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언제부턴가 차영이 하루를 시작하는 순서는 일관됐다. 일어나자마자 물을 한 잔 마시고 씻은 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만들어서 하루의 기상 상태를 확인하며 먹는 것이다.
오늘도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차영은 이른 아침 식탁 앞에 앉아 버터를 듬뿍 바른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실의 모니터에서 기상 캐스터의 신뢰감 있는 음성이 송출되고 있었다.
[현재 서울의 아침 기온 생각보다 쌀쌀합니다. 서울과 대전이 1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대구가 4도, 부산이 5도 기온을 웃도는데요. 어제 같은 시각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2도가량 내려가 있는 상태입니다.]
‘벌써 겨울 오나.’
흔히 큰 가을비가 내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도래한다고들 한다.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아마 계절이 바뀌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싶었다.
[낮 동안 전국이 대체로 맑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밤에는 전국 곳곳에서 꽤 많은 양의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해 심한 경우 내일 오전 폭우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밤사이 외출하시는 분들은 우산을 꼭 챙기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던 차영은 불현듯 제 친구 도윤의 음성을 떠올리게 됐다.
〈일단 내일은 없고 글피 런던 같은데?〉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은 그가 다급히 거실 테라스로 뛰어나갔다. 그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고개를 건물 바깥으로 살짝 뺐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듯 건물 외벽을 더듬어 7층이 되는 지점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나와 보는 기척도 나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는 건 항공기 운항에 결코 좋은 조짐이 아니다. 심한 폭우로 인해 결항이 되거나 회항하는 경우도 심심찮았다. 그는 큰비 소식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상관이야.”
어울리지도 않게 남 걱정을 하던 그는 황급히 시선을 대로변 쪽으로 돌렸다. 자꾸 불시에 한태주를 떠올리고 있는 자신이 마뜩잖았다.
하늘은 푸르고 화창했다. 자연스럽게 야외 주차장 쪽을 내려다보는데 주차장 한가운데의 위용 있는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이곳 주차장에는 모두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출퇴근 시마다 늘 텅 비어 있던 자리여서 기억했다. 최소한 차영은 한 번도 이곳에서 본 적 없는 차량이었다. 이 동네에는 젊은 사람들의 밀집 지역이라서 차라리 스포츠카라면 모를까 저런 대통령 관용차로나 쓸 법한 고급 의전 세단은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야외 주차장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몇 대 정도가 다였다.
게다가 시동은 걸어 놓고 밖으로 나와서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차가운 인상의 저 중년 남자는 차영의 기억에 분명한 초면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언제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공항 터미널에서 봤나. 아니면 뉴스 같은 데서?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출근해야 할 시간이 다 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 서둘러 문단속을 했다. 준비를 마무리한 그가 집을 나섰다. 현관 측면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승강기가 있었다. 그걸 보니 어제 한태주의 행태가 다시금 기가 막혔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단기간 내에 그렇게 자신에게 무례한 말을 많이 퍼부은 사람은 한태주가 처음이다. 자꾸 그를 생각하게 되는 게 억울해서 발걸음도 빨라졌다. 마침내 차영이 다소 거친 태도로 제 차의 시동을 거는데, 마침 공동 현관에서 태주가 나오고 있는 모습이 바로 보였다. 못 본 척하려고 해도 그가 워낙 눈에 띄어서 불가능했다. 대신 자체적으로 눈여겨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시선이 마주쳐서 하는 수 없이 꾸벅 인사했다. 역시나 태주는 무시하고 가 버리려는 것이었다.
“잠깐만요, 한 기장님.”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건 제대로 그와의 문제를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를 볼 때마다 평소와 다른 속도로 심장이 뛰는 이유도 그 연장선상일지 몰랐다. 급하게 그의 뒤를 쫓은 차영이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표현했다. 어제처럼 함부로 건드렸다가 괜히 한층 더 예민해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또 뭡니까, 이차영 관제사. 난 남자한테 취미 없다니까?”
차영은 미간을 구겼다.
“그런 농담 정말 진심으로 기분 나쁘니까 삼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앞으로 우리가 안 마주치면 될 일 아냐? 딱히 농담도 아니지만.”
“전 사과드리려고 그런 겁니다. 한 기장님 지난번 비행 때. 죄송했다고요.”
냉정하게 지나치려던 태주가 불현듯 멈춰 서더니 차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뒷북치는 재주 있다.”
“뒷북이든 앞북이든 의도한 건 아니었대도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은 인정해요. 그날 안개가 너무 껴서 비행기 착륙하는 게 육안으로 잘 안 보였어요. 그런데 외항사 칵핏에서 자기들 바퀴 안 나오는 것 같다고 봐 달라고 자꾸 그러니까 신입이 당황해서 실수를 한 거예요. 그 부분은 제가 사과드릴게요. 사소한 실수라고 하면서 제가 덮고 넘어가려고 했던 점도 같이요.”
그의 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태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요? 이제 와서 뭐 어쩌겠다고.”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거라는 장담은 못 하지만 좀 더 섬세하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요. 그쪽한텐 본인 포함해 여러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제가 너무 안일했어요. 미안합니다.”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아서 다행이네요.”
가는 말은 고왔지만 오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발끈한 차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과하겠다는데 꼭 말을 그렇게 해야 돼요?”
“특별히 다르게 하는 방법 있어요? 가르쳐 주든지.”
비꼬는 건지 진짜 몰라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전적으로 봐서는 전자인데, 진지한 표정이 후자였다. 어쩌면 단순히 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영은 대답을 회피했다.
“어쨌든 전 지난번 일 사과했는데, 그쪽은 저한테 어제 일로 뭐 하실 말씀 없어요?”
“어제? 없는데.”
한태주의 무표정한 얼굴엔 동요가 전혀 없었다.
‘어제는 내 면장을 주워 줘서 고맙다. 덕분에 곤란함을 덜었다’ 따위의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기대했는데 그마저도 너무 큰 소망이었던 모양이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진짜로 안 할 줄은 상상 못 했다. 한동네에 사는 한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종종 마주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매듭을 짓고자 했던 차영의 뺨이 살짝 실룩거렸다.
“그럼 그렇지. 네, 됐네요. 저 출근해야 돼요.”
“그걸 나한테 왜 보고를 해. 가.”
“보고하는 게 아니라……! 와, 진짜. 그렇게 재수 없는 태도로 용케 안 죽고 살아 있네요.”
“보시다시피.”
“이러니까 전방위에서 욕을 먹지.”
그를 쏘아본 차영은 먼저 사라질 타이밍을 빼앗길세라 주차장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타 그곳을 벗어났다.
룸미러를 통해 태주가 걸어가는 길고 늘씬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그가 힐끗 자신을 돌아봤다. 당황한 차영이 시선을 피했다가 도로 룸미러를 직시했을 때 눈 깜빡할 사이 그의 모습이 사라져 있어 놀랐다. 아까 전 차영이 주차장에서 내려다봤던 고급 세단의 주변에서 자취를 감춘 듯했다. 의아하게 계속 쳐다봤으나, 모퉁이를 도는 바람에 몰래 시선으로 뒤를 좇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 * *
하얀색으로 페인트칠한 벽면에 20세기 현대 미술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가득했다. 색색의 그림이 반, 그로테스크한 모양의 조형물이 반이었다. 이 수억 원짜리의 예술 작품들이 군데군데 존재감을 빛내고 있는 한국 항공 산하 아트 갤러리 접견실에, 이른 아침부터 태주를 기다리고 있는 노신사가 있었다.
그는 투명한 갈색 차를 음미하며 마시는 중이었다. 태주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한국 항공의 모기업인 대영 그룹 문현기 회장이라 불렀다.
“앉아라. 네 말대로 두 쪽 다 이 만남에 동의했으니까 이제는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문 회장의 뒤쪽에서 버티고 있던 안 실장이 직원에게 태주의 몫으로도 따뜻한 차와 다과를 내올 것을 주문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갤러리의 직원들이 제 할 일을 마치고 모두 사라지자, 너른 공간에 두 혈육과 안 실장만이 남았다.
그제야 문 회장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고급 다기의 이가 나갔다.
“태주 넌 어른을 만나러 오면서 옷차림이 그게 뭐냐?”
“쉬는 날인데 제복이라도 챙겨 입을까요, 그럼?”
“어떻게 한 번을 그냥 ‘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법이 없어?”
“평생 외할아버지 말씀 안 들었던 어머닐 많이 닮았나 보죠.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깨워서 데려오셨으면 시간 낭비 그만하시고 하실 말씀이나 하세요. 저 내일 장거리 비행 있어요. 오늘 푹 쉬어야 돼요.”
그들이 서로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모양새는 가족이라기엔 다소 위화감이 있었다.
“자꾸 사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너한테 제대로 된 권한이 없어서 그런 거다. 지금은 동등하게 보여도 나중엔 네가 그 사람들 전부의 고용주가 되는 건데 이런 문제가 지속되면 나중에 너한테도 독이 돼.”
“회사 물려받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제가 왜 그 사람들 고용주가 돼요. 기장들은 다 평등해요. 연차만 있죠.”
“허튼소리 그만하고 말 들어. 내주에 널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이다. 마침 기회가 좋아.”
얇은 서류가 태주의 앞에 놓였다. 새로운 대형기 몇 대를 들여오는 일이었다. 이 한 대의 가격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라 여러 대를 한꺼번에 들여오는 일은 반드시 뉴스거리가 된다. 큰 사건 없이 무난하게 운영되고 있는 기업의 분위기상 태주를 공개할 핑계가 마땅찮았는데 이걸 이용해서 해 보겠다는 심산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