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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8화 (18/144)

18화

커다란 모니터 위에 뜬 비행기의 항로를 눈으로 훑어보고 관제 순서에 따라 제일 먼저 착륙시켜야 하는 것들부터 동료들과 협의해 순서를 매겼다. 항공사 기장들의 크고 작은 민원도 관제사들이 해결해야 하는 주요 업무였다.

「여기는 타워, 한국 항공 982. 현재 활주로에 견인차와 소방차 함께 진입해 있어 착륙 불가합니다.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도대체 문제가 뭡니까.」

「엔진이 고장 난 항공기 때문입니다. 견인이 끝나는 대로 착륙 명령 내리겠습니다.」

- 「다른 활주로는요. 열어 주실 수 없습니까?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 비행기 벌써 15분째 착륙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최저 연료 항공기 우선 착륙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양해 바랍니다.」

- 「일단 알겠습니다.」

침착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던 차영은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으로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어두움이 내린 활주로에 항공기가 착륙하는 모습을 보면서 손가락으로는 그를 보지 못한 날짜를 세어 봤다. 어제 도윤에게 반찬을 전해 주러 갔을 때, 그녀를 통해 한태주가 어제 비행기 편으로 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최소한 그 이튿날은 비행이 없을 터다.

그리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는 성격이라고 해도 오늘 같은 날 하루 정도는 누군가와 만나 따뜻함을 나눌 것이다.

까다롭고 방어적인 그가 선택한 사람은 누구일까.

눈앞에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 태주의 얼굴을 황급히 지운 그는 터미널에서 관제해 올려 보내는 비행기들의 운행표들을 보며 하늘의 동선을 눈으로 열심히 짰다. 모니터상에 빼곡하게 떠 있던 항공기 표식들이 직원들이 합심해 착륙시키면서 하나씩 지워져 가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국 항공 982. 기체 하강해서 33번 우측 활주로로 접근하세요. 동 활주로에서 착륙을 허가합니다.」

- 「알겠습니다.」

「곧 새해네요. 복 많이 받으세요.」

“이차영 연말에 이틀 내내 고생한다.”

차영의 뒤에서 탑장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를 격려했다. 연말에 하루도 쉬지 못하고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야근하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은 듯했다. 차영은 별말씀을 다 하신다는 양 어깨만 으쓱했다.

* * *

하루가 너무 길었다. 연말연시에는 명절만큼 공항도 바빠서, 관제사들의 피로도 함께 누적됐다. 지친 차영은 겨우 차를 주차하고 숨을 골랐다. 옆자리에 태주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시간을 보니 10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그의 차가 이곳에 있다는 게 한태주가 집에 있다는 동의어는 아니었다. 술을 마시기 위해 차를 놓고 갔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이것 외에 다른 차들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뭔가 혼자 기대하고, 맥도 함께 빠진 기분이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사기 위해 차에서 빠져나와 도보를 걷고 있는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한태주였다.

그는 벤치 등받이에 팔을 척 올리고, 다리마저 건방지게 꼰 채로 차영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니 차영의 인체 반응이 매우 뻣뻣해졌다.

반사적으로 멈춰 선 차영은 그의 늘씬하고 기다란 다리부터 서서히 시선을 끌어 올렸다. 재질이 좋은 두툼한 코트를 거쳐, 울대뼈가 도드라진 관능적인 목선을 스쳐 지났다. 이윽고 언제 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미려한 하관과 잘 깎아 놓은 듯한 콧대를 지나니 마침내 깊은 눈동자가 들여다보였다. 이제 보니 그의 표정이 꽤 어두웠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어딘지 초월한 듯한 그의 나른한 눈빛 끄트머리가 차영의 얼굴 위에서 맴돌았다.

“관제.”

그가 자신을 호명하자 당황한 차영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몇 발자국 걷다 잇새를 살짝 씹고는 움직임을 중단했다. 그러고는 뒤돌아 저벅저벅 걸어 태주의 앞으로 가 섰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넌 왜 사람을 봤는데 모르는 척을 하냐?”

“다시 왔잖아.”

“무시하고 가려다가 내가 불러서 온 거잖아.”

“결과가 중요하지. 날도 추운데 여기서 뭐 해.”

“너 오랜만에 본다. 한 열흘 만인가?”

“그러게. 그 정도 됐나.”

정확히 말하면 2주가 넘게 지났다. 하지만 차영은 굳이 그의 말 속 오류를 고쳐 주진 않았다. 그걸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왠지 지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그렇게 오래 대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도 않냐?”

이미 파리에 다녀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영은 하는 수 없이 알면서 묻는 능청을 부리게 됐다. 여태까지 살면서 그다지 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한 기장 이번엔 어디 다녀왔는데?”

“파리.”

“좋았어?”

“뭐 똑같지.”

“왜 다들 그렇게 말하나 몰라?”

“다들? 네 표본은 나 말고 또 누가 있는데.”

태주의 음성이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차영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공기와 함께 덧대어진 침묵이 잠시간 맴돌았다. 다시 말문을 연 것은 태주였다.

“넌 한 해 마지막 날 밤에 약속도 없어?”

“사돈 남 말 하고 계시네. 한 기장 혹시 나 기다린 거야?”

“와, 너 기다렸을 것 같아? 너 생각보다 굉장히 자신감 있다. 겸손한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이 추운 날 집 놔두고 여기서 그러면 뭘 한 건데.”

“사람 구경?”

“웃기고 있네. 사람 구경 계속하셔 그럼.”

이번엔 진짜로 차영이 그를 무시하고 가려 했다. 그러나 또 그의 목소리에 붙잡혔다.

“휴대폰 번호 좀 알려 줘.”

등에 꽂힌 말들은 다소 의외였다. 차영이 어설프게 몸을 돌려 후면을 응시하자, 그가 휴대폰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찰나간 번호를 줄까 말까 고민하던 차영은 그에게로 접근했다. 제 번호를 꾹꾹 눌러 찍어 주고, 통화 버튼을 눌러 고스란히 제게도 연락이 오도록 했다.

그 신중한 모습을 태주는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태주의 눈길이 뺨에 닿았을 때 그 온도가 묘하게 애틋하게 느껴졌다. 괜한 착각일까 봐, 그 순간 차영은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했다.

이윽고 다시 서로의 휴대폰을 교환하고 각자 이름을 저장했다. 묘하게 더딘 차영에 비해 태주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나 뭐라고 저장했어?”

“그러는 한 기장은 나 뭐라고 저장했는데. 관제? 동네 주민? 입주민? 편의점? 뭐 누르는 게 되게 짧던데?”

“글쎄.”

“등가 교환의 법칙 몰라? 나도 안 알려 줘.”

“상관없어. 너 같은 FM들 굳이 안 봐도 뻔하지. 한국 항공 기장, 한태주. 관등 성명.”

차영은 무심코 자신이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 그의 말 그대로여서 약간 아연해졌다. 그를 흘기듯이 쳐다보니 태주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술 한잔할래?”

편의점을 힐끗 가리키며 하는 말에, 차영은 쉽게 그러마고 답해 주지 않았다.

“또? 한태주 씨 술꾼이신가 봐요.”

“아냐, 난 술 별로야. 그냥 내가 오늘은 막 다루면 안 되는 귀한 날이라, 태도가 정중한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무슨 귀한 날?”

“글쎄, 무슨 날일까.”

“뭐만 물어보면 맨날 글쎄, 글쎄. 정확하게 답안지를 제출해야지. 너 빵점이야.”

그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차영은 벤치에 앉아 있는 상태여서 자신보다 눈높이가 꽤 낮은 태주를 한참 바라보았다. 낯선 구도여서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귀한 날. 쉽게 쓰는 단어는 아니다. 한태주와 같은 무신경한 사람들이 쓸 법한 형용사도 아니었다. 생일인가. 아니면 한국 항공에 입사한 날? 가장 사랑했던 여자 친구랑 헤어진 날?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오만 상상이 다 들었다. 한태주의 모호한 표정은 귀하다기보다는 슬픈 날이라고 말하고 있어서였다. 자꾸 그의 얼굴 표정을 분석하고 기분을 살피게 됐다.

편의점 방향에 있는 상가들을 힐끗 쳐다본 차영이 다시금 태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기장, 내가 조금 이따가 전화할 테니까 그때 우리 집으로 내려와. 저기, 저 집.”

“이런 야심한 시각에 너희 집에 오라고? 내가 왜. 너 지금 나 꼬시는 거야? 나 혹시 콘돔 사 가야 돼?”

“내가 그거 하지 말라 그랬잖아.”

제집 창문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던 차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지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난폭하게 퍽, 쳤다. 살결이 닿았던 제 옷자락 위를 힐끗 내려다본 태주가 말을 아끼자 하는 수 없이 차영이 계속 이었다.

“오라면 오는 거지 말이 많아. 내려와.”

“아니, 넌 경계심이라는 게 없냐? 내가 너 덮치면 어쩌게? 아무나 막 집에 부르고 그래?”

“입만 열면 개소리야. 너 그쪽 취향이야? 아니라면서. 나도 아냐. 우린 술만 마실 거야.”

“술?”

“어, 술. 한잔하자며? 그러니까 빨리 올라가. 이 날씨에 나와 있는 사람 보고 있으니까 나까지 추워.”

다시 한번 뒤편 건물 2층 제집의 테라스를 분명하게 가리킨 차영은 태주를 두고 편의점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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