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이걸 저더러 뭐 어쩌라고요.”
“들여오면 네가 처음으로 몰아 볼래? 조종간 맡기마.”
“진짜 시키고 싶으신 거 그거 아니시잖아요.”
“언제까지 현장에서 실무만 쌓을 거야. 회사 돌아가는 꼴도 알아야 할 게 아니냐?”
“도대체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경영에 취미도 없고 관심도 안 가요. 비행기 모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인간관계도 형편없습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네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널 억지 써서 데려온 나도 면목이 설 게 아니냐! 직원들 사이에서 뒷말 안 나오도록 본사에 한자리를 주려고 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야?”
직원들은 한국 항공의 문 회장이 해외 항공사 시찰을 갔다가 미국의 한 비행기 편을 시장 조사 겸 이용해 본 뒤 그를 국내로 전격 스카우트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문 회장이 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전제 조건을 지운다면 말이다.
“그까짓 욕 좀 먹으면 어때요. 제가 눈 가리고 아웅 한 특채인 건 사실이잖습니까.”
태주는 한국 항공 기장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겉돌았다. 최연소 기장인 탓에 나이가 지긋한 그들과 연령대도 맞지 않았고, 본인의 성격도 곰살궂지 않은 데다 조종사가 된 코스도 혼자 남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항공기 기장이 되는 방법은 무척 제한적이다. 공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항공 교육을 이수한 뒤 일정한 비행시간을 채운 다음에 민항기 부기장으로 스카우트가 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엘리트 코스였다.
그게 아니라면 따로 대학이나 훈련원 등지에서 항공 관련 교육을 받아 필요한 비행 면장을 취득한 뒤 부기장이 되는 방법 정도가 보편적이었다. 거기서부터 또다시 기장 승급 시험이라는 난코스가 기다렸다.
해외 대학 출신인 태주는 두 과정 다 해당 사항이 없었다. 문 회장이 해외 항공사에서 부기장으로 근무하던 그를 한국 항공에 특채로 입사시켰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사에 숙련급 기장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부기장이던 그에게 초고속 기장 승급 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했다. 항공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면장 조건이나 비행시간 조건 따위의 한국 항공 내규를 수정해 가면서까지 그를 기장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직원들 사이에서 ‘그의 아버지가 대체 뭐 하는 분이냐’라는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 여기 붙잡아 두실 겁니까. 저 다시 미국으로 가고 싶어요. 미주 항공사에서 동양인 출신 조종사가 자리 잡기 얼마나 힘든 줄이나 아세요? 그걸 어떻게 해낸 건데.”
그가 으득,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잇새를 세게 짓이겼다.
“회장님 때문에 돌아가도 전 도로 핸디캡 가지고 맨땅에 헤딩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놔주세요.”
“내 회사는 네가 물려받아야 한다.”
“전 됐으니까 사회에 환원하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나야말로 어떻게 일궈 온 회사인데! 눈에 흙이 들어와도 사회에 환원 같은 건 안 해. 내가 슬하에 자식이 죽고 없으니 조만간 널 입양할 생각이다.”
“외할아버지!”
“나라고 네가 예뻐서 주겠다는 건 줄 아니? 나한테 핏줄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네가 사는 쪽은 쳐다도 안 봤어. 불효막심하고 천하의 괘씸한 놈. 네 말대로 죽은 네 엄마 판박이구나.”
침묵하는 태주의 얼굴 위로 종이 뭉텅이가 날아왔다. 가볍게 맞고 떨어진 종이가 그의 발아래로 추락했다. 문 회장이 수신호를 보내자 안 실장이 서둘러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수행 비서들을 소환했다. 제 외할아버지를 모셔 가려는 듯해서 태주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솔직히 한국 항공에서 일하는 건 기장끼리 사생활을 공유해야 한다거나, 승무원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이상한 훈련을 시키는 정도의 규칙들만 제외하면 편했다. 다만 제 외할아버지의 마수가 언제 어디에서 뻗쳐 올지 알 수 없어, 그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태주는 제 피붙이인 문 회장을 세상 그 누구보다 혐오했다. 제게서 아버지를 빼앗아 가고, 잘못한 일도 없이 누군가에게 크나큰 죄책감을 일게 해 이토록 오랜 불안과 불행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노인이 밖으로 나가고, 태주도 제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 안 실장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태주의 앞을 막아섰다.
“뭡니까, 또.”
“조만간 본가에서 식사하자십니다.”
“바빠요. 또 입양…… 이런 좆같은 소리 하실 거면 안 가겠습니다. 안 실장님도 앞으로 제집에 기약 없이 찾아오지 마세요.”
“회장님이 아니라 이사장님 전언이십니다.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이 말에는 태주도 반발심을 거두고 묘한 시선을 던지게 됐다.
“외할머니가요?”
“최근 건강이 많이 상하셨거든요.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같이 약해지신 것 같습니다.”
“하……. 어디가 얼마나 안 좋으신데요.”
“추후에 직접 한번 들여다보시죠.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제 용건을 마친 안 실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태주만이 남겨졌다. 주변을 빙 둘러보던 그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종이들을 지그시 지르밟았다.
* * *
관제탑 모니터에 별자리처럼 비행기들의 위치들이 가지런하게 수놓였다. 그걸 보면서 실선을 연결하듯 눈으로 연결선을 긋고 있던 차영은 이내 유리 벽 너머의 활주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 망원경으로 먼 곳을 내다보려 시도했지만 애초에 빗방울 때문에 시야가 가로막혀 쉽지 않았다.
“야, 비가 제법 많이 온다.”
탑장이 차영의 등 뒤에 서더니 따뜻한 믹스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이곳에서 2년째 일하고 있는 차영은 이게 탑장이 ‘잠깐 이야기 좀 하자’라는 신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관제실 뒤쪽의 한적한 자리로 빠져나온 두 사람은 바쁘게 관제 중인 동료 직원들을 보며 나란히 섰다.
“이차영이, 너 갑자기 왜 이렇게 마음을 못 잡냐?”
“제가요? 똑같은데.”
“아냐, 평소랑 좀 다른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어. 평소엔 너같이 차분하고 얌전한 애 없는데 요 며칠 좀 부산스러워. 한태주 기장이 올라와서 한 번 뒤집고 간 이후로 계속 그러네.”
정말 영문을 모르는 일이라 습관적으로 커피를 입에 대던 차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방금 전까지 탑 내부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며 자신도 모르게 초조하게 굴던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머쓱해졌다. 보통 잠시 휴식할 시간이 생기면 휴게실로 가서 쉬거나 간단한 항공 영어 공부를 하거나 하는 등이 평소의 차영이 하던 일들이었다.
“좀 그렇긴 했네요.”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비가 많이 와서요.”
“비야 몇 달 전 장마 때도 하늘 무너질 것처럼 왔는데 뭐.”
“기상 악화로 항공기가 잘 뜰까 해서.”
“잘 떠. 봐라. 저것들 다 이륙하잖냐. 하늘길 막히는 게 문제지, 비행기가 얼마나 튼튼한 운송 수단인데. 게다가 뇌우 이런 것도 없고 깨끗하게 비만 내리고 있지 않아?”
“그러게요.”
“진짜 아무 일 없는 거 맞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차영에겐 아무런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사실 그대로였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차영이 묵묵히 커피만 마시자 탑장도 그러면 됐다는 양 그의 어깨를 가볍게 내려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단순히 평소 같지 않은 자신이 퍽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정말 아무 일 없었다. 문제는 별일 없었는데도 자꾸만 동요하고 있는 제 마음이었다.
어제 갑자기 어마어마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세단 주변에서 사라졌던 태주가 목구멍에 낀 얇은 가시처럼 계속 걸렸다. 대충 갈등은 봉합했다고 느꼈는데도 그가 계속 떠올랐다. 오히려 더욱 횟수가 잦아졌다. 그를 생각하면 얼굴이 미묘하게 조금씩 홧홧해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에게 실수한 부분을 사과해서 상황을 마무리 지으면 이 동요도 끝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정답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심지어 이렇게 쏟아지는 비라니, 그 성질머리에 또 부기장이나 관제사를 쥐 잡듯이 잡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여기는 타워. 한국 항공 371. 바람은 340도 방향으로 9노트 속도로 불고 있습니다. 33번 좌측 활주로로 이륙을 허가합니다.」
동료 관제사가 능숙하게 관제하는 소리가 들렸다. 탑 내에선 여러 명이 동시 다발적으로 상대 조종석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게 차영의 귀에 꽂혔다. 다 마신 종이컵을 구긴 차영이 동료의 뒤로 다가서서 넌지시 물었다.
“한국 항공 371? 떴어?”
“어, 런던 가는 거. 유도로가 막혀서 운항 관리 팀이 제시간에 비행기 뜨네 마네 하더니 결국 뜬다. 그런데 기장 싸가지 없는 말투가 묘하게 익숙해. 이거 어디서 들었지.”
“기장이랑 교신했어? 부기장이 아니고?”
“응, 언제 이륙 가능할지 궁금했나 봐. 목소리 죽이는데? 녹겠더라, 야.”
분명히 한태주다.
차영은 씁쓸하게 픽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