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운항 관리실에 인천발 파리행 한국 항공 비행기 편을 운항할 조종사들이 새벽부터 집결했다. 공항 터미널로 가기 전 브리핑 때문이었다. 단거리 비행은 기장과 부기장 한 사람씩으로 짜인 한 개의 팀으로 충분하지만, 장거리는 여러 명의 조종사가 함께 탑승해 팀별로 각각 네 시간가량 번갈아 가면서 운항했다.
태주와 선재의 한 팀, 또 다른 기장과 부기장의 한 팀으로 총 네 사람의 운항 승무원 앞에 선 운항 팀장이 기상 예보 모니터 화면을 내보였다.
“오전 중에 눈 소식이 있긴 합니다만, 크게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고요. 문제는 탑승 승객 명단입니다. 임신 중인 승객이 다섯 분이나 됩니다. 한 비행에 임산부가 이렇게 많은 일은 사실 드문데……. 그나마 작은 비행기가 아니라 흔들림은 적을 테니 다행입니다. 객실 승무원들에게도 전달했지만 모쪼록 이 부분 각별히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명단 서류를 읽고 있던 다른 기장이 그것을 팀장에게 도로 내밀었다.
“우리가 후단이네요. 한태주 기장 팀이 전단이고.”
“네, 한 기장께서 이·착륙을 워낙 부드럽게 하시니까 먼저 조종간 잡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일부러 그렇게 짰습니다.”
“우린 랜딩 능력이 후지다?”
“에이, 기장님 왜 그러십니까. 후단이 그나마 편한 거 아시지 않습니까.”
“한태주랑 운항하면 꼭 이래. 연차대로 안 합니까? 나한테 먼저 선택권을 줘야지.”
목전에서 제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데도 태주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귀찮다는 양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의 나이 지긋한 기장이 한 마디 해 보라는 듯이 펜 끝으로 그의 제복을 쿡 찌르는 통에 결국 서류를 내던졌다. 아마 중간에서 넉살 좋은 부기장 선재가 끼어들어 막아서지 않았다면 문제가 훨씬 커졌을지도 몰랐다.
“저기, 팀장님. 9박 10일이면 일정이 너무 긴데요. 왜 이렇게 짜셨어요? 성수기니까 100시간은 날아야 수지가 맞을 텐데……. 이러면 저희들은 한 달 비행시간이 확 줄어요.”
“항공기 정비 일정이랑 같이 맞추다 보니 며칠 좀 밀렸어요. 휴가라고 생각하시고 다들 이 김에 푹 쉬다 오세요.”
운항 팀장이 살려 줘서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더니 능숙하게 받아쳤다. 때마침 구세주처럼 전화까지 걸려 왔다. 그는 분위기를 살피며 수화기를 들었다. 살뜰하게 전화를 받던 팀장의 표정이 서서히 오묘해졌다.
짧은 통화 후에 끊고 조종사들 앞으로 돌아온 운항 팀장의 미간이 살짝 좁혀져 있었다.
“홍선재 부기장님 지금 급히 공항으로 이동하셔야겠는데요. 9시 10분 마닐라 비행기 편 부기장께서 급체를 한 모양입니다.”
“왜 제가 가요? 스탠바이 중인 부기장 없습니까?”
“지금 이른 시간이라서요. 당장 가셔야 되는데 제가 이 시점부터 연락 돌리면 한참 늦습니다. 여기 두 분 부기장님 계시다고 했더니 그쪽에서 홍 부기장님이 와 주셨으면 하시더라고요. 그쪽 기장님이랑 몇 번 호흡 맞춰 보셨다고.”
“그럼 태주 선배랑 파리에는 누가…….”
“그건 이제 스탠바이 중인 부기장 중에서 한 분 불러야지요. 일단 터미널로 가십시오. 가시는 길에 버스에서 운항 브리핑 해 드릴 겁니다.”
난감해하는 기색의 선재가 운항 팀장과 시선을 은밀히 교환했다. 선재는 태주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직장 동료였다. 정말 우연찮게 태주가 한국 항공 문 회장의 핏줄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뒤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아울러 그는 조종석에서 태주의 까다로운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본인이 아닌 다른 손발 안 맞는 부기장이 왔다가 태주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라 입술을 달싹였다.
운항 팀장도 가뜩이나 이미 기장 간의 분위기가 험악한데 이 일이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까 염려하는 듯했다. 광활한 하늘 위에서 말썽이라도 일으키면 골치가 아파졌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열심히 눈알을 굴려 본들 별반 뾰족한 수는 없는 터다. 선재가 꾸벅 인사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기장님들은 아직 출발하지 마시고 이쪽에서 대기해 주시면, 새로 투입될 부기장님이랑 같이 브리핑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내내 침묵하고 있던 태주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10여 분 정도 예상합니다.”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캐리어를 내팽개친 그는 사무실을 빠져나가 휴게실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인지라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은 안 보였다. 거울 앞에 선 태주는 아까 전 선배 기장이 볼펜 끝으로 쿡쿡 찌른 자리 위를 손으로 털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번 운항이 9박 10일이나 된다는 점을 무심코 상기했다.
“9박 10일…….”
지난번 차영의 차를 얻어 타고 돌아온 이후로는 서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차영과 그에 비하면 불규칙적 생활을 영위하는 태주는 작정하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몇 번 우연을 만들어 볼까도 했으나 그날 헤어질 때 자신이 했던 행동이 마음에 걸려서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서둘러 휴대폰을 꺼낸 태주는 저장된 연락처들을 뒤졌다. 그러고 보니 차영과 직접 번호를 교환한 적이 없다는 점이 떠올랐다.
다짜고짜 보고 싶다고 말하면 미친 소리를 한다고 도망가겠지. 느닷없이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며 화를 내거나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는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설명한 적 없었고 줄곧 감추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에 차영이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차서 딱히 통화가 연결된 대도 그것 외엔 건넬 말이 생각이 안 났다.
어떤 의미에선 차라리 그의 연락처를 모르는 게 다행일지 모른다.
“상처는 괜찮은 건지…….”
목에 생채기라도 났다면 꼭 알려 달라고 말했으나 차영으로부터 온 직·간접적 메시지 따위는 없었다. 그날의 차영은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던 태주를 힐난하기보단 도리어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는 도대체 그 순간의 자신에게서 뭘 읽어 낸 것일까.
차영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떠올려 보던 태주는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 등으로 툭툭 두드렸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이다.
바로 그때. 딸칵, 하고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파리행 비행기를 함께 운항하게 될 다른 팀의 기장과 부기장이었다. 태주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어 버렸다.
* * *
공항 인근의 한식당 안쪽 객실 식탁 위에 여러 가지 반찬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곳은 공항 직원들이 매출의 9할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요새 같은 곳이었다. 접근성이 좋아서 단체로 식사하러 오기 좋았고, 덕택에 아는 얼굴을 만나기도 쉬웠다.
관제탑 직원들 중 시간에 맞춰 교대한 몇 사람은 탑장과 함께 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강제로 회식을 하지 않는 대신 가끔 내킬 때 탑장이 이렇게 밥을 사곤 했다.
“왜 관제소에 들어왔나? 이 질문은 통과 의례지.”
“왜겠어요. 항공 운항 전공해서죠. 파일럿은 못 될 거, 이쪽이 그나마 안정적이지 않나?”
“전 재미있어요. 약간 장난감 기차놀이 할 때의 기분도 들고요.”
“기차놀이면 일렬로 세우는 거? 맞아. 그림 그리는 기분도 들고, 소묘 같은 거.”
권위를 내려놓은 탑장과 활기차게 응답하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꼭 영화 속 배경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배경과 어우러졌다.
그 가운데에서 차영은 묵묵히 제 앞에 놓인 그릇에서 밥알을 하나씩 골라냈다. 며칠 내내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자신이 입주한 건물 7층에 거주하는 듯한 어떤 남자 때문이다. 그를 향해 자신이 정확히 어떤 노선을 취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는 모든 면에서 처음부터 차영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전 차 안에서 제 목을 조르던 때의 질린 표정, 싸늘한 눈빛. 그리고 약간의 공포와 증오를 담은 듯한 어두운 눈동자. 물론 이는 전부 차영이 읽어 낸 것일 뿐 그 순간의 그는 실제로는 별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의 패턴처럼 한 번 얼굴을 마주쳤던 그는 또 며칠째 보기가 힘들었다. 출퇴근하면서 7층을 올려다봐도 사람이 있는 기척 같은 건 없었다. 주차장에 차도 없는 걸 보면 비행을 갔나 싶긴 했으나 한태주에 관한 모든 것은 자신의 추측일 뿐이다.
“이차영.”
“…….”
“이차영! 인마.”
“네, 탑장님. 저 부르셨어요?”
뒤늦게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를 듣고 정신 차린 차영이 탑장과 눈을 마주쳤다.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요새 정말 자주 그런다?”
“아, 그냥요. 잡생각이 많아 가지고요.”
“넌 왜 관제사가 됐냐고. 너만 대답 안 했어.”
그 순간 난감해하는 얼굴로 제 옆과 대각선에 앉은 동료들을 쭉 둘러보니, 정말로 모두의 시선이 차영을 오롯이 향해 있었다.
“저는……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씁쓸한 입맛을 느끼면서 진심을 삼켰다. 대답을 얼버무리니 자연히 재미없다는 듯한 반응들이 되돌아왔다. 차영은 하늘이 좋은데 싫었다. 가까이 닿고 싶지만 끔찍했다. 상공을 날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 복잡한 이유를 어떻게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로 이런 면에선 말주변이 없기도 하고, 또 솔직해질 필요도 못 느꼈다.
다시 습관처럼 밥알을 세고 있는데 살짝 열린 문 틈으로 톤이 높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차영의 등을 누군가 툭툭 두드렸다. 돌아보니 한국 항공 객실 승무원들이 식사를 하러 온 모양인지 그들을 향해 묵례하고 있었다. 제 등을 두드린 건 승무원 복장 차림의 친구 도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