파란색 항공기 모형 뒤에 꽂혀 있는 익숙한 제목의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이었다. 그걸 쳐다보고 있는 태주의 눈가가 조금 어두워졌다. 생각이 많은 얼굴로 책 표지를 보고 있던 그의 귀에 차영의 음성이 총알처럼 꽂혔다.
“한 기장! 이제 와도 돼.”
주방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10여 분 전, 자신이 차영의 전화를 받고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는 저 안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거실까지 풍기는 것으로 미루어 음식들을 차리는 듯했다. 태주가 그 안으로 들어가니 간단하게 차린 식사와 함께 정중앙에 동그란 케이크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웬 케이크?”
“생일 아냐? 귀한 날.”
태주는 잠시 차영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생일도 맞고, 그걸 자신의 입으로 귀하다고 표현했던 것도 맞지만 선뜻 인정할 마음이 안 생겼다. 그런다면 착한 차영이 진심으로 축하해 줄 것 같아서였다. 그다지 축복받을 만한 날은 못 됐다. 같은 날 어머니를 잃었으니 도리어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누군가들에겐 사과를 해야 마땅한 날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태주가 고개를 저었다.
“나 이런 단거 안 먹어.”
“기껏 문 닫기 직전인 빵집 셔터 열어 달라고 해서 사 왔더니. 됐어, 관둬.”
차영이 툴툴대는 모습을 귀엽다는 양 쳐다보고 있던 태주가 포크를 슬쩍 내밀었다.
“네가 먹는 거 보여 줘.”
“됐다니까.”
“그러면 네가 날 먹여 줘.”
“미친 거 아냐?”
아예 크림까지 위에 얹어서 다시 내미는 통에 차영이 소스라쳤다.
지켜본 바로 태주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그의 이런 태도들은 차영으로 하여금 진심인지 장난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더 헷갈리고 골치 아프게 몰아붙이려는 셈인지 심각하게 포크를 들이밀던 그가 일순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한 기장 그렇게 웃을 줄도 알아?”
“평소엔 잘 안 웃는 편이긴 해.”
“그런데 왜 그렇게…….”
“너 귀여워서.”
그 말에 차영이 질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는 진짜 또라이야. 꺼지라고 난리 칠 땐 언제고.”
“그건 적당히 좀 잊어라. 자그마치 몇 주 전 이야기를.”
“그 천인공노할 싸가지를 어떻게 까먹어.”
“뭐 그건 그렇지.”
태주가 굳이 부인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그는 아무래도 차영으로부터 되돌아오는 모든 반응을 재미있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생일로 추측이 되는 오늘 기분이 좋아 보여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영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의 기분을 걱정하고 염려하는지가 괜히 분한 마음에 케이크를 치우려고 손을 뻗었다. 동시에 태주가 손 위를 제 것으로 덮어 막았다.
“놔둬. 구경하게.”
“생일 맞아?”
“글쎄.”
“본인 생일에도 ‘글쎄’ 같은 대답을 하는 미스터리 한 인간이 내 앞에 있네.”
“관제 네 생일은 언젠데.”
대꾸할 말을 고민하던 차영이 태주처럼 모호한 태도로 응답했다. 솔직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나, 왠지 그와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앞서 나가고 싶지 않았고, 또 혼자 뒤처지고 싶은 생각 역시 추호도 없었다. 이미 그를 일방적으로 매일같이 생각하고 있어서 최소한 보폭이 맞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차영은 자꾸만 제 일상을 파고드는 그가 슬슬 두려웠다. 자신의 안에서 뭔가를 크게 변화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어떤 의미에선 공포였다.
“난 지난 지 얼마 안 됐어.”
“그러니까 언젠데.”
“늦여름, 아니면 초가을. 요샌 우리나라도 말만 사계절이지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어서.”
“정확히 며칠인데?”
태주가 집요하게 물어 왔다.
“나도 글쎄. 안 알려 줘. 원래 인생 공짜 없고 하나 줘야 하나 받아 가는 거 몰라?”
다시 케이크를 치우려고 어설프게 일어서니 이번에도 태주가 막아 냈다. 그러고는 플라스틱 칼로 푹신한 시트 한 귀퉁이를 길게 잘라 한 입 베어 물었다. 미간을 설핏 구기는 폼이 이런 당도 높은 음식을 정말로 안 좋아하는 게 맞아 보였다. 묘하게 쌤통이라는 기색으로 그를 보던 차영은 케이크 치우기를 관두고 그의 앞에 앉았다.
한참 우물거리던 태주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차영에게 물었다.
“넌 원래 이런 걸 돈 주고 사 먹냐?”
“맛만 있던데.”
“자, 나 이거 먹었어. 네 말에 의하면 하나 줬으니까 하나 받아야지. 몇 살인지 알려 줘.”
“남이 사 온 거 겨우 한 입 먹어 놓고 유세는. 싫어.”
이 대답을 듣고 플라스틱 칼을 내려놓은 태주가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어 팔짱을 척 꼈다. 불만스러운 시선이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차영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골고루 훑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 때문에 차영의 하얀 얼굴이 서서히 붉은색을 띠어 갔다.
“진짜 그렇게 보는 거 싫더라.”
차영이 그의 눈길을 비스듬히 피하며 궁싯댔다. 살짝 고개를 돌린 바람에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태주의 눈에도 잘 보였다. 순간 그는 차영이 왜 저렇게 동요하고 있는지를 제멋대로 상상하다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뭐 어떻게 봤는데. 또 꼬시데?”
“비슷한데 미세하게 좀 달라.”
꼭 은연중에 같이 자자고 하는 것 같다.
그걸 말로 그에게 전하는 건 차영에게 이성이 존재하는 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성에 차는 답은 아니었으나, 태주 역시 차영이 이 이상 구체적으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을 직감한 것 같았다. 시간을 경제적으로 쓰기로 결정한 모양인지 장외로 잠깐 빠져 있던 그가 능숙하게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왜 안 말해 줘, 휴대폰 번호도 교환하고 내가 너희 집에도 들어왔는데. 이 정도 친해졌으면 피차 나이 정도는 알아야지.”
“갑자기 너무 많이 알면 다쳐.”
“너 나보다 어리구나.”
정곡을 찔린 차영은 할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차영의 의도를 이미 아는 듯 태주가 웃었다.
“구체적으로 몇 살이나 어린데?”
“이 음식들도 먹어 봐. 맛이 걱정되면 안 그래도 돼.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서 가져다주신 거거든. 난 굽고 데우기만 했어.”
“어설프게 잘 피해 가네. 노력은 가상하다.”
“안 먹어? 마침 미역국도 있어서 데웠어.”
“너 성격 되게 이상하다. 나 뭐 예쁘다고 잘해 줘?”
입술을 달싹이던 차영이 그의 질문을 듣고 겨우 다시 눈을 마주쳤다. 차영은 잠시간 솔직하게 말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듯하다가 어렵사리 제 입을 벌렸다.
“아까 나 기다릴 때 한 기장 눈이 너무 슬퍼 보여서.”
“…….”
“너 가끔 그런 눈으로 나 보는데. 나는 그게 너무……. 좀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오늘 같은 날 선택한 게 자신이라는 점이 이상하게 기뻤다. 물론 차영은 뒷말은 제 안에만 묻어 두었다.
그들은 물끄러미 서로를 쳐다보았다. 붉은 전등을 켜 놓은 것도 아닌데 환한 조명 아래에서도 분위기가 무척 오묘했다. 적막이 흘렀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차영이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태주가 그의 역할을 대신했다.
“너 기다린 거 아니라니까. 자의식 과잉이야.”
그러고는 수저를 들어 느긋하게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반찬이 태주의 입에도 맞는 듯 밥공기를 충실하게 비웠다. 한 절반쯤 줄었을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태주가 차영의 내부를 파고들어 왔다.
“왜 관제사가 됐어?”
이 식탁 앞에서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이다. 같은 물음을 들었을 때 직장 동료들 앞에서 적당히 둘러댔을 때와 달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주의 앞에선 대답을 아주 진지하게 숙고하게 됐다.
“원랜 파일럿이 되고 싶었어.”
물을 마시던 태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한 기장처럼 승객과 승무원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조종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게 되고 싶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 정도 때만 해도 파일럿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강하게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하나씩 알아 갈수록 거대한 비행기가 점점 무섭게 느껴지더라. 그게 점점 더 무게를 쌓아 가다 보니까……. 이제는 무서워서 탈 엄두도 못 내.”
“무슨 현실?”
“그건……. 그냥 가정사야. 말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