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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0화 (10/144)

10화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자취하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겪는 불규칙적 생활 밀접 필수 코스가 있다. 불시에 방문한 어머니의 냉장고 점검이다.

“이게 다 뭐니. 밑반찬은 하나도 없고 순 얼려 놓은 빵에……. 이 안에 우유랑 주스가 들어 있는 게 기적이다. 과일은 전혀 안 먹어?”

“밖에선 밥 먹어. 과일도 가끔 밖에서 후식으로 나오면? 절대 안 남겨.”

차영은 그녀가 눈앞의 냉장고 현황에서 기인한 약간의 스트레스를 잘 흘려 넘겨 주길 바라며 열심히 자기변명을 했다.

“잘하는 짓이다. 엄마가 너 이럴 줄 알았어.”

못마땅해하는 기색으로 냉장고 안을 훑어보던 그녀는 바닥에서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는 모양새가 십중팔구 먹을거리들 같았다. 2인용 식탁 위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반찬 통은 색깔도 모양도 다양했다.

“이게 다 몇 개야. 반찬 뭐 이렇게 많이 했어.”

“온 김에 주려고 이것저것 싸 봤어. 내가 1년에 네 얼굴 보러 몇 번이나 오니. 명절에도 네 생일에도 서로 일정 안 맞으면 못 보는 일 부지기순데. 아, 너도 먹고 도윤이한테도 반찬 좀 나눠서 가져다줘. 걔가 엄마가 한 음식 잘 먹잖아.”

“걔랑 요새 잘 못 봐. 바쁜가 봐.”

“그래도 일부러 찾아가서 갖다줘. 걔 그런 거에 감동받는 애잖아. 너흰 엎어지면 코 닿을 데서 일하는데도 왜 매번 잘 못 본대? 좀 잘 챙겨. 친구라곤 도윤이 하나면서.”

“잔소리하러 왔구나?”

“예쁜 말 해 주러 왔는데 네 사는 꼬락서니가 잔소리를 부른다.”

이에 동의하듯 착하게 끄덕끄덕하던 차영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장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챙겨 왔다. 그러고는 찬합을 하나씩 열어 밑반찬들의 맛을 봤다.

“엄마, 진짜 맛있어. 와……. 우리 엄마 음식 솜씨 여전하네.”

“혹시 날짜 지나쳐서 못 먹고 다 버리게 되는 거 아니지?”

“걱정 마. 다 먹을게.”

“즉석 밥에 대충 먹지 말고 쌀 사서 해다 먹어. 지금 밥 지어서 차려 줘?”

“조금만 이따가. 이렇게 가만히 엄마 얼굴 쳐다보고 있게.”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 애교를 부리면서 손을 붙잡자, 그녀도 냉장고 안을 보고 심란해진 마음이 다소 풀린 모양이었다.

제 어머니가 직접 사 온 사과를 씻고 깎아 내는 동안 차영은 그녀를 위한 따뜻한 차를 우렸다. 그녀를 위해 집에 구비해 둔 전통 한방차였다. 사실 차영은 이런 약 냄새 물씬 풍기는 옛 차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1년에 많아야 서너 번, 불시에 제집에 방문하는 그녀를 위해 유통 기한이 지나지 않도록 미리미리 챙겨 두는 게 습관이 됐다.

마침내 과일을 예쁜 모양으로 다 깎아 낸 그녀가 차영을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런데 엄마 어떻게 왔어? 주말이라 올라오는 데 오래 걸렸지.”

“우리 요양원 어르신 따라 올라왔어. 수술 때문에 서울에 큰 대학 병원으로 옮겼거든. 오래 걸리긴. 새벽에 출발하니까 버스에서 정신없이 자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오늘 나 쉬는 날인 줄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누구 아들인지 주말에 약속 없을 거 뻔해서 그냥 무턱대고 와 봤어. 이 집으로 이사한 지 몇 달 됐는데 아직도 못 와 본 게 마음에 걸리더라.”

“연락을 하지. 만에 하나 없었으면 어쨌으려고.”

“집 앞에 반찬만 놓고 가려고 했지.”

제 어머니를 직시하는 차영의 얼굴에 섭섭해하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평소 타인의 앞에서 그래프 보여 주듯 본인의 기분을 일일이 표시하지는 않는 그였으나 만국 공통의 아군인 어머니의 앞에서는 행동 양상이 조금 달라지는 듯했다.

어머니와 차영은 1년 365일을 통틀어도 한 손에 꼽을 만큼의 빈도수로 겨우 얼굴을 봤다. 우선 멀리 바닷가에 사는 그녀와 차영이 살고 있는 집이 까마득하게 멀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이쪽 지역에 방문하기를 꺼렸다. 차영은 그 이유를 잘 알아서 차마 섭섭한 티를 못 냈다.

이곳은 비참하게 죽은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하던 공항의 근방이기도 했고, 또 그를 안치해 둔 납골당마저 지척에 있는 도시기도 했다. 괜히 이 땅을 밟으면 더 생각이 나는 듯했다. 자꾸 떠오를 땐 방법이 없었다. 아예 그리움과 원통함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기억나게 하는 기제를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차영은 그녀의 회피를 이해했다.

“엄마 요즘도 많이 바빠?”

“늘 비슷하지.”

아무래도 그녀는 먼 곳에 있어도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나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다른 상념들이 끼어들지 않게 만들고자 본인의 몸을 혹사시켰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 때문에 자연스럽게 차영도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연락을 자주 못 했다. 당연히 찾아가는 건 엄두도 못 냈다. 이렇게 그녀가 겨우 시간이 났을 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엄마 생각보다 훨씬 잘해 놓고 사네. 이런 집은 비싸지 않아? 평수도 꽤 되는 것 같은데…….”

“글쎄? 난 집값 같은 건 잘 모르니까. 지난번 살던 원룸 계약 기간 다 끝나서 부동산 가서 물어봤더니 여기 매물이 싸게 풀렸다고 막 추천하더라.”

“전세랬지? 건물주가 좋은 사람인가 보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도 있겠지만 내가 운이 좋았지.”

그가 씨익 웃었다. 선 채로 그의 뺨을 꼬집어 주던 그녀가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닿은 자리가 있었는지 한참을 그곳에 눈을 고정했다.

“저건 뭐야?”

“뭐가?”

“겨울옷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올해는 코트랑 좀 샀어?”

어머니는 차영이 고이 개어 놓은 담요를 모양새 해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고개를 돌리다 그걸 발견한 차영이 당황해서 그것을 억지로 빼앗는 바람에 담요가 확, 펼쳐졌다.

“차영아?”

“아, 이건 그냥 담요야. 누구한테 빌렸는데 기회가 안 돼서 아직 못 돌려줬어.”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것을 다시 접기 시작하자, 그녀는 별말 없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마침내 담요를 정사각형의 원상태로 되돌려 놓은 차영이 그것을 눈에서 숨기듯 놓아두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아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차영이 네가 누구한테 뭘 빌리기도 한단 말이야? 누군데?”

난감해서 입을 오물거리기만 할 뿐, 차영은 쉽게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그 모습이 더 미심쩍어 보인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적당한 수습 방법이 안 떠올랐다.

그냥 직장 동료라고 해도 되고, 입주민이라고 눙쳐도 한태주를 설명하기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적당한 대답으로 대충 모면할 마음이 안 드는지 자신조차 명확히 이해가 안 갔다. 단지 그가 어떤 존재라고 제 입으로 설명하기가 싫었다.

그걸 밝히는 순간 너무 아무것도 아닌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엄마, 나도 내 체력이 허락하는 한 인간관계 착실히 맺으면서 살거든?”

핵심을 비껴 나간 모호한 답을 돌려주자, 어머니는 그의 말을 안 믿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차영은 자라면서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제 교우 관계에 대해 어머니에게 공개하거나 상담한 적도 없었고, 뭐든 혼자 하는 걸 더 편하게 여겼다. 그걸로 고민하는 기색도 보였던 적이 없어 그녀는 늘 걱정이 많았다.

누구에게나 적당히 친절하고, 대부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배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모두를 너무나도 쉽게 스쳐 지나 보냈다. 그런 성격은 좋게 말하면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방어적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진짜로 누군데. 응? 여자야?”

“그냥 우연히 빌린 거야. 엄마가 누구냐고 물어볼 만한 중요도를 탑재하고 있지 않다고.”

“또 그래. 시작부터 중요한 사람이 어디 있어? 가족도 아닌데?”

“남이 꼭 나한테 중요하기까지 해야 돼? 살면서 적 없으면 됐지.”

“넌 적도 없지만 친구도 없잖아.”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할 기동력을 잃었다.

“아무튼. 진짜 아무도 아니니까 그만 물어봐. 떠올리기 싫어.”

“세상에. 떠올리기가 싫어? 너답지 않게 민감하게 나오네? 이러면 더 궁금하지.”

“엄마!”

결국 차영은 원망스러운 음성으로 어머니에게 항의했다. 이쯤 되니 그에게 말해 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걸 그녀도 받아들여야 했다. 정말로 별거 아닌 사람이라면 조용히 잊힐 테고, 그 반대라면 언젠간 어머니에게 인사 정도는 시킬 터다. 그녀는 아들의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을 보며 왠지 후자가 아닐까 짐작한 채 양보를 택했다.

“어유, 알았어. 어쨌든 올핸 코트 꼭 사.”

“걱정하지 마.”

단단히 당부하는 그녀에게, 차영은 염려 말라는 양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분명히 대꾸했다. 그녀가 마침내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도 제 찻잔에 시선을 돌리다가 바닥에 고이 개어 놓은 남색 담요를 힐끗 쳐다봤다.

이런 걸 세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왠지 죽기보다 싫은 기분이긴 하지만……. 벌써 정확히 1주일째 한태주의 얼굴을 못 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연이 너무 잦은 것 같았는데, 막상 안 보려면 영원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져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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