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차영은 잠시 눈동자를 둘 곳이 없어 방황했다. 그러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때의 태주도 자신이 가는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져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제 차가 골목 어귀를 빠져나갈 때까지 말이다. 이내 차영은 조금 자신감이 붙어 덧붙였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나 가는 거 계속 봤나 봐?”
“어, 아울러 난 우연 아니고 너 본 거야.”
이렇듯 직구로 대답이 돌아올 줄은 상상 못 했다. 갑자기 그를 쳐다보기가 몹시 민망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까 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왠지 이 자리에 더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위기의식이 삽시간에 몰려왔다. 차영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 짐을 챙겼다. 그러다가 태주에게 팔이 붙들렸다.
“뭐 하는 거야?”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그의 앞에 선 채였다. 그가 예고도 없이 차영을 일으킨 것이다. 태주는 대답 대신 차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언제나의 무례한 태도를 생각하면 우악스러워야 했는데, 제 살결에 닿은 촉감은 부드럽고 그의 행동은 생각보다 정중했다. 홀린 듯이 그를 따라 걷고 있자니 당도한 곳은 편의점 앞이었다.
“잠깐, 잠깐만. 어디 가.”
“간판 안 보여? 편의점.”
“난 편의점에 용건 없어.”
“내가 있어. 맥주나 한잔하자. 난 네 취향을 모르니까 직접 골라.”
이 뜬금없는 제안에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들은 사이좋게 마주 앉아 오순도순 술잔을 기울일 사이가 전혀 아니었다.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왜 술을 마셔. 나 그쪽이랑 할 말도 없거든?”
뒤늦게나마 팔을 뿌리치려 하니 그가 더욱 힘주어 잡아 왔다.
“마시자.”
“싫다니까.”
단호한 대답을 하면 더욱 억누르지 않을까도 염려했으나, 기우였다. 금세 다소 막막해하는 표정이 된 태주가 입 안에서 혀를 둥글게 굴리고는 우아한 입술을 벌렸다.
“마셔 줘.”
강권하는 투에서 애원으로 논조가 바뀌니 차영도 계속 같은 기조를 유지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그답지 않게 부탁을 하는 모양새가 정말로 안 어울렸다. 게다가 그는 그저 말했을 뿐일 텐데 제 귀에는 꽤 간절하게 들리는 게 이상했다.
이윽고 그가 또 처음 만났던 날 봤던 어두운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했다.
“한 기장 일부러 나 그렇게 보는 거야?”
“뭐가.”
“꼭 꼬시는 거 같이.”
머릿속 한구석에 깊이 박혀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곤, 조금 멋쩍어졌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상식적으로 다 큰 성인 남자끼리 나눌 대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앞에서 마주쳤을 땐 스토커 타령을 해 대던 태주는 이 말에 의아해하지도,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그저 차영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안했다.
“같이 마셔 줄 거지? 오늘은 진짜 혼자 마시기 싫어서 그래.”
그는 끝내 제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본인 할 말만 내뱉더니, 차영을 꿋꿋이 편의점 안으로 이끌었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온 차영은 그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앞에서 볼 때만큼 옆모습이 선명하게 굴곡져 유려했다.
바로 그때였다. 예고도 없이 태주가 고개를 확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를 훔쳐보고 있던 차영은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더 안으로 들어섰다.
“하, 한 기장 내일 비행 없어?”
“있으면 마시겠어? 일은 꼼꼼하게 하면서 생각은 논리적으로 잘 안 하는구나?”
“진짜.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쩌면 저렇게 재수가 없지?”
그를 저격한 게 분명한 힐난에도 태주는 픽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고는 맥주를 몇 캔 고르고, 카운터로 돌아오는 길에 간식거리들을 아무렇게나 집어 댔다. 아마 눈에 뜨이는 대로 대충 고른 것인 듯 종류가 천차만별이었다. 편의점에서 먹을 음식을 자주 사는 편은 아닌 게 분명했다.
차영은 자신이 선 쪽으로 접근하는 그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주에 관한 소문은 공항에서 가장 높은 관제탑의 담장마저 넘어 들어왔다. 그는 비행기 조종간을 잡는 데는 특별한 재능이 있지만 정작 그 항공기에 태운 인간들과의 관계 형성에는 극도로 서툰 것 같았다.
“뭐 해? 관제 넌 안 골라?”
물끄러미 태주를 보던 차영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혹시나 마시다 중간에 딴소리할까 봐 묻는 건데. 설마 나 누군지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왜, 한 3주 전쯤 나랑 얼굴 막 붉혔었잖아. 안면 인식 장애 같은 게 있다든가 그런 거라면 내가 그쪽 민망하지 않게 자연스럽고 조용히 자리 비켜 줄게. 나 배려심 있고 착하거든.”
태주는 황당하다는 듯 픽 웃었다. 그 순간 냉각돼 있던 얼음이 급속도로 녹듯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무너져 내렸다. 따뜻한 기미마저 감돌았다. 차영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역시나 짐작이 맞았던 모양인지 태주의 안면은 여느 때처럼 서늘했다. 그의 묵직하고 매력적인 음성도 여전했다. 이제 보니 평소보다 조금 잠긴 듯도 했다.
“너 나 좋아서 쫓아다니는 거 아니라며. 그럼 됐어. 그리고 나 조종사야. 시력이 안 좋으면 칵핏에 앉을 수가 없어. 뭐 해. 계산할 거야. 빨리 골라.”
“아, 이걸 놔야 고르지.”
어느 틈에 태주가 차영의 팔을 다시 붙들고 있었다. 처음엔 걸어가는 길에 자신이 걸리적거려서 비키게 할 심산이었던 모양인데, 갑작스레 두 사람이 대화를 하게 된 통에 이 상태였다.
그는 제 쪽에서 불시에 손을 댔을 땐 그렇게 민감하게 굴었으면서, 정작 본인이 차영에게 하는 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차영이 빨리 놓아 달라는 듯 손목을 비틀자 그도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차영은 뒤늦게 맥주 몇 캔을 골랐다. 계산은 태주가 했다.
“잠깐만. 베푸는 김에 나 이것도 사 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차영은 막대로 된 아이스크림 하나를 추가해 넣었다.
점원이 바코드를 찍자마자 차영은 편의점을 벗어났다. 뒤편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쳐다보지 않아서 진짜였는지는 모르겠다.
끼익. 문을 열고 강아지 집이 있는 건물 구석 방향으로 향한 그는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차영을 따라 편의점 봉투를 든 태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귓전을 때렸다. 처음 그들이 부딪쳤을 땐 늦가을의 길목을 지나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완연한 겨울이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별로 말이 없었다. 차영이 추운 건지 제 어깨를 움츠리면서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밖에 날씨 이미 겨울이다. 너 그거 먹으면 입 얼걸?”
“얼든 말든 댁이 무슨 상관?”
“곧 상관이 있어질 수도 있지. 취해서 키스라도 하게 되면. 세상엔 변수가 넘치니까.”
헙. 당황한 차영의 턱을 타고 크게 깨물어 동강이 난 아이스크림이 툭 떨어졌다.
“나 게이 아니라니까! 애초에 태어나서 게이라는 말을 너 때문에 처음 뱉어 봐.”
“누가 뭐래? 농담인데 왜 발끈해. 더 수상해 보이게.”
얼굴을 확 붉힌 차영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태주를 직시했다. 한태주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그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느긋한 데 비해 자신은 여유가 없어서 손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차영은 괜히 반 정도 남은 아이스크림만 말없이 씹어 댔다. 그러던 와중 태주가 일어났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쪽이 술 마시자고 했잖아. 어디 가?”
“기다려.”
그러고는 제 차에서 얇은 담요 한 장을 꺼내 와 차영에게 휙 던지는 것이었다. 촉감이 부드러운 모포에서 꼭 그를 닮은 좋은 향기가 났다.
졸지에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게 된 차영이 낑낑거리면서 그것을 어깨에 둘렀다. 담요 때문에 순간적으로 새까맣게 변해 있던 시야가 다시금 천연의 제 색을 찾았다. 그 광경 속엔 제 맞은편에 앉은 한태주도 함께였다.
그의 등 뒤와 머리 위로 검은 물결처럼 보이는 밤이 완연했다. 모든 사물의 경계가 그를 기준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이 그의 어깨 위에 무겁게 안착하는 듯한 착시마저 일었다. 쌀쌀한 늦은 밤, 고적한 풍경 속 한태주는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뒤편의 가로등마저 오로지 그를 비추기 위해 존재하는 조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은 물결처럼 두 사람을 감쌌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득한 먼 곳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을 응시하는 한태주의 시선이, 쓸쓸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저 복잡하고 심란한 눈빛은 벌써 세 번째다. 왜였을까. 그 모습은 누적될수록 물리적으로 붙잡아 놓고 겁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자꾸 마음이 불안해지고, 시선을 뗄 수가 없어졌다.
결국 차영의 입이 열리는 꽃봉오리처럼 벌어졌다.
“한 기장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전혀.”
어렵게 물은 것에 비해 즉답이 돌아왔다.
“그럼 왜 같이 술 마시자고 했는데?”
“안 그래도 한잔 마시고 뻗으려고 했는데 눈앞에 강아지랑 놀고 있는 공항 직원이 있어서.”
이쪽이야말로 안 그래도 그가 아주 미묘하게 피곤해 보인다고 느끼고 있었다.
“왜 한잔 마시고 뻗으려고 했는데?”
“오늘까지 심 테스트 했어.”
“시뮬레이션? 그런데 얼굴이 안 좋네. 떨어졌어?”
그러자 줄곧 평온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던 태주가 무척 식겁한 표정으로 차영을 직시했다. 여태까지 본 중 가장 생동감 있는 얼굴이었다.
“내가 아마추언 줄 알아? 그럴 리가.”
“그런데 웬 술? 혼자 마시기 싫다고 하질 않나.”
“이차영 관제사 남의 일에 관심 아주 많네?”
이번엔 조금 전 그의 불편한 표정을 차영이 고스란히 지어서 보여 줬다. 사람이 기껏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고 함께 있어 주기 위해 시간을 할애했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저거였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 더는 이곳에 앉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 관심받는 게 정 싫으시면 이렇게 혼자만의 정적을 즐기셔. 먼저 일어난다.”
“가지 마.”
어설프게 몸을 일으키던 차영이 멈칫했다.
“제발.”
퍽 덤덤한 말투지만 사용한 단어의 절박함을 무시할 수 없었던 차영은 털썩, 다시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