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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화 (1/144)

1화

* 해치(Hatch) :

[항공] 비행기의 출입·비상구.

조종석 시야에 자욱한 안개가 가득했다. 태양 광선이 한꺼번에 산란하여 흰빛을 띠는 것처럼 눈앞이 탁했다. 낭만적인 황금빛 저녁놀이라든지 운치 있는 불그스름한 석양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맑은 날 찬란한 은하수 같았던 가을 밤하늘은 어느새 뿌연 기운에 휩싸여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한 수수께끼처럼 보였다.

겨우 고도를 낮춰 비행하고 있는 조종사들의 눈앞에 밤의 활주로가 어슴푸레하게 펼쳐졌다.

“젠장.”

기장석에 앉아 조종간을 쥐고 있는 남자의 나른한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날렵하게 뻗은 콧대 아래 조화롭게 자리 잡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시선이 계기판을 정조준했다. 신중하게 고도와 기체의 기울기를 확인하는 그의 어깨에는 책임 기장을 의미하는 네 줄짜리 견장이 달려 있었다.

“타워는 회신이 아직입니까?”

그는 제 옆에서 관제탑과 교신을 시도하고 있는 부기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터라 음성이 퍽 가라앉았다. 부기장은 기장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대답했다.

“네, 기장님. 주파수 잘 맞췄는데도 교신에 계속 잡음이 섞입니다. 일단 홀딩 유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장은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라는 듯 있는 대로 이마를 찌푸렸다.

“차라리 문자 메시지를 보내 보세요.”

“보냈습니다. 전송은 됐는데 타워에서 답이 없어요.”

여전히 관제탑에서는 응답이 없는 듯했다.

그 탓에 그들을 태운 한국 항공 342편은 5분여 전부터 공항 주변의 상공에서 빙빙 돌면서 좀처럼 착륙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관제탑의 착륙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기체 통신 문제인가?”

울림이 좋은 기장의 나지막한 음성이 좁은 조종석 내부에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목소리의 침착성과는 별개로 현재 이 기체는 꽤 위험한 상황에 직면한 상태였다. 자칫하면 승객들의 안전을 위협할 계제가 사방에 넘쳤다.

“아닙니다. 관제탑 문제 같습니다. 터미널과는 무리 없이 교신됩니다. 직접 전화해서 우리 쪽 의사 전달해 달라고 말해 뒀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연락이 없단 말입니까?”

“네, 대체 뭐가 문젠지…….”

“타워는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이 항공편의 책임 기장인 한태주 기장은 계기판을 힐끗 살폈다. 가로로 긴 눈과 늘씬한 콧대가 이상적인 비율로 어우러져 무척 냉정하고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그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야간 비행은 어두운 하늘을 비행한다는 매력만큼 위험 또한 많은 작업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극심한 난기류를 만나 한껏 예민해져 있던 터였다. 밤안개까지 부옇게 떠 있어서 마치 시야가 차단된 채 적진으로 들어가는 듯한 분위기가 물씬했다.

이런 상황에서 착륙을 도와주어야 하는 공항의 조력자인 관제탑이 제 역할을 해 주지 못하니 곤란한 일이었다.

“됐어요. 내가 해 보죠.”

부기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놓자, 태주가 제 쪽의 소형 무전기로 교신을 시도했다.

「여기는 한국 항공 342입니다. 인천 타워, 들립니까? 인천 타워.」

주파수를 맞춰 접근 관제탑 측의 음성을 기다리는데, 마침 침착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여기는 타워, 한국 항공 342. 조금만 더 대기하십시오. 순차적으로 착륙 중입니다.」

상대의 음성을 들은 태주는 멈칫했다. 사람의 육성은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 사람이 백 명이면 음성도 백 개로, 모두 달랐다. 이 관제사의 목소리는 꽤 그럴싸한 얼굴과 차분한 표정이 절로 상상되는 부드럽고 정적인 색깔이었다.

「이제 들립니까?」

- 「네, 잘 들립니다.」

「10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던 이유가 뭡니까. 우리 기체는 상황 보고조차 못 받은 상태로 상공에서 10분째 빙빙 돌면서 대기 중입니다.」

- 「현재 활주로에 기상 악화로 인한 예기치 못한 통제 불능 상태가 발생했습니다. 그 때문에 관제탑 내부에도 약간의 혼잡한 소동이 있었습니다.」

「태풍이 온 것도 아니고 공항에 밤안개 한두 번 낍니까.」

- 「앞 항공기 착륙 중에 바퀴가 빠지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고 이 기체가 안개가 자욱한 활주로에 착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겹쳐…….」

태주는 불쑥 관제사의 말을 끊고 한국말로 응답했다.

“말장난하고 계시네. 관제탑에서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이 순서대로 비행기 착륙시키는 거 아닌가? 앞 기체에 문제가 있었으면 그쪽 칵핏에서 미리 연락을 했을 거고, 날씨는 아까부터 안 좋았습니다. 결국 타워 측이 우왕좌왕하다 실수로 우리 착륙도 지체됐다는 말 아닙니까.”

- 「한국 항공 342. 그래서 제가 지금 상황 설명을…….」

“이 기체 안에 대체 몇 사람이나 탑승해 있는 줄은 아나? 10분 사이 당신들이 몇백 명이나 되는 승객의 목숨을 틀어쥐고 쥐락펴락했다는 것도, 알아? 비행이 장난인가?”

태주와 교신하던 관제사가 잠시 침묵했다. 계속 귓가를 간질이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태주의 귓가에 아주 미약한 잡음만이 남았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자니 다시 관제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한국 항공 342. 경로와 고도 수정 바랍니다. 3,000피트 상공에서 계속 대기해 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착륙 지시 내리겠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 착륙 예정인 항공기 네 대 대기 중입니다.

“놀고 있네. 활주로 하나 따박따박 확보 안 해?”

- 한국 항공 342. 본인 친구랑 통화하는 게 아니라 현재 타워와 교신 중입니다. 존댓말 할 줄 몰라요?

시종일관 날카롭게 반응하던 태주가 한마디를 더 보태려는데, 나이 지긋한 부기장이 괜한 소모전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 기장님. 교신 제가 하겠습니다.”

이 항공기 조종석은 다른 기체들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조종간을 잡은 기장보다 부기장의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이다. 한국 항공 최연소 기장인 태주는 옆의 부기장보다 무려 열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엄연한 상급자였다. 부기장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 하려던 태주가 뿌연 하늘을 힐끗 살폈다. 당장 관제사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항공기를 안전하게 착륙시켜 제게 명운을 맡긴 승객들의 하기를 돕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할 말은 많지만 이쯤에서 관두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소형 무전기를 내동댕이쳤다.

태주가 부기장에게 3,000피트로 기체 상승할 것을 명령했다. 부기장이 레버를 잡는 순간, 관제탑의 지시 사항이 다시 들렸다.

- 「여기는 타워입니다. 한국 항공 342. 천천히 하강해서 활주로에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바람은 330도 방향으로 5노트입니다. 33번 우측 활주로에 착륙을 허가합니다.」

「33번 우측 활주로에 착륙하겠습니다.」

미간을 구기고 있는 태주 대신 부기장이 대답했다.

“랜딩 기어 다운.”

“랜딩 기어 다운. 33.”

조종간을 잡은 두 사람은 서서히 하강해서 착륙을 시작했다. 바람의 저항을 받으며 항공기가 서서히 지상과 가까워졌다.

그들을 실은 육중한 항공기는 광막한 쪽빛 하늘과 반짝이는 별빛을 유유히 가로질렀다. 기체가 낮은 고도를 향해 갈수록, 불빛이 찬란한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꽤 야심한 시각인데도 분주한 공항 주변의 풍경이었다.

전방에 우뚝 선 공항 청사와 탑승동 맞은편 외딴 자리에 관광 명소처럼 자리 잡은 관제탑은, 주광색 조명을 내뿜고 있는 어린아이의 장난감 같았다. 또한 활주로에서 이·착륙을 대기하는 기체들과 인근 도로변을 질주하는 차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안엔 어디론가 떠나고자 마음먹은 누군가가 설레는 마음을 안고 탑승해 있을 것이다. 태주에게는 그 기대를 지켜 줄 의무가 있었다. 그게 이 네 줄 견장의 책임이었다.

이윽고 조종간을 단단히 손아귀에 쥔 태주는 활주로의 붉은 접근등을 어렵사리 찾아 동선을 확보했다.

“100. 미니멈. 50, 40…….”

레버를 잡은 그는 무척 신중하게 정면을 직시했다.

하늘 위에선 한 톨 먼지 같던 지상의 풍경은 차츰 손톱만 한 크기로 커졌다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형태로 변모했다. 이 때문인지 늘 착륙할 때는 수심을 가늠하는 게 불가능한 깊은 바다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듯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그가 지상으로의 착륙을 시도했다.

평평한 땅에 마치 잠수하듯 기체를 내려놓는 움직임이 아주 부드러웠다.

드르륵. 드르륵. 거대한 기체를 지탱하고 있는 바퀴가 묵직한 소음을 내며 땅을 굴렀다.

수 초 후, 칵핏에 있는 그들을 비롯해 승객 수백 명을 태운 한국 항공 342편이 무사히 공항에 발을 디뎠다.

겨우 마음을 놓게 된 부기장이 낮은 한숨을 터트렸다. 객실 승무원에게 걸려 온 인터폰으로 뭔가 지시 사항을 내리는 음성이 태주의 귀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그제야 편안하게 등을 기대 앉아 가볍게 눈을 감았다.

오늘도 무사히.

태주는 무거운 안도로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승객들이 아까 전 난기류 때문에 좀 놀란 것 같습니다. 빨리 하기하겠다고 아우성이랍니다. 문 열겠습니다. 오늘 비행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태주 기장님.”

그는 지친 안색으로 고개만 끄덕이다가, 제복의 셔츠 단추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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