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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6화 (16/144)

16화

조종간을 잡은 태주의 미간이 흠씬 구겨졌다. 구름을 지나치는 동안 기체가 들썩거렸다. 부기장에게는 기장을 보좌해야 한다는 아주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그러나 제 옆의 남자는 아까부터 같은 말을 수차례 반복하게 만들었다.

그는 구름을 완전히 벗어나 수평으로 비행할 때가 되어서야 오른편을 쏘아봤다. 시선 끝에 태주보다 열 살가량 많은 부기장이 앉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저 자리에 선재가 앉아 있어야만 했다. 열흘 전 처음 파리로 향할 때부터 갑자기 사람이 바뀌어 일정이 꼬이는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재 대신 급하게 파견된 권 부기장은 태주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시종일관 비협조적이었다. 그래도 장기간 비행이라 애써 꾹 눌러 참았던 게 패착이었는지도 몰랐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태주는 결국 폭발했다.

“단순히 성질을 긁고 싶은 겁니까, 아주 엿을 먹이고 싶은 겁니까. 노선 똑바로 하죠.”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모르면 머저리지.”

“말씀이 좀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지금 누가 더 지나친지 느낌이 안 와요? 대체 왜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만듭니까. 권 기장은 조종간 잡는 일이 장난 같아요? 비행만 만 시간 넘게 한 사람이 왜 지시 하나 따박따박 못 알아듣고…….”

차갑게 힐난하던 태주가 불현듯 말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특별히 호기심이 이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일이 거의 없어서 상대를 잘 쳐다보거나 관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비행 능력이 부족한 부기장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권 부기장의 살짝 상기된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조금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태주의 음성이 한껏 낮아졌다.

“권 기장 혹시 아까 자다 일어나서 술 마셨어요?”

“예?”

“나 그렇게 단순하게 되묻는 추임새 아주 싫어합니다. 다른 팀이 운행할 때, 술 마셨냐고.”

두 개 이상의 조로 운항을 할 때, 쉬는 타임의 조종사들은 객실에 앉아 있거나 기내의 승무원 휴게 공간인 벙커에서 휴식을 취한다. 태주는 비즈니스석에서 잠시 눈을 붙였고, 권 부기장은 벙커에서 몇 시간 잠들어 있다 나왔다.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권 부기장이 태주의 눈치를 살폈다. 여태까지는 짐작에 불과했으나, 그가 분위기를 읽어 내려 하는 모습을 보고 태주에게도 상대가 현행범이라는 확신이 섰다.

“대답 안 합니까?”

“샴페인 조금, 아주 조금이었습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정말 소량이었고, 굳이 보고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시려고 마신 게 아니라 음료인 줄 알고 우연히 마셨는데 하필 그게…….”

“그런 건 우연이 아니라 프로 의식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짜증스럽게 인터폰을 든 태주가 기내 사무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 네, 사무장입니다.

“칵핏입니다.”

- 뭐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후단 두 분 기장님 중 한 분 아무나 조종실로 오라고 하세요. 부기장석 교대해야 합니다.”

- 기장님 중 한 분을요?

“네, 지금 당장 부르세요.”

태주의 손에 들린 인터폰을 권 부기장이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태주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한 박자 앞서 남자의 팔을 제압했다.

“윽……. 한 기장님, 저 정말 멀쩡합니다.”

“그건 책임 기장인 내가 판단해. 난 술 마신 인간이랑은 비행 안 해.”

“한 기장님!”

“나가요.”

“…….”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내 눈앞에서 꺼져. 명령이야.”

마침 조종실 문을 열고 등장하는 다른 부기장을 보고 권 부기장은 부들부들 제 몸을 떨었다. 본인보다 한참은 어린 기장이 조종석에서 자신을 쫓아낸 이 굴욕적인 상황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태주는 단호했다. 사태가 변하지 않을 것을 파악한 권 부기장이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 나가 버렸다.

그리고 객실에서 졸다 나타난 다른 부기장이 식겁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그렇다고 뻣뻣하게 서 있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제 몸을 굽혔다.

“저……. 한 기장님. 전 어떡할까요?”

“뭐 합니까. 놀러 왔어요? 조종간 잡으세요.”

태주의 지시에 그제야 자리를 잡고 앉더니, 모니터를 확인하고 선글라스를 바르게 꼈다.

* * *

깊은 한숨이 태주의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항공기는 무사히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창밖 멀리 항공기 유도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옆의 조종석은 이미 비어 있었다. 덕분에 태주 혼자 남은 조종석 안은 적막했다.

가끔 승객들도, 옆자리의 부기장도 모두 내리고 사라진 이런 시간이 도래하면 태주는 온몸이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겁고, 참담했다.

눈을 감고 등을 기대어 잠시 쉬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사색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이 항공기를 타고 온 승무원이었다.

“한 기장님. 부기장님만 나오시는 것 같더니, 아직 안에 계셨네요. 지금 저희 청소해 주실 분들이 다 올라오셔 가지고요. 이만 자리 비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곧 일어날 거예요.”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던 승무원이 그를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기, 기장님. 권 기장님은…… 징계를 받게 되시는 건가요? 기장님이 상부에 보고하시면 규정대로 처벌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고하면 당연히 처벌받습니다. 권 기장은 조종석의 제일 중요한 원칙을 어겼습니다.”

“물론 그렇긴 한데 샴페인을 제가 거기다 둔 거라서……. 그분은 정말 음료인 줄 알고 목 축이려고 마시셨을 거예요. 아무래도 권 기장님은 책임 소재 덮어 두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전 마음이 영 불편해서 말씀드려요.”

그제야 제 짐을 챙기며 성의 없이 대꾸하던 태주가 뒤쪽의 승무원을 차갑게 쳐다봤다. 그가 그 시선을 받아 내곤 움찔했다. 그래도 이 순간이 아니면 말할 수 없다는 양 입매를 단단하게 굳히고 용기를 내 증언했다.

“권 기장님께서 원래 술에 많이 약하시다고 합니다. 어떻게 선처가 안 될까요?”

“누가 거기에 술을 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시는 순간 알았을 거예요. 정확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도 뱉는 대신 삼켰죠. 심지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본인이 지레 판단해 버리고 나한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본인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쪽이랑 권 기장이 징계를 같이 받으면 되겠네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같이 죽겠다는 거예요?”

“제가 한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거예요.”

“네, 아주 정의로운 태도네요. 그런데 징계는 정의가 내리는 게 아닙니다. 규칙이 내리는 거지. 아무튼 알았으니까 나가 보세요.”

“기장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저 혼자 받겠습니다.”

승무원을 직시하는 태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아, 이윽고 차분히 호흡한 태주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징계위 안 열립니다.”

“정말입니까?”

만일 이 문제를 상부에 보고한다면 외부에 알려지게 될 상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이 기사화라도 되는 날엔 한국 항공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큰 불안을 느낄 터다. 태주는 그것만큼은 원하지 않았다. 아까도 그런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일부러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네, 난 이런 걸 입 다물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인천까지 그 상태로 왔으면 징계위가 열렸을 거예요. 그걸 방지하려고 권 기장을 내보낸 겁니다. 안 열려요. 그러니까 가 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장님. 그리고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오늘 엄청 수고 많으셨어요.”

화색이 된 승무원이 거듭 인사를 하자, 태주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챙기다 만 가방을 다시 챙기고 하기하는데, 탑승교를 거쳐 나가다 보니 멀리 우뚝 솟아 있는 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태주는 현재 시각부터 확인했다. 차영의 퇴근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듯한 차영의 오밀조밀한 얼굴을 떠올리니 잠깐 보고 갈까 싶어졌다. 자신이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지도 무려 열흘 만이니까 말이다. 다만 그는 두 사람이 못 본 지가 이렇게 오래됐는지 어쨌는지 관심이나 가지려고 할지 모르겠다.

목덜미를 지압하듯 두드리며 걸어 나간 태주는 환승 구역 쪽을 지나쳤다. 그러고는 바깥의 날씨를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확인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거리는 꽤 멀었지만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이 음성은 제게 아주 인상 깊게 남아 있었으니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히 이차영이었다.

서둘러 걸은 태주의 시야에 환승 구역 자동문 앞에 서 있는 차영이 보였다. 아무리 같은 공항이라고 할지라도 관제탑에만 붙어 있는 직원들이 터미널 사무실도 아닌 이런 비행장 일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했다.

그가 반갑게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이차영! 시간 맞춰 왔네?”

그보다 한발 앞서 문을 열고 나타난 웬 승무원 한 사람이 차영의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척 꼈다. 제 눈의 시력이 아직 온전하다면 분명 한국 항공의 제복이었다.

여자는 차영과 나란히 걸으면서 장난스럽게 어깨에 손을 걸치기도 했다가, 몸을 기울이기도 했다가 친밀감을 표시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을 가리는 편인 차영이 그다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쇼핑백을 들고 있던 그가 여자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둘은 사이가 매우 가깝고, 또 좋아 보였다.

“이거 어머니 반찬이야?”

‘어머니?’

두 사람의 대화를 관찰하고 있는 태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족끼리 왕래를 하는 건가?

걷다가 멈춰 선 태주는 그들이 모퉁이를 도는 모습까지 눈에 담았다. 잠시 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운 곳에 자신이 몰고 온 비행기가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물체를 하나 꺼냈다. 파리의 도시를 형상화한 마그넷이었다.

“뭐 하냐, 혼자 들떠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 태주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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