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경비에게 맡길까, 항공사에 연락을 해서 전해 줄까 고민하던 그는 경비실 부스를 힐끗 쳐다봤다. 전자는 자신이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성질 나쁜 한태주에게 공개하게 되는 셈이라 꺼림칙했고, 후자는 항공사 측에 태주가 프로 의식 없는 사람으로 눈도장 찍힐까 걱정이 됐다. 그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계기를 제공한 게 자신이라는 건 바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한국 항공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하는 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윤아, 난데.”
- 응, 차영아. 네가 어쩐 일이야?
“지금 통화 괜찮아?”
- 괜찮아. 안 괜찮아도 괜찮아.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며 차영은 제 차에 기대어 섰다. 그러고는 한쪽 귀와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채로 지갑 안을 좀 더 세세하게 들여다보았다. 면장들을 제외하면 검은색과 금색 신용 카드가 각각 한 장씩 들어 있는 게 다였다. 성격이 심플한 편인 모양인지 현금도, 영수증도, 명함 따위도 전혀 없었다.
다만 가장 안쪽에 아주 낡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안 돼. 이차영. 안은 손대지 마.’
머리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손이 절로 움직였다. 그 뻔뻔하고 무례한 인간이 소중하게 다루며 이 안쪽에 사진까지 넣어 다니는 사람이 누구일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호기심이 일었다. 한쪽 눈을 슬쩍 감은 채 사진을 꺼내 보니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남녀였다.
이윽고 눈꺼풀이 감겨 있던 그의 한쪽 눈이 천천히 뜨였다.
‘여자 친구가…… 아니네.’
그럴 이유가 하등 없는데 왜 묘하게 안도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사진 안의 등장인물은 의사들, 혹은 나이가 꽤 앳돼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수련 중인 의대생들 같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니 여자의 배가 꽤 불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사진인 듯했다.
“혹시 너희 항공사 한태주 기장 운항 스케줄 좀 알 수 있어?”
- 한태주 기장? 한 캡 스케줄을 차영이 네가 왜?
“있어, 없어.”
-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운항이랑 객실 승무원 일정은 다 같은 데 뜨거든. 기다려 봐. 어……. 일단 내일은 없고 글피 런던 같은데? 인천발 히드로 공항 도착이고, 4박 5일 왕복. 야, 그런데 차영이 너 왜 갑자기 전화해서 이런 어마어마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래. 둘이 어떻게 알아? 아니, 잠깐만. 한 캡이 얼마 전에 관제탑 가서 지랄한 거 상대가 너야?
“그렇게 급히 한꺼번에 여러 가지 말하다가 숨 안 가빠? 아무튼 고마워. 끊는다.”
- 차영아. 야, 이차영!
그는 통화가 길어질 것을 우려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너 한 번만 더 나 관제탑까지 올라오게 해.〉
한태주가 엄중하게 경고하듯 내뱉고 떠난 말이 아직까지도 차영의 귓가에 생생했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 일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조종석에서는 가장 먼저 탓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착륙 직전에 교신하는 비행장 관제사들이니 두 직업군은 꽤 종종 마찰을 빚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문제를 끝내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였다. 실수가 발생했대도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차영 자신도 관제사 생활 몇 년 만에 거기까지 올라온 기장은 처음이었던 터다.
“일 잘하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기본이 안 돼 있네.”
일단 사진을 다시 넣어 지갑을 고이 챙긴 차영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그것을 열어 면장에 있는 태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신이 작정하고 정성껏 빚어 놓은 듯한 또렷한 이목구비가 제일 먼저 눈에 보였다. 덕분에 차영의 뇌리에 생생할 정도로 선명한 화면으로 그의 실물이 스쳐 지나갔다.
“넌 이 얼굴을 왜 그딴 식으로 쓰냐. 얼굴 믿고 꼴값은.”
탁, 야멸치게 지갑을 닫은 차영은 일단 그것을 챙겨 들고 경비실로 향했다. 부스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경비원이 차영을 발견하고 눈인사했다.
“2층?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네. 저, 2층인데요. 저기, 한태주라고……. 여기 몇 층 몇 호 사는지 확인될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그분 물건도 여기 좀 맡기고 싶은데요.”
“누구요?”
“한태주요. 한, 태, 주. 한국 항공 기장이거든요.”
주거자 명단을 눈으로 훑던 경비원이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한태주? 그런 이름은 없는데?”
“없다고요?”
“네, 우리 동은 한 씨가 없어요. 그 이름 확실해요?”
차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이곳에 산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공항에 갖다주는 방법밖엔 없었다. 비행이 있는 글피까지는 반드시 돌려주어야 했다.
“아, 그래요.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알겠습니다. 항상 고생 많으세요.”
그는 어설프게 묵례한 뒤 지갑을 신줏단지처럼 꽉 쥔 채 공동 현관으로 들어섰다.
* * *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차영은 고민 끝에 다시 지상 주차장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어제 주웠던 한태주의 지갑이 들려 있었다.
실은 오늘 출근해서 이 물건을 한국 항공 사무실에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말짱 허사였다. 그곳에서는 물품 보관이 원칙적으로 불가하니 청사 내부가 아닌 공항에서 떨어져 있는 운항 관리실에 문의하라는 답변만 받았던 것이다. 한태주의 연락처라도 달라고 해 봤지만 개인 정보 유출은 불가하다고 하는 바람에 그쪽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 애물단지를 다시 버릴 수도 없고.”
이걸 돌려주기 위해 종일 한태주의 이름만 몇 번이나 불러 댔는지 모르겠다.
그는 제 지갑의 행방이 궁금하지도 않은 것일까. 면장도 면장이지만 당장 신용 카드들이 필요할 터다. 어쨌든 자신으로선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가 일거리만 떠안고 말았다.
한국 항공 운항 관리 사무실이 있는 위치를 휴대폰으로 검색하던 차영은 제 차 앞에 우뚝 섰다. 주소지를 확인하고 차 운전석 문을 열려고 하는데 때마침 공동 출입문에서 만사 귀찮은 얼굴로 나오는 편안한 차림의 남자를 목격했다.
“어?”
짧은 탄성을 듣고 그도 차영을 발견한 것 같았다.
예의 한태주였다.
제복을 입었던 덕에 더 반짝반짝해 보이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제 보니 아무렇게나 하고 다녀도 눈에 띄게 근사했다. 차영은 괜히 다시 손에 땀이 차는 기분이었다. 거주자 명단에는 없다고 들었으나 역시나 자신과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게 맞았던 모양이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나.
“저기요.”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차영의 부름을 무시했다. 그러나 걸음은 정작 가까이 다가오는 모양새가 아이러니했다. 아마 자신이 아니라 이쪽에 세워 둔 차량 쪽에 용건이 있는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멀리에서 시동을 켜고 걸어와 조수석의 문을 벌컥 여는 것이었다. 차영이 그의 어깨 너머를 힐끗 보다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요, 한태주 기장님.”
또 대답이 없었다. 마지못해 차영이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타악! 거칠게 태주가 밀어내는 바람에 도리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차영이 놀랐다. 아무리 남의 체온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무척 예민한 반응이었다.
잠시 오해인가도 싶었으나, 이 느낌이 실제였다는 것을 다름 아닌 태주의 표정이 직접 입증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힐난이 담긴 눈빛으로 차영을 주시했다.
“너 뭐야. 이 동네에 집이 몇 챈데 왜 하필 내 집 앞에 나타나. 스토커야?”
기가 막힌 차영은 차마 할 말이 없어 헛웃음만 터트렸다.
“제가 왜 그쪽을 스토킹해요. 저한테 이러시면 후회하실 텐데요.”
“뭐에 꽂혔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게이 아냐. 기분 나쁘니까 꺼져.”
“아니, 저기……. 뭐가 엄청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댁을 쫓아온 게 아니고 저도.”
“뭐 해? 꺼지라는데.”
찾는 물건이 없었던 모양이다. 차영의 해명을 끝까지 들어 주지도 않은 태주가 조수석 차 문을 도로 닫더니 차체의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운전석으로 가려고 하기에 차영이 황급히 말로 붙잡았다.
“저기, 그쪽 면장 떨어뜨리셨거든요!”
그제야 그가 멈춰 섰다. 왜 하필이면 한태주의 물건을 주워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차영은 이 면장을 발견한 자신의 눈과 주운 손을 속으로 원망하면서 그에게 접근했다.
“잃어버리셨죠, 어제.”
“어제?”
“모르셨어요? 면장은 그렇다 치고 돈 쓸 일도 없었나 봐요?”
“종일 잤어.”
그는 잠들어 있어서 없어진 줄도 몰랐는데 생판 남인 자신은 이것 때문에 종일 터미널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고군분투한 게 허탈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지갑째로 건네주니 그가 미심쩍어하는 눈길을 보내며 받아 들었다.
“참고로 저도 게이 아니고요. 이 건물 입주민입니다. 지갑 떨어뜨리셔서 드리려고 했던 거예요.”
태주는 대답도 하지 않고 차영이 보는 앞에 지갑 내부를 하나씩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 모양새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며칠 전 관제탑에서 마주쳤던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차영도 당장 그에게 불쾌하다고 한 소리를 했을 것이다.
제 물건을 차영이 손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라야 태주가 이동했다. 고맙다는 말조차 없었다.
‘언젠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거라고 훈계하더니.’
미안해, 혹은 고마워. 그런 기본적인 인사에 인색한 사람은 여태까지 겪어 온 바로 상대하기 쉬운 사람들은 아니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남의 다친 마음 따위를 어루만져 줄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차영은 그런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솔직히 좀 어려웠다. 그는 승객 수백 명의 목숨을 하루가 멀다 하고 사수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제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친절한 사람은 못 될 터다.
남겨진 차영은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보다 앞서 공동 현관에 들어서고, 승강기의 버튼을 눌렀다. 태주가 내려왔던 뒤로 그 자리에 계속 머물렀던 덕분에 문이 바로 열렸다.
그리고 어느 틈에 차영의 뒤를 이어 느긋하게 승강기 앞에 도착한 태주가 이미 안에 탑승해 있는 대상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혹시 타실 거예요? 제가 스토킹 할까 정 염려되시면 저 먼저 올라가고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기기에 올라탔다. 차영이 이미 불을 켜 놓은 2층을 힐끗 보더니 ID카드를 대서 7층을 눌렀다. 자택과 직장. 짧은 시간 안에 서로의 주요 행동반경 일체를 파악당한 기분을 각자 느끼고 있었다.
“2층 정도면 걸어 다니지. 문 한 번 열리는 데 쓰이는 에너지가 얼만 줄이나 알아?”
“저도 관리비 그쪽이랑 똑같이 내거든요.”
“내가 관리비를 얼마 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너 진짜 스토커 아니야?”
“계약서 쓸 때 전 가구 공통이라고 들었어요.”
“너…….”
태주가 말문을 다 매조지하지도 못한 사이, 승강기가 2층에 도착해 아가리를 벌렸다. 차영이 급히 내린 뒤 태주를 쳐다보았다. 그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제 짐작과 달리 차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 조금 당황했다.
착각일까. 묘하게 관능적인 시선이었다. 그걸 인지하자 갑자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 댔다. 그 바람에 방어적으로 나서게 됐다.
“그런데 진짜 언제 봤다고 자꾸 반말…….”
“우리 가능하면 마주치지 맙시다, 이차영 관제사.”
차영의 말을 불쑥 끊은 그는 대답 같은 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오른손을 움직였다. 닫힘 버튼을 누른 모양인지 완전히 벌어져 있던 문이 서서히 간격을 좁혀 나갔다. 어느 틈에 굳게 닫힌 문이 차영의 앞에 있었다. 계기판을 올려다보니 기계는 착실하게 숫자를 쌓아 나가는 중이었다.
“허…….”
허탈한 한숨과 함께 돌아서려던 그는 무심코 복도의 창밖을 쳐다봤다. 요 며칠 반짝 청명한가 싶더니 다시금 흐린 날씨였다. 밤하늘이 맑지 않았다. 처음 한태주를 관제탑에서 만나게 됐던 그날처럼 말이다. 동료들의 앞에선 괜찮은 체했지만 차영은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여러 가지 의미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힐난하고 사라진 그의 모습은 평생이 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차영은 승강기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곤 씩씩하게 걸었다. 그러다가 뭔가에 이끌린 사람처럼 우뚝 멈춰 서서 굳게 닫힌 승강기 문을 돌아보았다. 태주의 나지막한 음성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뭐에 꽂혔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게이 아냐.〉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정말.
불쾌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