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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3화 (3/144)

3화

당황한 차영이 열없이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였다. 어쩌면 불의의 사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던지 시의적절하게 탑장이 두 사람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제 몸을 끼워 앞뒤를 말렸다.

“한 기장님 이쯤 하시죠. 이 일은 이차영 관제사 잘못이 아닙니다. 저희 측에 말 못 할 사정이 좀 있어서……. 탑장인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백방으로 더 신경 쓸 겁니다. 저도 항시 긴장하고 있겠습니다.”

“부하 직원 보호하는 눈물 나는 사수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만 저 남 살 닿는 거 몹시 싫어합니다. 비키시죠.”

양쪽의 눈치를 보던 탑장이 조심스레 비껴 나자, 태주가 차영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의 시선이 가슴팍 위에 어설프게 달려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명찰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너 한 번만 더 나 관제탑까지 올라오게 해, 이차영.”

“멋대로 올라와 놓고. 누가 올라오라고 부탁이라도 했어?”

“일을 똑바로 하라고. 천운이 두 번이나 따라 줄 것 같아? 사람 죽는 거 생각보다 훨씬 쉬워. 우리 손에 승객들 목숨 달렸어. 그거 제대로 지켜 줄 자신 없으면 관둬. 너 같은 무책임한 관제사 필요 없으니까.”

가볍게 어깨를 밀리면서도 차영은 답하지 않았다. 태주도 더 부딪칠 셈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나지막한 경고 후에 그대로 냉정하게 나가 버렸다. 제 업무를 하고 있던 관제사들과 차영을 이런 상황에 몰리게 만든 신입이 남겨진 그를 난감한 낯빛으로 주시했다. 그는 태주가 사라진 뒤라야 어이없다는 양 혼잣말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이미 한태주의 뒷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는데도 가슴이 계속 세차게 뛰었다. 그가 남기고 간 음성과 향기, 표정 따위의 미립자들이 머릿속을 계속 어지럽히는 듯했다. 두근거리는 이유가 겁이 나서인지 떨려서인지 분별이 안 갔다. 둘 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실물은 처음 본다. 한국 항공 역사상 최연소 파일럿에 저렇게 잘생겼는데도 객실 승무원들이 안 넘보는 이유가 저 성격에 있었네. 관제만 10년이 넘게 했는데 여기까지 올라온 기장은 또 처음이야. 욕봤다, 야.”

“탑장님도 이런 꼴 처음 보세요?”

“그래. 항공사 기장들 저 잘난 맛에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데. 이 꼭대기까지 올라오겠냐고. 너희도 앞으로 못 볼걸. 다들 돈 주고도 못 보는 진귀한 구경 했다.”

기가 막힌 차영은 대꾸 대신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이질감이 느껴지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듯 부드러운 피부 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 *

남들은 재직 중 한 차례 방문하기도 어려운 한국 항공 본사 인사 위원회실에, 태주는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 방문이었다. 그가 이 항공사로 이직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조금 넘은 시기였으니 아주 잦은 횟수였다.

공항 청사도 아닌 본사 빌딩으로 태주가 소환되는 이유는 늘 같았다. 비행 시 승무원 간의 크고 작은 마찰 때문이었다. 그건 운항 승무원인 태주와 객실 승무원 간의 갈등 때문일 때도 있었고, 같은 운항 승무원끼리의 문제일 때도 있어 대중없었다. 그리고 한국 항공에는 직원들 간의 분쟁 상황이 생겼을 때 조정을 하는 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그는 해당 인사 교육 과정을 지금 막 마치고 서류를 작성하는 참이었다.

“한 기장님께서는 교육 과정에만 벌써 다섯 번째 소환이시네요?”

인사 위원장이 서류를 들춰 보다 무심히 물었다. 그와 태주가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보게 된 것도 꼬박 다섯 번째여서 서로의 대화 양상을 대략적으로는 파악하고 있었다. 위원장은 지금 그의 잦은 인사위 출석을 비꼬고 싶은 것이다. 그걸 눈치챈 태주는 상대가 보고 있는 서류를 제 손으로 슥 눌렀다.

“피곤하게 굴지 맙시다. 오늘은 제가 같이 비아냥거릴 컨디션이 아닙니다.”

“뭐 저도 썩 컨디션이 좋은 건 아니라서……. 아무튼 이쪽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태주가 무성의하게 사인을 하고 있는데, 위원장이 덧붙였다.

“이 정도 경고가 누적되면 원래는 본사 차원에서 이에 걸맞은 조치가 취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번 일도 한 기장님이 까마득한 위 기수 선배한테 대드는 바람에 탄원이 들어온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 교육으로만 넘기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혹시 아버님이 뭐 중요한 일 하시는 분이십니까?”

“중요한 일 하시던 분은 맞는데 한국 항공이랑은 관계없습니다.”

“대체 뭐 얼마나 중요한 일 하시는 분이시길래……. 정치하세요?”

그는 의아한 듯이 물으면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태주는 정말로 그의 말에 대거리해 줄 기분이 아니라는 양 어깨만 으쓱할 따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일어서려 주변을 정리했다.

“한 기장님, 다음번에 오실 때는 반드시 제복을 갖춰 입고 오십시오. 징계받으시는 중이니 복장 규정을 엄수하는 게 원칙입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도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고 가셨습니다. 이제 안 믿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 회의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안 실장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위원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한국 항공 회장의 비서실장 겸 기획 조정실의 실장까지 맡고 있는 안진석 실장이었다. 위원장이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는데도 태주는 미동이 없었다. 그걸 본 위원장이 눈치를 줬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한 기장님 뭐 하십니까, 안 일어나시고. 안진석 실장님이십니다.”

“전 괜찮습니다. 제가 한 기장님께 따로 용건이 있으니 위원장님은 이만 나가 보시죠.”

대답은 안 실장을 통해서 나왔다. 분위기를 읽던 위원장이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그를 따라 안 실장을 따라온 수행 비서 한 사람이 나가 뭔가를 속닥거리는 모습이 태주의 눈에도 들어왔다. 아마 오늘 이곳에서 안 실장을 본 일을 대외에 함구하라는 지시일 터다.

끼익. 문이 닫히고 회의실 안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왜 오셨어요.”

“인사위 회부 다섯 번째부터는 운항 단기 정지와 감봉 절차에 들어갑니다. 모르십니까?”

“그래요? 몰랐습니다. 한 열 번쯤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권고사직? 해고?”

“정말 왜 이러십니까. 일부러 이런 행동을 반복하시는 거라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심지어 이번 비행 때에는 관제탑까지 가서 무례한 행동을 하셨다면서요.”

“명백히 관제사 판단 실수가 마찰 원인이었습니다.”

“녹취된 음성 확인해서 저희도 정황 파악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지만 거긴 저희 항공사 관할 구역이 아니라 공항 권역입니다. 문제가 커질 시 도와 드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항공사를 통해 공항 공사와 국토 교통부 측에 정식으로 항의를 하셨어야 합니다.”

“뭐 정 곤란하면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안 도와주시면 되겠고요.”

“도련님.”

시종일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던 태주가 미간을 확 구겼다.

“조선 시대예요? 아직도 도련님 타령입니까, 징그럽게. 한 기장이라고 부르세요.”

안 실장이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회장님께서 자택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뵙자십니다.”

“만날 약속은 양쪽이 동의해야 잡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전 컨디션이 영 꽝이라, 돌아가겠습니다. 우리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자고 전하시고요.”

“지금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려 달라고 안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미리미리 말을 해야죠. 안 그래요? 난 그 어른이 만나자고 하면 내가 오늘 죽는 걸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서요. 안 실장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비꼬듯 내뱉은 그는 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안 실장이 어떻게 손을 써 볼 틈도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겨진 안 실장이 출입문 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니, 수행 비서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그냥 보내 드려도 괜찮을까요?”

“회장님도 이럴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야. 자넨 인사 위원장한테 오늘 일 함구하라고 한 번 더 분명하게 언질 넣고 천천히 올라와.”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수행 비서와 테이블 위의 서류를 번갈아 보던 안 실장도 뒤이어 일어섰다.

* * *

공항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의 주택 지구에는 한 집 건너 한 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항공사에서 자체적으로 건물을 매매해 사원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본인이 공항과 가까워 직접 구매하기도 하는데 태주의 경우는 후자였다.

고급스러운 주택 단지의 한 건물 앞 야외 주차장에 태주를 태운 차가 도착했다. 신경질적으로 차에서 내린 그는 조수석에 내던져 놓았던 휴대폰 따위의 소지품들을 챙겼다. 한꺼번에 물건들을 꺼내는 와중에 뭔가가 툭 떨어졌는데 때마침 뒤편에 한국 항공의 객실 승무원이 지나가면서 묵례를 하는 통에 태주는 보지 못한 듯했다.

무표정한 태주는 공동 현관으로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한 시간여 뒤, 태주의 차량 바로 옆자리에 다른 차가 한 대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리는 이는 차영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주변이 낯설었던 터에 동네 이곳저곳을 차로 둘러보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차에서 내린 차영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오늘 하늘…….”

노을이 지는 저녁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늘 보다 가까운 곳에서 저 고즈넉한 경치를 만끽해 보고 싶었으나, 차영이 오를 수 있는 자리는 광활한 하늘이 아니라 공항의 관제탑이 고작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가려던 차영은 문득 멈칫했다. 제 발치에 걸리는 물건이 있어서였다. 천천히 주워 들어 보니 납작한 지갑이었다. 안을 열어 보니 조종사의 비행 자격을 증명하는 비행기 면장이 바로 보였다.

“어떤 칠칠맞지 못한 인간이…….”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기장의 이름을 눈여겨보던 차영은 문장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한태주?”

조종사에게 비행기 면장은 목숨 줄이다. 여권 없이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이가 없듯, 이게 없으면 운항을 할 수 없었다. 일단 여기에 이게 떨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오늘이 비행하는 날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이것이 왜 이곳에 떨어져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 야외 주차장은 자신이 거주하는 건물의 거주자만 이용하는 공동 구역이었다.

“설마.”

차영은 약간 아연해진 얼굴로 건물을 올려다봤다.

“에이, 진짜 설마.”

그러나 이미 마음이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는 이 하나의 가정이 가장 사실에 가까우리라는 걸 차영도 알았다. 아마 그는 자신과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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