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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9화 (9/144)

9화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정면의 태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관심 갖지는 말라. 앞에는 앉아 있어라. 내가 한 기장 밥 먹을 때 앉혀 놓는 인형이냐?”

“몇 살이야?”

정말이지 차영은 어이가 없었다. 본인 이야기는 몇 마디 물어보자마자 관심이 너무 많은 게 아니냐고 면박을 줘 놓고, 이쪽은 아예 신상 명세에 대해 물어 버린다. 예의 없고 안하무인인 건 이미 눈치챈 지 오래지만 한태주는 번번이 상상 그 이상을 보여 준다.

“나 몇 살인진 그쪽이 알아서 뭐 하게. 이거 시비 거는 거야 작업 거는 거야?”

“둘 다 아니야. 이름은 이차영, 직업은 항공기 관제사. 두 가진 아는데, 최종 학력은? 부모님은 뭐 하셔. 너 호구 조사 싫어하지? 왜냐면 나는 싫거든. 그런데 우리가 뭐 할 말이 없잖아. 너랑 몇 마디 좀 하고 싶긴 한데, 내 이야기는 하기 싫고. 날씨 이야기나 할까.”

“원래 이렇게 제멋대로야? 본인밖에 모르고?”

“이런 지 오래되긴 했어.”

그럴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형성된 성격이 저렇게 완전하고 집약적인 형태일 리가.

“대학까진 나왔어. 아버진 돌아가셨고, 어머닌 지금 좀 떨어져서 먼 지방에 사셔. 날씨는…… 춥다. 뭐 더 궁금한 거 있어?”

“많은데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네. 누구한테 궁금한 걸 물어본 적이 있어야지.”

태주가 캔 맥주의 뚜껑을 따 한 번에 꽤 많은 양을 마셨다. 아무래도 대화를 이어 나가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차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왜 서툰 자신과 더 서툰 그가 이렇게 오밤중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높았고, 달은 밝았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첫 만남부터 어긋났던 한태주와 이러고 있는 건지 몰랐으나 이미 물은 흥건하게 쏟아졌다. 후우. 숨을 깊이 내쉰 차영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시 태주와 눈을 마주쳤다.

“한 기장은 같이 술 마셔 줄 친구도 없지?”

“없어.”

“그거 왜 그런 줄 알아?”

“넌 아나 보다?”

“세상에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잘나가고, 대우도 업계 최고에. 얼굴도…….”

순간 뺨부터 목울대까지 한꺼번에 훅 붉어진 차영이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쪽처럼 나이 어린 기장 국내외 항공사 탈탈 통틀어도 거의 없어. 본인이 제일 잘 알 거 아냐?”

“혹시 지금 나 특채라고 돌려 까는 거야?”

“봐, 꼬였잖아.”

“내가 어린 줄은 어떻게 알아. 몇 살인 줄은 알고 하는 소리야?”

“몰라. 그냥 대충. 액면가.”

“액면가 같은 소리 하네. 너 내 지갑 주웠을 때 신분증에서 나 몇 살인지 봤지.”

여태까지 삶에서의 차영은 모두에게 대체로 좋은 사람이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그랬다. 친절하고, 적당한 선을 알고, 타인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제 몫은 반드시 열심히, 또 최선을 다해 해냈다. 그래서 다른 문제라면 자신을 변호할 만한 핑계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이 문제만큼은 그다지 자유롭지 않았다.

“봤어. 그 안에 가족사진 같은 것도. 사과할게.”

“나한테 잘못을 왜 이렇게 많이 해.”

“내가 나쁜 게 아니라 호기심이 나쁜 거지. 용서해.”

“그래.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의아해하는 눈빛을 한 차영이 그를 위아래로 무심코 훑어보자, 태주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사진을 뒤져 봤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차영은 왠지 단전부터 원인 모를 간지러움이 천천히 떠밀려 올라오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다감하게 웃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3주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다. 그리고 입매에 미소가 걸린 모양새가 생각보다 아주 잘 어울렸다.

덕분인지 입술까지 금세 바이러스라도 옮은 양 간질간질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손에는 냉랭한 공기를 비웃듯 땀이 차기 시작했다. 차영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제는 태주처럼 맥주를 한 캔 따려는데 그가 한발 앞서 뚜껑을 따 건넸다.

“웬 친절.”

차영이 맥주를 받아 들며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태주가 이 행위의 대가로 질문에 답을 해 달라는 양 넌지시 물어 왔다.

“나 진짜 공항 전역에 개싸가지로 정평 나 있어?”

맥주를 마시던 차영이 풉, 하고 액체를 내뱉었다. 황급히 티슈로 주변을 닦는 모습을 보며 태주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더럽게.”

“그때는 그냥 흥분해서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야.”

“소문이 난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거야?”

한국 항공의 초짜 승무원들은 젊고 잘생긴 기장인 그에게 무한한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몇 번 함께 비행하다 보면 같이 운항하길 기피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도윤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승객 안전을 위한 요구 사항이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 없이 몹시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 캡틴이라고 흘려 말해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관제탑에 올라온 그를 본 순간 익히 들어 왔던 소문의 젊은 기장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당시 도윤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아주 인상적이었던 게 한 가지 있었다. 오만하고 재수 없긴 하지만 꼭 내가 위험한 상황에서 비행을 해야 한다면 한 기장을 선택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는 가장 정확히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같은 업계의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의 차영은 그런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처럼, 그리고 눈앞의 한태주처럼 승객들과 승무원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조종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아버지의 푸르스름한 제복과 어깨의 견장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자연히 그의 뒤를 따라 자신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차영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물론 사실이긴 해. 아니면 내가 어디서 한태주 씨 이름을 들어 봤겠어.”

“한태주 씨, 네 목소리로 들으니까 내 이름 생각보다 듣기 좋다. 다시 해 봐.”

“갑자기 뭐야. 징그럽게.”

“해 봐.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돈을 받아도 하기 싫은데 돈도 안 내고 듣겠다고?”

“너무 방어적이네. 어때, 일단 해 봐.”

지금 누가 할 소릴 하나 싶었다.

“대체 누가 더 방어적인데? 사람들이랑 사이좋게 좀 지내. 조종간 잡고 있어서 본인 혼자 그 커다란 항공기 모는 것 같은 기분 들겠지만 비행기 같은 협력 시스템 또 없어. 나 같은 관제사도 그렇고. 객실 승무원들도 그렇고. 다 그쪽 도와주는 사람들이야.”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라고 해도 하늘에 인위적으로 형성해 둔 길을 인간이 만든 기체로 지나간다는 것 자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일이다. 그러니 비행을 잘하는 조종사가 항공사에 오래오래 있는 편이 모두에게 좋았다. 위험한 일도 적어지고, 사고의 빈도수도 줄 테니까 말이다. 차영은 하늘에서 앞으로 그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러니까 한국 항공에서 오래오래 몸담고 일하라고. 승객의 안전은 생명하고 직결돼 있어서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데……. 일하다 보면 워낙 바빠서 나도 가끔 그걸 잊어. 그때도 우리가 아니라 한 기장이 옳았어.”

차분한 음성을 곱씹던 태주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차영을 들여다봤다. 눈동자에 어린 깊은 애정이 분명하게 상대를 향했으나, 차영은 맥주를 마시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그가 느낀 건 태주로부터 돌아온 낮은 음성뿐이었다.

“너 뭔데 건방지게 충고야.”

“정 듣기 싫으면 말고.”

“내 이름이나 다시 불러 봐.”

“댁이야말로 진짜 집요하네.”

“성격이야.”

그를 오래 알아 온 건 아니지만, 쉽게 물러설 성격이 아니라는 건 짐작됐다. 마지못해 차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입을 가벼이 벌리자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붉은 입술의 얇은 피부 위에 열기처럼 닿았다. 괜히 맥주 캔을 쥔 손만 조금씩 쥐락펴락하던 차영은 어렵사리 눈을 들어 태주를 직시했다. 제 얼굴이 조금 붉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술을 마셨으니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이윽고 열린 입술 사이를 가르고 불안정한 음성이 조심스럽게 새어 나와 차가운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한태주.”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장난스럽게 차영을 빤히 보던 태주가 바람을 타고 제 이름을 실은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자 불현듯 멈칫했다.

“다시 해 봐.”

침을 꿀꺽 삼킨 차영이 시선을 슬쩍 피하고는 탁.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한태주. 한태주. 한태주. 됐냐?”

밤하늘을 닮은 어두운 색 눈동자가 차영을 구멍 낼 기세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태주의 음성은 한참 뒤에야 나왔다.

“관제 너 몇 살이라고?”

“아까부터 계속 묻네. 내가 몇 살인 게 대체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야. 입주민 호구 조사라고 하지.”

“너보다 많으면 어쩔 거고 어리면 어쩔 건데.”

“아무것도 안 해. 아직은. 그러니까 쫄 거 없어.”

“쫀 적 없어.”

대화가 미묘하게 겉돌았다. 차영은 태주에게 술자리에 걸맞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의사가 없음을 아이스크림 하나를 해치우고, 제 맥주 한 캔까지 전부 동낸 이제 와서 겨우 깨쳤다. 계속 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던 그는 별수 없이 다 비운 캔을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려두고는 뒤늦게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가?”

“추워. 더는 같이 못 놀아 주겠어.”

질문에 퉁명스러운 대답이 이어졌다. 그가 이 자리를 회피하는 이유는 솔직히 하라는 대로 태주의 이름을 불러 놓고 홀로 무안한 기분 탓이 가장 컸다. 땅으로 꺼질 수도 하늘로 솟을 수도 없으니 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힐끗 태주를 쳐다본 차영은 여전히 앉아 있는 그를 두고 금세 멀어졌다. 어느새 건물 야외 주차장 옆으로 난 작은 쪽문으로 들어서더니,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실루엣이 사라질 때까지 한눈팔지 않고 뒷모습을 지켜보던 태주가 차영이 사라진 뒤라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새끼, 저도 인간관계에 하자 있는 주제에 아는 척은.”

혼잣말을 내뱉은 그는 춥고 조용한 길목에서 차영이 앉았던 자리를 가만히 관찰했다.

“이차영…….”

이름을 부를수록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상실감마저 느껴졌다. 아닌 체하지만 실은 편견 없고, 마음이 따뜻한 그가 눈앞에 있다가 불현듯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먼발치에서 보기만 할 땐 이렇게까지 애가 타진 않았는데, 가까이 접근할수록 욕심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너에게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와 뒷걸음질 치기에 자신은 차영이 앉아 있던 의자에마저 감동받을 정도로, 그를 너무 오랫동안 원해 왔다.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은 태주는 캔에 남은 맥주를 마시고, 다 비운 캔을 구겨서 휙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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