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창가에 대낮의 햇살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선명한 빛이 비치고 있는 식탁 위는 고요했다.
대낮에 모인 조촐한 세 가족은 별말 없이 조용히 식사했다. 태주와 그의 외조부모였다. 태주에게 가족이라곤 이 세상을 먼지 떨 듯 탈탈 털어 내도 눈앞의 두 사람뿐이었다.
그는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높이 올려놓은 실내 온도 때문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태주를 맞은편에 앉은 그의 외할머니가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그거 다 먹으면 네 엄마 보러 가자.”
“전 괜찮아요.”
“오랜만에 특별한 날이라서 왔잖아. 왔는데도 얼굴 안 보고 가면 섭섭해해.”
그가 승낙의 의미로 물을 마시자, 못마땅한 듯이 태주를 지켜보고 있던 그의 외할아버지가 입을 뗐다.
“명부전 올라가기 전에, 오늘 태주 네 생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부터 해 봐.”
갖고 싶은 것.
물론 오래전부터 간절했던 게 하나 있었지만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제게 그것을 줄 수 없었다.
“없어요. 따로 생일 챙긴 적 없는 거 아시잖아요.”
“정 오늘 기뻐하기가 불편하면 입양 절차 밟으면서 생년월일을 바꿔도 괜찮아.”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외할아버지를 어떻게 아버지라고 불러요.”
평생 태주에게 아버지는 문 회장이 죽게 만든 친부 한 사람뿐이었다. 그 생각은 공고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속하려면 외손자인 것보다 그게 편해.”
“일할 때 불편한 건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변호사들이겠죠. 하시려는 마음만 있으면 외할아버진 지금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어요. 명령만 하면 되니까.”
“태주야.”
“제가 한 씨인 게 싫으신 거 압니다. 꿈 깨세요. 다시 누구 아들이 될 생각 없습니다.”
타악!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은 문 회장이 노여움을 드러내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 동안 태주는 자신이 입에 단 한 숟가락도 대지 않은 식탁 위의 미역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제 남편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동시에 외할머니가 일어났다. 아마 한시라도 빨리 위층에 있는 명부전으로 올라가고 싶은 듯했다. 하는 수 없이 기척을 느낀 태주도 따라나섰다.
“다들 따라올 거 없어요. 태주랑 나랑 우리 둘이 갈게요.”
그녀는 수행 비서들을 전부 물리고 태주에게 제 한 몸을 의지했다. 태주가 그녀의 어깨를 부축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아주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붙잡은 손에는 뼈만이 앙상했다. 한눈에도 비슷한 나이 대의 노인들 평균 체중에 턱없이 미달할 것 같았다. 안색이 안 좋은 것은 당연했다. 안 실장의 말마따나 건강이 많이 상한 게 분명했다.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안 좋긴, 이렇게 늙는 거지.”
“주치의는 뭐래요.”
“아무 이상 없대. 날이 차서 그런가, 입맛이 없어서 그래. 걱정할 일 아니야.”
단지 노화로 인한 증상이라기엔 너무 급격하게 살이 내렸다. 더 물어보고 싶어 하는 태주를 그녀가 덤덤히 눈짓으로 막았다. 이런 반응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사항들은 아니었다. 다만 침묵하는 것이 그녀의 뜻인 듯해서 태주는 말을 아꼈다.
힘겹게 올라간 자택 2층의 명부전에 들어온 그들은 굳게 문을 닫았다. 아늑한 불빛이 넓은 공간을 따뜻하게 감쌌다. 명부전 벽면 정중앙에는 죽은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태주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영원히 늙지도, 변하지도 않는 나의 어머니.
이제 태주는 다 자라서 그녀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섭섭하니? 네 아버지 사진은 여기 없어서?”
“외할아버지 고집 아는데요, 뭐. 어차피 외할아버지한테 아버진 남이잖아요.”
“납골당은 다녀왔고?”
“신년에 가야죠.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 문제에 너무 신경 쓰시면 외할아버지 노하세요.”
“너한테 면목이 없다. 1년에 단 하루뿐인 생일인데 제대로 축하해 주지도 못하고.”
“무슨 말씀이세요. 전 괜찮아요. 외할머니 하실 만큼 하신 거 알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진 태주가 눈앞의 젊은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많이 닮은 어머니의 모습은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유일한 아들인데도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태주를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 반은 아버지의 손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머지 반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저 늘 저 사진 속의 모습을 보면서 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상상하는 데 그쳤다.
“네 엄마 볼 때마다, 우리 태주가 참 많이 쓸쓸해 보인다.”
아니라고는 못 했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일이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하다는 건 항상 아주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엔 태주의 뺨을 그녀가 나뭇가지처럼 바짝 마른 손으로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무덤덤하게 사진 속 어머니와 눈빛을 교환하고 있던 태주는 힘겹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난 뒤에 사고로 사망했다. 그러나 달력의 날짜상으로는 고작 며칠밖에 차이가 안 났다. 편의상, 또 심정상 두 사람의 기일을 한데 모아 추모했으면 좋겠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본가 내 명부전에 아버지의 사진을 놓기를 극구 반대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 식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유골함 쪽을 아버지가 있는 납골당에 옮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외할아버지의 대노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제 귀한 핏줄을 손이 쉽게 닿지 않는 곳에 방치해 둘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연애는 길었지만 신혼이 유독 짧았던 부부는 죽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각자의 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나저나 우리 태주 회사에서 구설수가 자꾸 들린다면서. 일부러 네 외할아버지한테 시위하려고 그러는 거니? 너 좀 잘라 달라고?”
어머니를 보고 고개를 숙여 마음속으로 추도하고 있던 그는 외할머니의 음성을 듣고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안 자르실 거 아니까요. 진짜 잘리면 어디 갈 데도 없어요.”
실제로도 자국 항공사에서 해고된 조종사를 써 줄 해외의 항공사 같은 건 없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안 실장이 재직 중인 항공사 측에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태주가 상황을 돌이킬 수도 없게 퇴사 과정이 모두 완료되어 있었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그가 한국 항공에서 일을 하느니 차라리 전부 때려치우겠다는 것을 그의 외할머니가 간곡하게 만류해서 한국에 머무르게 됐던 터였다. 자신이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고 부디 몇 년간만이라도 옆에 있어 주지 않겠느냐는 그녀의 부탁을 제 욕심만 채워 무시로 일관할 순 없었다.
“네가 한 서방 문제로 회장님 많이 원망하는 것도 알고, 내가 너한테 못할 짓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부담 줘서 미안해. 손자랑 같이 있고 싶은 노인네 노욕이라고 생각해 줘. 조금만 더. 응?”
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극구 거부하면 되는데 받아 준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제 뺨에 닿는 안쓰러워하는 시선을 느끼면서, 태주가 물 먹은 국화 한 송이를 어머니의 앞에 헌화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데면데면한 태주 대신, 인사는 그녀의 어머니인 외할머니가 대신했다.
“내년 한 해도 나은이 네가 우리 태주 잘 지켜 줘.”
그는 묵묵히 있다가, 제 한 몸조차 잘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부축해 명부전을 빠져나왔다.
* * *
관제탑의 직원들 몇몇이 모니터 하나의 앞에서 고개를 맞댔다. 해외 저가 항공사의 비행기 중 한 대에 엔진상 문제가 생겨 기내 화재가 이는 바람에 이곳 공항에 최우선 비상 착륙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 때문에 미리 착륙이 예정되어 있던 국내 도착 예정 비행기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순서가 밀려 하늘길에서 나란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대기 상태인 거 몇 대나 되냐?”
탑장이 심란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직원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현재 대기 중인 비행기 열아홉 대입니다.”
“벌써 열아홉 대나 돼? 지금부터 뒤에 더 올 거 아냐. 연말이라 가뜩이나 비행기 포화 상탠데 환장한다.”
“어떻게 할까요?”
“묘수 있나. 하나씩 차근차근히 내려야지 뭐.”
“조종사들 왜 착륙 안 시켜 주냐고 항의하고 난리 났어요, 벌써.”
“어쩌겠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자기들은 답답한 거 맞지. 최대한 동선 간단하게 짜서 빨리 내려 보자고. 이차영이, 너 하늘 지도 잘 보잖아. 그냥 가지 말고 여기 붙어. 퇴근은 텄다. 한 해 마지막 날 비상근무 하는 대신 신년에 너만 휴가 몰아 쓰게 해 줄게.”
안 그래도 이대로 퇴근을 해도 될까 고민하던 그가 지체 없이 장비들을 다시 챙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