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6 276화 - 더블 데이트, 모유 vs 항문(1)
“후으...... 좋다아.”
로열 한즈 호텔.
밤늦은 산책을 마친 뒤, 야식까지 먹고 돌아온 주하린은 웃는 얼굴로 샤워실에서 나왔다.
개운함.
단순히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와서 개운한 게 아니었다.
그냥, 마음 자체가 개운했다.
뭐, 물론...... 몇 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자신의 방을 찾아와 신경질적으로 잔소리를 하던 언니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언니와 싸우고 나서 마음에 얹혀있던, 마치 체한 것만 같은 먹먹한 느낌과 무거운 감정.
그 불쾌했던 기분들이 그야말로 물에 씻기듯이 사라졌다.
“신기하네......”
하린은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밝았다.
방을 나가기 전 실제로 우울감이 가득했던 얼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냥 단순히 소꿉친구랑 이야기한 것일 뿐인데, 마음이 가벼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진현이나 은주랑 이야기를 하면 편안한 건 똑같나 보다.
‘그런데 왜 그러지?’
묘하게 미스테리였다.
주하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현이가 오랜 친구여서?
아니면...... 으음. 얼굴이 잘생겨서?
생각해보니 진현이 옆에 있으면 냄새도 좋았던 것 같......
콩-
“으, 미쳤나 진짜.”
순간적으로 오늘 만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던 하린은 벽에 가볍게 머리를 박았다.
아무리 첫사랑이라도 그렇지, 10년도 더 된 일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은 뭔가 좀 운명적이기는 했다. 어떻게 딱 그 타이밍에서 진현이가 벤치에 나타났지?
거의 신이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밥상을 차려준 격이었다.
어쨌든 물기를 다 말리고, 집안에서 입는 편안한 옷을 걸친 하린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녀는 곧바로 소설 사이트에 들어가 키보드를 잡았다.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가, 무언가를 적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들었다.
“좋아. 어제 못 쓴 것까지 한 번에 써보자......!”
주하린은 옅은 미소를 띠운 채 자판을 놀렸다.
어제와는 달리 글이 굉장히 잘 써졌다.
만약 혼자서 벤치에 앉아있기만 하다 왔으면 이렇게 잘 됐을까?
‘아마 아니겠지.’
주하린은 키득키득 웃고는 다시 원고에 집중했다.
“휴......”
3시간 정도를 집중하자, 거의 2편 어치의 글이 나왔다.
잘 안 써질 때는 10시간을 고민해도 1편이 안 나올 때가 있는데. 오늘은 대박이었다.
“좋아, 이제 예약 업로드를 시키고......!”
딸깍, 딸깍-
“됐다!”
주하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새벽이 늦었지만, 알찬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주하린은 마지막으로 업로드한 글을 한 번 읽어본 다음, 이내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곧바로 자고 싶을 만큼 졸렸지만, 마지막으로 휴대폰 한 번 확인.
[ 진현이 : 잘 들어감? ]
“아.”
3시간 전쯤 진현이한테 톡이 하나 와 있었다.
주하린은 피식 웃었다.
“자기가 문 앞까지 데려다줬으면서.”
잘 들어가기는 당연히 잘 들어갔지. 그녀는 뭐라고 답장을 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지금이 새벽 4시가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깨우면 좀 미안한데.
“뭐...... 다음에 해도 되겠지?”
어차피 톡이야 매일 할 거고, 앞으로 만날 일도 많을 테니까.
“푸흐으......”
휴대폰을 닫은 그녀는 웃는 표정을 하며 이불을 덮었다.
언니를 만나서 싸웠을 때는, 이렇게 웃으며 잠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주하린은 눈을 감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졌다.
그녀의 시계가, 점점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날씨 좋고~.”
12월 15일.
바깥에 나와서 한껏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오늘은 드디어 델리아와 함께 식도락을 가기로 한 날.
시간도 참 빠르지.
다정이의 시상식이 끝나고, 하린이와 호텔 산책로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한 지도 5일이 지났다.
그래도 그때 하린이와 산책로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게 헛짓은 아니었는지, 그녀와 매일매일 나누는 톡의 수나 친밀도가 확 올라간 느낌이 들었다.
은주도 델리아랑 같이 쇼핑하며 논 이후로 굉장히 분위기가 좋고.
실제로 둘의 호감도는 상당히 높은 상태였다. 아직 히로인으로 등록은 못 했지만, 등록하기 전에도 호감도 자체는 볼 수 있으니까.
[ 이름 : 주하린 ]
[ 나이, 성별 : 22세, 여성 ]
[ 성향 : 중립, 열망, 노력가, 예술가 ]
[ 직업 : 없음 ]
[ 호감도 : 54 ] [ 신뢰도 : 62 ] [ 연분도 : 68 ]
하린이의 호감도는 54에 신뢰도 62.
내가 한 건 별것도 없었는데, 알아서 쭉쭉 오르고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높을 줄은 몰랐다.
호감도 50이면 결코 평범한 사이라고 볼 수 없는데. 왜 이렇게 올랐지?
“음......”
호텔에서 같이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눈 게 그렇게 컸나?
그게 아니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최근 더욱 올라간 외모 능력치뿐이었다.
역시 남자는 얼굴 빨이다 이건가.
외모 능력치가 존나 모든 걸 좌우하는 건가.
[ 이름 : 정은주 ]
[ 나이, 성별 : 22세, 여성 ]
[ 성향 : 선행, 예술가, 노력가 ]
[ 직업 : 미튜브 크리에이터 ]
[ 호감도 : 45 ] [ 신뢰도 : 52 ] [ 연분도 : 76 ]
은주는 호감도 45에 신뢰도 52.
내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모두 100 고정이라서 그렇지, 은주도 상당히 높은 축에 속했다.
심지어 예화는 공략을 시작하기 전 호감도가 한 자릿수였으니까.
일단 하린이나 은주 둘 다. 거리낌 없이 서로 만나고, 놀 수 있을 정도의 호감도는 쌓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등급을 올리고 둘을 히로인으로 등록한 뒤, 공략 스타일에 따라 나머지 호감도를 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뭐, 그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이제는 무슨 공략 스타일이 나와도 잘해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사실 지금도 드림월드나 스킬들을 이용해서 무턱대고 자박꼼 하면 호감도 100을 채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나은 마망한테 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면 가장 중요한 히로인 특성을 둘에게 붙여주지 못하게 된다.
히로인 특성 상점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히로인으로 등록한 뒤, 공략 스타일을 정해 그에 맞춰서 공략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
공략 스타일을 무시하거나 호감도 100을 등록에 앞서 찍어버리면, 말짱 꽝이었다.
특히 NTR 방지용 특성인 ‘철벽’이나 하렘에 꼭 필요한 ‘평화로운 하렘 친화력’과 ‘평화로운 합동 봉사’는 정말 필수 중의 필수니까 꼭 사줘야 했다.
히로인 특성 상점을 열기 위한 최소 공략 랭크는 B.
지금까지 단 한 번도 C등급 이하를 맞아본 적 없으니까, 별로 어려울 건 없겠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검수한 다음 고개를 주억였다.
좋다.
완벽해!
그래서......
이렇게 앞으로의 계획도 창창하고 오늘 날씨도 좋은데......
“......둘이 왜 아직도 안 타고 있어.”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동차 운전석에 탄 채 차 밖을 바라보았다.
집의 주차장.
차고도 열어 놓고 이제 식도락을 출발할 준비를 마쳤는데, 제일 중요한 출발할 사람들이 아직 차에 타지 않고 있었다.
예화랑 델리아.
각각 흑발과 금발의 긴 생머리를 찰랑인 그녀들은 타라는 차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묻자 둘이 동시에 나에게 이르듯 말했다.
“아니, 그게 델리아가 자꾸 조수석에 타겠다고-.”
“예화 언니가 조수석에 타겠다고 해서-.”
찌릿-
둘은 서로 할 말을 하다가 다시 번개와 같이 눈을 마주쳤다.
아니, 평소에는 사이도 좋았는데 왜 저래.
뭐, 지금도 사이가 나쁜 건 절대 아니고, 단순히 잠깐 발생한 말다툼인 것 같다만......
솔직히 이유가 좀...... 어?
앞이나 뒤나 그게 그거잖아.
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응?”
“원래 오늘은 저랑 진현님이랑 둘이서만 식도락 가기로 했잖아요.”
“음. 그렇지?”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끼는 거잖아요.”
“맞아.”
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델리아가 조곤조곤 말했다.
“그런 거면 언니가 자리를 양보해야죠.”
델리아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예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논리는 언뜻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예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
“넌 3박 4일 동안 진현이를 독차지하는데, 난 딱 이틀만 있다가 빠질 거잖아.”
“어...... 네.”
“그러니까 오히려 둘이 있을 시간이 긴 네가 지금은 뒤에 타야지.”
“......네?”
예화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오늘이랑 내일 가는 곳들 전부 예약 따기 엄청 힘든 곳이잖아.”
“......”
“다 내 덕분에 먹는 건데, 한 번쯤은 양보해줘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예화는 델리아에게 전혀 꿇릴 게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델리아는 그녀의 논리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델리아의 모습을 보며 이윽고 승리자의 표정을 한 예화는 흐흥, 하고 웃더니 운전석의 옆자리인 조수석에 엉덩이를 댔다.
세상에.
“그러면 내가 앞에 탄다?”
“......네.”
델리아는 비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뒷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이뤄진 일련의 다툼을 본 나는,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예화를 바라보았다.
“......아니, 공항까지 1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데, 조수석이 그렇게 중요해?”
“당연하지!”
예화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진현님 바보......”
델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흥, 하며 창문 밖을 내다봤다.
‘어지럽네......’
차를 아직 출발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번 식도락은 왜인지 좀 피곤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