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5 275화 - 주인공이 공략당함(15)
“어? 진...... 현?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화들짝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린이가 나를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여기에서 내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왜 여기 있긴.
너 따라왔으니까 있지.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당연히 없는 노릇이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좀 산책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설마 편의점에서 간단한 야식을 사서 호텔 마당을 걸으며 먹고 있는데, 하린이가 보일 줄은 몰랐다.
말을 걸고는 싶은데, 좀처럼 타이밍이 안 나와서 그냥 잠시 그녀를 뒤따라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벤치에 앉길래, 잽싸게 다가온 것이다.
“아니......! 그거 말고!”
하린이는 내가 한 말이 원하는 대답이 되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
“호텔......! 왜 네가 이 호텔에 있냐고.”
아하.
나는 슬며시 웃었다.
“음, 호텔에 왔으니까?”
“아씨...... 그걸 누가 몰라!”
썰렁한 농담에 하린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오늘 여기서 겨울 만화 공모전 시상식이 있었거든.”
“어...... 만화?”
“응, 혹시 알아? 3층 뷔페에서 있었는데.”
하기야 호텔에 살고 있으니 알 법도 하다. 하린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알지. 알긴 아는데...... 너 설마 만화도 그렸어?”
그녀의 눈동자가 방금 나를 보고 놀랐을 때처럼 커졌다.
뭐지?
난 만화 그리면 안 될 것처럼 생겼나......?
어쨌든 그건 아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친한 동생이.”
“아...... 그러면.”
“수상자 초대로 온 거야. 시상식이 6시 반쯤에 끝났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는 좀 뭐해서, 온 김에 호텔에 하룻밤 묵는 거지.”
하린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아니, 동생이랑 같이. 지금 나 빼고 다 자고 있는데, 나는 잠이 좀 안 와서. 산책 좀 나왔어.”
“아, 그, 그렇구나......”
하린이는 대답과 동시에 입술을 다물었다. 순간 들썩이던 공기도 잠시 조용해졌다.
겨울밤의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오우야.’
이렇게 보니 예쁘긴 진짜 예쁘네. 무슨 영화의 여주인공 같다.
나는 그녀가 조금 어색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걸 보다가, 이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보다, 마실래?”
“응? 뭐를......?”
“이거. 아직 안 딴 거야. 사과의 의미로 줄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캔 음료 하나를 흔들며 내밀었다. 하린이는 얌전히 내가 내민 캔을 건네받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과? 그런데 무슨 사과?”
“너 볼에 음료 댄 거.”
그녀의 볼이 불그스름했다. 나는 눈길로 아까 음료를 댄 그녀의 오른쪽 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설마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어. 울기까지 할 줄이야.”
“무...... 우, 울다니!?”
하린이가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발뺌하는 그녀를 보며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아니, 방금 울었잖아.”
“아니, 안 울었는데?”
“안 울었다고?”
“응......”
“그럼, 거기 난 눈물 자국은 뭐야.”
“아, 이건......!”
12시가 다 돼가는 밤이었다. 하지만 호텔의 산책로라 그런가, 주변은 어두컴컴해도 조명이 벤치를 비추고 있어 하린이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그녀의 양 눈가에는 살짝 흘러나온 눈물과 더불어, 물방울이 조금 맺혀 있었다.
아마도 아까 전에 싸운 것 때문에 그렇겠지.
하린이가 내 시선에 얼굴을 획 돌리더니 손으로 눈가를 스윽스윽 닦았다.
“이건...... 그으, 냥 밤공기가 차가워서 잠깐 나온 거야.”
“흐음, 그래?”
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하린이가 눈을 치켜떴다.
“씨, 야. 안 울었다니까?”
“하하,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하린이는 나를 가늘게 흘겨보다가 이내 내가 건네준 음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근데 이거.”
“응?”
“원래 너 마시려고 한 거 아니야?”
“맞는데, 자판기 하나 더 있잖아. 또 뽑으면 되지.”
나는 얼른 벤치 근처에서 빛나고 있는 자판기로 가 음료를 뽑았고, 금세 돌아와 하린이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나는 그녀 쪽으로 캔을 내밀었다.
“자, 건배.”
“갑자기 웬 건배?”
“그냥.”
“피......”
하린이는 그게 뭐냐는 듯 웃으면서도 내 음료 캔과 캔을 맞댔다.
그녀가 음료에 입을 가져다 댔고, 나는 내 음료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도 몇 마디 대화밖에 나누지 않았는데, 그녀는 처음 벤치에 앉았을 때보다는 훨씬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료가 반쯤 비워졌을 때, 나는 슬며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다, 너.”
“응?”
“무슨 일 있었어?”
내가 그렇게 묻자, 하린이가 몸을 흠칫 떨었다.
“어? 왜, 왜......?”
“그냥 딱 봐도 고민 있어 보이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하린이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런 태도면 누구라도 알겠다.
“고민 있어 보이는 표정을 하니까 알지.”
“그, 런가?”
“그래. 옛날부터 너 맨날 무슨 일 있으면 혼자서 끙끙 앓았잖아. 근데, 아무리 앓아봐야 얼굴에 다 티가 난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린이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가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참나, 뭐래. 올해 처음 만났을 때는 내 얼굴도 못 알아본 주제에.”
“야, 그건 반칙이지. 거의 10년 만에 본 건데 어떻게 알아봐.”
“푸흐.”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자 그녀가 옅게 웃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나로 괜찮으면 말 해봐. 상담해줄게.”
“흐음...... 상담 말이지?”
하린이가 순간 야시꾸리한 눈빛으로 나를 슬쩍 보았다. 그녀는 내가 준 캔 음료를 양손으로 감싸다가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별건 아니고...... 언니랑 좀 싸웠어.”
“언니랑?”
나는 순간적으로 호텔 복도에서 본 싸움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누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하린이였구나. 그럼 그 여자가 하린이의 언니인가? 진짜로?
“응...... 나 이번에 대학 조기 졸업했거든. 말했지? 우리 아빠가 한즈 브랜드 가지고 있다고.”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이의 부모님이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며칠 전에 은주랑 같이 그녀를 만났을 때였다.
지금은 어디 사냐는 은주의 질문에 하린이가 한즈 호텔에 산다고 대답했고, 한즈 호텔에 어떻게 사냐며 호들갑을 떠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녀가 호텔 대표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린이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대학 끝나면 부모님 밑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내가 고집을 피웠어.”
“어떻게?”
“그냥 나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하린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아...... 그런데 잘 될 리가 없지. 부모님은 당연히 거절하셨어.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해서 1년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언니는 그걸 몰랐거든.”
“그래서 싸운 거야?”
“응.”
하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언니가 찾아왔어. 시간 낭비래.”
하린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빙빙 돌렸다.
“그냥 언니는 옛날부터 정말 천재였어. 뭘 시켜도 그냥 기계처럼 딱딱 해내고...... 근데 난 그게 힘들었으니까. 언니처럼은 못 하겠고 그냥 남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건데......”
하린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오늘 언니가 한 말을 들으니 어쩌면 내가 정말로 어리광만 부리고 있는 걸지도,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그랬다고. 하하......”
말을 마치고 나자 하린이가 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나는 그녀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그래서 그 1년은 압수당한 거야?”
“응?”
그녀는 내 질문에 얼굴을 기울이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아니야. 그냥 언니랑 싸운 게 끝이야. 잔소리만 엄청나게 들었지, 으으.”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1년 동안 뭘 할지는 정했어?”
“응? 당연하지.”
“준비는, 열심히 안 하고 있어?”
“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잘 되고 있지는 않지만...... 응, 열심히는 하고 있어.”
“그럼 된 거 아니야.”
내가 가볍게 말했다.
“애초에 1년이 시작도 안 했는데, 안 될 거라는 건 없지. 넌 되게 성실하니까 분명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성실?”
하린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흐음......? 내가 성실한지는 어떻게 알아. 자, 내가 성실하다는 판단 근거는?”
갑자기 그런 걸 물어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뭐라고 대답할지 순간적으로 고민하다가, 그녀의 옛날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 초등학교 때 숙제 안 해간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무...... 숙제?”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답하자, 하린이가 내가 뭘 들은 거지 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 그게 뭐야. 그게 성실한 거야?”
“당연하지. 그리고 학교 지각한 적도 한 번도 없고.”
“뭐래, 그럼 세상 사람들의 50%는 성실하겠네.”
하린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는 그 뒤로도 농담을 몇 개 던지며,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쪽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하린이가 한결 편해진 표정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야, 이거 상담이 안 되는데. 어쩔 거야.”
“그게 되면 내가 상담사를 하고 있겠지. 뭐, 원래 친구한테 하는 상담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푸, 잘나셨어요.”
그녀는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찰랑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뭐, 이걸로 그래도 밤 인사는 되지 않았을까.
나는 속으로 썩 만족한 채 벤치에서 일어나, 근처의 쓰레기통에 다 마신 음료 캔을 버리고 잠깐 스트레칭을 했다.
하린이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 벌써 들어가게?”
“벌써라니, 지금 12시 다 됐어.”
“아......”
“왜, 들어가기 싫냐?”
“아, 아냐, 아냐! 나도 가야지.”
하린이는 내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쓰레기통에 캔을 버린 뒤, 내 근처에 섰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데, 뭐.”
“응?”
“아직 들어가기 싫으면, 좀 더 걸어도 되고. 그 정도는 같이 해줄게.”
하린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눈빛이 아니라 뭔가 끌리는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뭔데, 왜 혹해?
이게 돼?
나는 말을 이었다.
“아니면 뭐라도 먹을래? 상담이고 나발이고 솔직히 스트레스 푸는 데는 먹는 게 짱이잖아.”
“어? 야식?”
“응.”
“......그러다 살쪄서 더 스트레스받으면?”
“그건 내일의 나한테 맡기는 거지.”
내가 따봉을 날리며 좋은 방법이지 않냐며 말하자, 하린이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뭐 먹게, 근데 사준다고?”
“응. 생각해보면 나 옛날에 너한테 이런 식으로 엄청 많이 얻어먹은 것 같아서. 그것도 갚을 겸.”
치킨, 피자, 떡볶이, 순대, 오댕, 불량식품, 등등......
초등학교에 다니던 6년 동안 나는 하린이에게 얻어먹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특히 하린이네 집에 놀러 갔을 때마다 진수성찬이 푸짐하게 나왔지. 하린이도 나나 은주의 집에서 함께 잘 때가 많았지만 우리는 딱히 무언가를 잘 차려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말하자 하린이가 나를 흘겨보았다.
“흐음......? 그럼 예전에 내가 사준 것들을 이번 한 번으로 퉁 치시겠다, 이건가?”
“스읍...... 안 되나?
하린이가 팔짱을 꼈다.
”뭐, 안 될 건 없는데. 너 옛날에 나한테 얻어먹은 거 다 갚으려면...... 농담이 아니라 치킨 10마리는 사 줘야 돼. 아니, 아니지. 50마리.”
“50마리나?”
“응, 거의 100만 원어치는 사 줬지. 아마. 그것보다도 많나?”
어...... 아마 그것보다 훨씬 많을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밤길을 걸으면서 옛날에 자신이 사준 게 얼마나 되는지, 하나하나 나열하며 추억을 되새겼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추임새를 넣어줬고.
음, 뭐......
나쁘지 않은 산책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