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4 274화 - 주인공이 공략당함(14)
들려온 것은 여자 둘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은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쪽과는 반대편의 복도. 안내판를 바라보니 그쪽은 관계자용이라 비관계자는 출입 금지라고 적혀있었다.
‘그래도.’
흠. 궁금한 건 못 참지.
특히 싸움 구경은 말이야.
나는 관계자용이라고 적혀있는 복도 쪽으로 들어가 ‘ㄱ’ 자로 꺾이는 벽면에 몸을 댄 다음 슬쩍 얼굴만 내밀어 상황을 보았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하...... 너 진짜 그럴 거야?”
복도의 끝 쪽에는, 한 명의 여성이 호텔 문을 발로 걸치며 안을 바라보고 화내고 있었다.
‘응?’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 싸움을 보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호텔 문밖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좀 낯익었다.
‘어? 저 여자는 분명 아까 시상식때......’
소리치고 있는 여성은 몇 시간 전, 겨울 만화 시상식에서 잠깐 얼굴을 비춘 그 눈매가 날카로운 여성이었다.
이야, 어쩐지.
눈매가 딱 봤을 때 엄청 날카롭다 싶었는데, 역시나 화내는 것도 굉장히 무서웠다.
그래도 예쁘긴 굉장히 예뻐 누군지 싶었는데, 여기서 또 볼 줄이야. 내가 여자를 보며 조금 감탄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빨리 나가아!”
“이게 정말......! 아!”
호텔 방 안쪽에서 소리친 여자는 양팔로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는 여성을 밀어냈고, 이내 재빠르게 문을 닫아버렸다.
쾅-
철컥-!
“야! 이거 열어!”
쾅쾅쾅-
“야!”
쾅-
“너 이거 진짜 안 열어?”
쾅-
“밑에서 마스터키 가져온다!?”
호텔 밖에 있던 여성은 갑작스럽게 그녀를 밀어내고 닫혀버린 문에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그거 하린이...... 아닌가?’
얼핏 뿐이지만 분명히 저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를 쫓아내는 과정에서, 호텔 문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하린이의 얼굴이 슬쩍 보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지.
생각해보니 목소리도 하린이랑 똑같았다.
그럼 하린이는 저 방에 살고 있는 건가? 그보다 지금 싸우고 있는 여자는......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호텔 손님분이신가요?”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하린이랑 싸우던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가 내게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내가 관계자용 복도에 서 있다는 것이 불쾌한지, 아니면 아까까지 화냈던 게 남아있는 건지 냉기가 풀풀 풍기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손님. 이쪽 복도는 손님용 호수가 존재하질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내가 몰랐다는 듯 답하자, 여자는 눈살을 미약하게 찌푸리더니 마찬가지로 기복 없이 조곤조곤한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이쪽은 관계자 이외에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복도로 진입하기 전에도 적혀있었을 텐데요. 다만, 소란 피운 점은 죄송합니다. 그럼.”
그녀는 자기 할 말만 속사포처럼 팍팍 내뱉더니 이내 휘릭, 하고 나를 지나쳐갔다.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통해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정말 뭐였지 싶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하린이가 살고 있다고 추정되는 호텔 방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근데...... 이거 인사하러 가기가 좀 그러네?’
일단 하린이가 어느 방에 살고있는 지는 알았는데, 저렇게 살벌한 싸움을 하고 난 뒤니까 태평하게 가서 안녕이라고 하기가 그랬다.
지금까지 저렇게 화내는 하린이는 거의 처음 봤으니까.
“......”
그래도 그냥 톡 보내?
지금?
롸잇 나우?
‘아니, 아무리 그래도 타이밍이 좀 에바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그래도 인사하면서 호감을 조금이라도 쌓아 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내려가서 산책이나 좀 하다가 올라올까.’
어차피 곧 있으면 하린이는 은주와 함께 카페 근처로 이사 올 테니까. 기회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굳게 닫혀 있는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호텔 1층으로 내려갔다.
* * *
“하아.”
주하린의 부모님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호텔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도 그녀에게 부모님의 등은 항상 남들 이상으로 커다래 보였다.
두 사람은 언제나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들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누군가와 무언가를 진행하고는 했는데, 주하린은 그런 부모님이 굉장히 자랑스럽고 멋있게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처음에 자신의 부모님처럼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선망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그들은 동시에 굉장히 엄격했다. 막연히 둘의 말을 듣고 잘 따르려고 해도, 하린에게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어를 익히기도 벅찬데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배워야 했고, 교양까지 가르쳤다. 시키는 게 너무 많았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웃는 얼굴로 아버지의 방을 찾아가면, 그는 칭찬의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무표정한 얼굴로 또 다른 책 한 권을 더 쥐여주었다.
[ 아, 아빠 나 다...... ]
[ 음, 그래. 다음은 이걸 한번 읽어 봐라. ]
당근은 없지만, 채찍은 있다. 그래서 조금씩 지쳐갔다.
부모님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언니인 주아림은 그런 걸 당연하다는 듯 해내는 천재였으니까.
[ 엄마, 아빠 미워어! ]
그러던 어느 날은 너무 서러워서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밖에 혼자 나간 적은 일곱 살이 되도록 거의 처음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달리고 달려서 어딘지 모를 공원에 도착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집에 돌아가기가 싫어서 그네에 앉아 슬픈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어떤 남자아이랑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 ......? ]
또래의 애들을 만나는 것 또한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소한 것 하나로 긴장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던 와중, 그런데 갑자기 상대가 거긴 자신의 자리라며 나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 어? 야! 거기 우리 자린데? ]
그냥 평범한 애들끼리의 대화일 수 있었지만, 주하린은 문득 부모님이 있는 집에서도, 없는 이곳에서도 자신은 결국 혼날 운명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울음을 쏟아 내렸다.
갑자기 울자 둘은 엄청나게 당황했는지 허둥지둥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뭐, 둘한테는 언니랑 부모님 때문에 서운해서 울었다고 하긴 했지만......
주하린은 둘의 그런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렇게 시원하게 울어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운 다음에 혼나지 않은 적도 처음이었으니까.
평소에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한테 혼나기 때문에, 하린은 아무리 서러워도 표정을 숨기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감정과 표정은 항상 철저히 관리하고 필요할 때만 꺼내 써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런 철저함이 처음으로 깨진 것이 둘과 만났을 때였고, 우연히 같은 초등학교를 나오고 둘과 항상 붙어 다니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평소에는 표정이 닫혀 있어도 둘과 같이 놀 때면 주하린은 무언가를 딱히 숨길 필요도 없이 자신을 전부 드러낼 수가 있었다.
자유롭다는 게 참 부러웠다.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는 진현이나 은주의 모습에 감화되어 하린은 초등학교 6년 동안 그들과 비슷하게 살았다.
다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서로 떨어지게 되고, 다시 이전처럼 철저한 관리가 뒤따랐다.
어쩔 수 없이 하린은 다시 기계 같은 생활을 보냈다. 성적은 1등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고,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다.
어느 정도는 자유로웠던 초등학교의 6년, 기계 같았던 중, 고등학교의 6년. 대학에 올라가자 몸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애들은 잘만 놀러 다니고 자유롭게 사는데, 대학을 다니면서도. 아니, 앞으로 대학이 끝나도 자신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계처럼 살 수밖에 없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하린은 부모님과 딜을 했다. 조기졸업을 하면 그 앞당긴 1년 동안은 마음대로 하겠다고, 그리고 그 1년 동안 이룬 것으로 앞으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자유롭게 살겠다고.
물론, 부모님은 한 번에 그 딜을 수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을 하자 결국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다만, 조기졸업을 하고 1년 동안 자유롭게 생활한 뒤, 그동안 이룬 것이 자신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가 아니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였다.
다르게 말하면 앞으로 마음대로 사는 건 수락 안 해줄 거지만, 일단 열심히 공부해서 조기졸업을 하면 딱 1년간은 그냥 놀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주하린은 어느 정도 만족했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이루면 분명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1년을 어떻게 보낼지 열심히 계획하고, 지금부터 준비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언니가 들이닥쳐 무슨 시간 낭비냐며 쓰레기 같은 계획 당장 집어 치우라고 소리치기 전까지는.
물론, 쓰고 있는 소설의 성적이 잘 안 나오고 있는 것도 맞았다. 그래도 아직 약속받은 1년은 시작되지도 않았고, 해보고 싶은 건 많은데......
“역시 안 되는 걸까......?”
하린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에 걸친 언니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아프도록 후벼팠다.
솔직히 언니의 말은 타당했다. 어디까지나 돈을 잘 벌고,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목표로 봤을 때, 이론적으로는.
다만, 언니의 말은 자신의 감정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소리였다.
“으, 진짜아.”
주하린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누워 침대를 팡팡 쳤다.
이 기분은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았다.
“푸흐...... 돌겠다.”
괜히 잘못도 없는 이불과 실랑이를 펼친 그녀는 이내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산책이라도 할까......”
하린은 산책을 자주 하는 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밤이 늦고 나서는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었다.
길도 어두컴컴하고, 위험할 수도 있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푸석푸석 해져버린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호텔의 답답한 공기보다는 바깥의 청량한 바람을 맞아줘야 했다.
“설마 대기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옷을 챙겨입고 호텔 문을 연 하린은 얼굴만 빼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언니라면 대기를 탈 바에야 정말로 호텔 보안실에 들어가 비상용 마스터키를 가져올 인간이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이런 미친 한심한 여동생을 봤나!’라고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VIP룸에서 브랜드의 이미지 관련 일이나 검토하고 있겠지.
주하린은 호텔 1층으로 내려가 마당을 천천히 걸었다.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는 산책이었다.
어제는 그래도 단순히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서 한 산책이었다면, 오늘은 그것과는 다른, 그냥 기분 그 자체가 너무 우울해서 한 산책이었다.
그렇게 너털너털 걷기를 10분.
주하린은 어느새 호텔 마당 멀리에 있는 벤치까지 오게 되었다.
“한적하네.”
로열 한즈 호텔은 산 쪽에 건물을 올린 호텔이어서 그런지 부지가 굉장히 커다랬다. 산책을 한다면 그 길이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곳은 사람도 전혀 없고, 울적함을 달래기 좋아 보였다.
“하아.”
벤치에 걸터앉은 그녀는 맞은편 옆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음료수 자판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마치 15년 전 같았다.
엄마, 아빠 미워! 하면서 울며 뛰쳐나왔던, 그때 그 어린 시절의 기억.
지금이야 언니 때문에 기분이 별로라서 나왔고, 예전처럼 그렇게 자신이 어리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읏......”
뭔가 울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려고 산책을 나왔는데, 괜히 더 눈시울만 붉어졌다.
아니, 붉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사실 조금 눈물이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잘 안 됐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랑 15년 전이랑 다른 점이 또 있지.’
그때는 울어도 자신을 위로해 줄 진현이나 은주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으니까.
오히려 자신은 퇴화한 게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이 든 그때였다.
“왜 그렇게 세상 다 죽어가는 표정 하고 있어.”
“......?”
순간적으로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뒤를 바라본 주하린은 아무도 없는 풍경에 당황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린 쪽의 반대편 볼에 굉장히 차가운 무언가가 닿자, 힉! 하고 놀랐다.
“꺗!? 읏! 뭐, 뭐야?”
벌떡-
주하린은 화들짝 놀라서 벤치에서 일어나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어떤 놈이 갑자기 나와서 낯선 사람한테 차가운 음료수를 대는가!
‘겨우겨우 참고 있던 눈물도 조금 다시 나와버렸잖아...... 으.’
단단히 일러줘야겠다고 생각한 주하린이 드디어 눈을 치켜뜨며 상대를 바라보는 그 순간.
“이 밤에 여기서 뭐 해.”
“어......?”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금 여기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빙그레 웃는 얼굴이 비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