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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5화 (15/144)

15화

“이차영, 오랜만이다.”

“어, 도윤아. 비행하고 오는 거야?”

“응, 이제 막 귀국했어.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해.”

“나 지금 밥 먹잖아.”

“먹는 게 아니고 밥알 세던데? 그냥 나와. 분위기 우중충하게 만들지 말고.”

탑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그에게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남녀상열지사에는 영 재능이 없어 보이는 차영이 언제 승무원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지 궁금한 것이다.

“그냥 친구예요.”

“당연히 그냥 친구겠지. 누가 뭐래?”

차영이 해명하며 일어서자 탑장이 흘려 넘겼다. 도윤은 웃으면서 차영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는 이 식당의 이곳저곳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차영을 이끌어 나간 정문 옆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중심으로 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들어올 때는 출입문 근방에 이런 게 있는지 전혀 보지도 못했다.

“밥 먹는 사람 왜 굳이 나오라고 했는데?”

“어깨가 축 늘어진 게 뒷모습마저 죽상이어서 구해 준 거다. 등짝에 수심이 가득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귀신이네.”

“너랑 나랑 한두 해 알아? 네 기분 파악 정도는 껌이다, 껌.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나 사는 거 맨날 똑같은 거 알면서. 이번엔 어디 다녀와?”

“호주.”

“또? 거긴 가면 뭐 해?”

“처음에나 재밌지. 몇 번 가면 할 것도 별로 없어. 똑같아. 골프 치고, 호텔에서 뒹굴고, 수영하고, 언니들이랑 쇼핑하고. 그 정도?”

“매번 노는 것도 피곤하겠다.”

“무슨 소리야. 노는 건 절대 피곤하지 않아. 그 시간에 일을 한다고 생각해 봐. 천국일걸?”

아주 쉬운 논리다. 이에 동의한다는 듯 차영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 참. 지난주 주말에 집에 엄마 왔다 가셨어. 너 반찬 갖다주래.”

“진짜? 여기까지 오셨으면 나 보고 가시지!”

“엄마 바쁘잖아. 안부 전해 주라셔. 반찬은 조만간 갖다줄게.”

“야, 너 이사한 지가 언젠데 집들이 안 해? 내가 찾으러 갈게.”

“나 안 해, 그런 거. 너 다음 비행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만나.”

“어우 정떨어져. 사생활 공개 좀 하면 어디 덧나니? 자기 거 공개가 싫으면 내 거 침범이라도 하라니까 얘는 안 지 10년이 지나도 내외야.”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양 어깨 주변을 탁탁 털어 내던 도윤이 이윽고 차영에게서 한 뼘 떨어져 앉았다. 차영의 이런 부분을 도윤은 늘 섭섭하게 여기지만, 그래도 그녀는 정말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대신 조용히 곁을 지켜 주곤 했다. 그건 아마 그들이 처음 친해지게 된 계기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 차영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던 적이 있었다. 당시 도윤은 같은 반 반장이었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위기에 처한 차영을 돕겠다고 나섰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한 친구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담은 한 마디도 나눠 본 적 없는 동급생일 뿐이었는데, 차영은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면 도윤을 떠올린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알 수 없었다. 처음에 얼굴을 붉혔던 한태주의 근황을 지금 자신이 내심, 아니, 매우 궁금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은 어때. 할 만해?”

잠시 내려앉아 있던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그녀가 먼저 박살 냈다.

“매일 하던 일인데 나야 똑같지.”

“이차영 너 참 독해. 긍정적이고. 그 꼴을 보고도 공항에서 일하고 싶니?”

“긍정적인 게 아니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포기가 빠른 거지.”

“그거나, 그거나. 이착륙하는 비행기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 많이 나겠다.”

“생각보다 안 그래. 탑 안은 완전히 정신없거든.”

그녀는 십분 동의한다는 양 끄덕끄덕했다.

“맞다. 그런데 너 지난번에 왜 한태주 기장 운항 스케줄 나한테 물어봤어? 그 이유 아직 대답 안 했어.”

“그거 그냥 지갑 찾아 주려고 그랬던 거야. 덕분에 잘 돌려줬어.”

“너 내가 이거 왜 묻는지 이해가 안 가? 궁극적으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거잖아. 지갑이 다가 아니지 않아? 저번에 한 기장 관제탑 가서 거기 뒤집어 놨다는 소문 있던데 그거 너 맞지? 내가 좀 마음에 걸려서 언니들한테 막 물어봤거든.”

차영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그날을 떠올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나한테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좋은 일도 아니고, 굳이 그녀에게 불편한 기분을 내색해 가며 그날 사건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한태주를 주제로 이야기할 만큼 그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한 면에서 집요한 도윤을 아는 차영으로선 그녀의 장단을 맞춰 주는 것 외엔 별다른 탈출구가 없었다.

“말하려고 했어.”

“거짓말. 내가 널 몰라? 어머니한테 다 이를 거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태주 기장 말이야. 도윤이 너도 같이 비행한 적 있어? 어때?”

주의를 돌리기 위해 차영이 기술을 걸었다. 다행히 그녀는 일부러 속아 주려는 모양인지 쉽게 모래 위에 넘어졌다.

“한 캡이랑? 당연히 있지. 이스탄불도 갔었고. 청두 갈 때도 한번 우리 팀이랑 탔고……. 꽤 돼. 비행 되게 부드럽게 잘해. 여러 기장들이랑 같이 타 보면 알잖아. 우리 가끔 그런 거 하거든, 운항 중에 밀서비스 할 때 트레이가 어떤 각도로 흔들리느냐……. 적란운 낀 거 아닌 이상 한 캡이 제일 깔끔해.”

거기까지는 익히 공항 전방위에서 들어온 이야기다.

“재수 없지 않아?”

“글쎄……. 솔직히 성격은 거지 같아도 잘생기고 일 잘해서 멀리서 보면 좋아.”

“백 미터 미남 같은 건가?”

“그건 얼굴은 별론데 몸이 예쁠 때 하는 소리지. 한태주는 둘 다 훌륭하거든. 그냥 나랑 사귈 것도 아니고 업무적으로만 부딪치는데 일에서 깐깐하니까 멀리서 보는 게 좋다고. 그리고 걔한테는 뭐랄까. 정말 승객들을 꼭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줘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게 느껴져. 그런데 이차영이 다른 사람한테 웬 관심? 어지간히 깨졌나 보지?”

“아냐, 그 정도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같은 건물 살더라. 가끔 마주쳐.”

“어머, 웬일이야. 둘이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여차저차해서 대충 풀었어.”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대충 푼 게 맞나? 차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마주쳤을 때 처음처럼 으르렁거리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풀린 것 같긴 하다고 쉽게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접근해 오는 것을 보면 성질 더러운 한태주에게 다행히 뒤끝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이 왜 그가 하는 막무가내들을 다 받아 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한태주랑 같은 데 산다고……. 이상하네. 걔 집 서울인데. 한 캡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처음엔 분명히 서울에서 출퇴근한다 그랬어.”

“그 사람도 이쪽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거 아닌가? 안 그래도 경비 아저씨가 거주인 명단에 한태주 없다 그랬거든. 그런데 우리 집 7층 살아. 온 지 얼마 안 됐나 봐.”

“하긴 그럴 수 있겠다. 그 동네 공항 공사 애들이랑 승무원들 엄청 많이 사니까. 가깝고, 출퇴근 편하고.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

“글쎄. 아닐 것 같은데.”

덤덤히 응답하는 그의 얼굴은 뭔가 석연치 않아 하는 표정을 담고 있었다.

“왜 표정이 그래?”

“아니,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뭔데. 뭐가 마음에 걸리는데.”

“한태주 기장 아무래도 부잣집 아들 같아.”

차영은 아주 진지했으나 도윤은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뭐라고. 내가 객실 퍼스트 담당이잖아. 기장 방송 나오면 우리 승객 중에 아아아주 가끔 한 캡을 아는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자세하겐 못 들었지만 한태주네 집 꽤 사는 거 맞는 것 같았어.”

그를 태우고 갔던 고급 세단과, 그 앞에 서 있던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왜 갑자기 차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떤 사람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외모만으로 판단하는 건 아주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차영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람의 얼굴에 본인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믿는 타입이었다. 그 냉혈한같이 보였던 남자의 이면에 어떤 따스함이 자리 잡고 있을지,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였으니 세대로는 자신들보다 윗대일 터다. 그가 한태주의 아버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차영이 괜히 자신이 앉은 난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도윤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뭔가 메시지 따위를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읽다가 얼굴을 찌푸리고, 또 갑자기 웃고 하는 모습이 다채로웠다.

“무슨 일 있어?”

“아, 이거 CA 라인이라고 사내 직원들 전용 메신전데. 사건 터지면 이 내부 메신저로 타임라인 뒤집어지거든. 오늘 홍콩 가는 비행기에 완전 진상 한 사람 탔나 봐. 취해 가지고 시트에 실례했대. 가끔 있어.”

직접 본 것도 아닌데 차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사람도 그런 거 해? 메신저 같은 거.”

“누구, 한 캡? 원래 목적은 이런 게 아니라 회사에서 실시간으로 직원들끼리 비행 스케줄 조정할 수 있도록 쓰게 강권했던 거니까 계정은 있겠지. 회사에서 만들어 주거든. 그런데 딱 봐도 걔는 이딴 거 안 쓸 거 같지 않냐?”

“절대 안 쓸 것 같아.”

“그런데 뭘 물어.”

“도윤이 넌 한 기장 연락처 모르지?”

“난 모르지만 내부 비상 연락망에 직원들 연락처 다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야. 알아다 줘? 그런데 같은 건물 산다면서 전화번호도 몰라?”

사실 그의 연락처가 궁금해서 별로 궁금하지 않은 화제로 운을 띄운 건 맞았다. 그러나 막상 그녀를 통해 전해 들을 일을 생각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잠시간 대답을 생각하는 표정이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됐어.”

“진짜 됐어? 통화해 보고 싶은 거 아냐? 안 그래도 한 캡 지금 파리 가 있는 것 같던데.”

“파리?”

“응. 몰랐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답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나왔다. 차영에겐 드문 일이었다. 일순 도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차영의 뺨을 스쳤다. 나란히 앉아 수 분간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짜 차영이 궁금했던 것들은 대체로 풀리지 않은 것이다. 때마침 차영을 구해 주기라도 할 셈인지 식당 안쪽에서 누군가 밖을 향해 노크했다. 도윤의 선배로 보이는 승무원이 안쪽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도윤이 네 식사 나왔나 보다. 다들 기다리겠어. 들어가자.”

“나 모레 비행 있어. 환승 구역에서 반찬 줘. 우리 이상하게 자주 못 본다. 가까운 데 있으니까 자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공항 부지가 총 몇 평인 줄은 아냐? 충분히 자주 보고 있어. 얼른 들어가.”

“참, 차영이 너 연말연시에 뭐 해? 원래 경사는 안 가도 조사는 꼭 가는 법이야. 신년회는 못 해도 송년회는 해야지.”

“새해가 슬플 일이야? 무슨 논리가 그래.”

“한 살 또 먹잖아.”

차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 연말연시에 제일 바빠. 들어가자.”

“야, 밥으로 꽉 찬 배도 디저트 넣을 구석은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다고. 아무리 바빠도 날 만날 시간은 따로 빼.”

“밥도 디저트도 네 남자 친구랑 먹어. 송년회도 신년회도 둘이 하면 되잖아.”

“난 도대체 언제 이 뜨거운 우정에 보답받을 수 있을까?”

웃으면서 도윤의 어깨를 민 차영은 먼저 그녀만 식당으로 들여보내고 제 자리에 섰다. 아까부터 나와 있었더니 외부에 노출된 살결 위가 죄다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린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태주와 알게 된 이후로 자꾸 숫자에 예민해진다. 벌써 7일째 그의 얼굴을 못 본 상태였다.

〈그런데 같은 건물 산다면서 전화번호도 몰라?〉

모르니까 물어보지.

‘파리라고? 대체 얼마나 먼 거야.’

차영은 이마 사이를 찌푸리고 청명한 겨울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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