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어플-269화 (269/303)

EP.269 269화 - 주인공이 공략당함(9)

“은주랑 되게 잘 놀더라?”

쇼핑을 마치고, 주차장을 걷다가 델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가요?”

“응, 난 질투할 줄 알았는데.”

나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은 모처럼 델리아와 둘이서만 보낼 수 있는 날이었으니까.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분명했다.

우연히 만난 기회여도, 나는 그냥 은주를 보내고 델리아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아마 은주도 그랬겠지. 딱 봐도 나와 델리아는 데이트를 즐기러 왔는데, 지나가다가 소꿉친구를 만났다고 자리에 끼면 이상하니까.

결과적으로는 우리 셋 모두 즐겁게 놀고 끝나서 잘된 일이지만, 원래라면 은주도 불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델리아와 은주가 죽이 잘 맞아서 정말 다행이다.

은주처럼 활발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리는 스타일은,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우니까.

시간이 많이 흐르고 은주도 성인이 돼서 그런 특성이 좀 사라졌나 싶었는데, 역시 은주는 예나 지금이나 은주였다.

같이 오케스트라에 들었을 때도 그랬지. 나와 하린이 말고 다른 사람과는 대화조차 길게 안 했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델리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슬며시 웃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흥, 질투해요.”

그녀는 볼에 바람까지 불어 넣으며 답했다. 삐진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 귀엽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같이 다니자고 한 거야?”

“네.”

“왜?”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내 질문에 델리아는 나를 곱게 흘겨보다 이번에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차피 공략할 거잖아요.”

“응?”

“어차피 은주 언니도 공략할 거니까. 미리 친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오. 그런 속뜻이.

내 물음에 계속해서 삐진 것처럼 대답하고 있지만, 델리아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은주를 만난 다음 나와 사랑의 메신저로 말할 때부터 그랬지.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인다.

나는 무언가를 말하기보다는 그냥 델리아와 맞잡은 손을 깍지로 바꿨다.

“아.”

그녀는 살짝 놀랐는지 나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깍지를 낀 내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그리고 내게 몸을 바짝 붙여온 다음, 그녀는 오리처럼 삐죽이던 입술도 집어넣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저, 진현님......”

“응? 왜?”

“오늘 점심이랑 저녁은 은주 언니랑 셋이서 놀았으니까, 대신 오늘 밤은 둘이서만......”

델리아의 눈빛이 야릇하면서도 순수하게 반짝거린다.

같이 지낸 게 몇 달인데, 그녀는 이렇게 자주 수줍은 처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그녀를 소환하고, 공략을 계속 미뤄 외국 여행지에서 지나랑 몸을 섞었을 때는 질투심에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지만, 금세 다시 귀엽고 순종적인 델리아로 돌아왔다.

가끔 내가 수정이랑 섹스하고 있을 때, 숨어서 자위하는 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음, 뭐 질투할 수도 있지.

나는 바람에 찰랑이는 델리아의 머릿결을 바라보다 히죽 웃었다.

“리아.”

“네?”

“너 얼굴 빨개졌어.”

농담이 아니라 진짜 빨갰다. 추워서 그런 건 아닐 거고.

내 미소에 델리아가 자신의 볼을 살짝 만졌다.

“그, 그런가요?”

“응.”

“그럼 하얘지기 전에 빨리 가요......”

“그럴까?”

끄덕끄덕.

델리아는 얼른 나를 이끌고 오늘 타고 온 자동차 쪽으로 향했다.

나는 조수석에, 그녀는 운전석에.

델리아 정도의 운전 실력이라면 아주 빠르게 집까지 도착할 수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여기, 24시간 주차장이잖아.’

백화점은 이미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옆의 상가 건물과 다른 유흥거리가 많다 보니 지상 주차장은 24시간 운영한다.

그럼 참을 필요가 없지.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기어를 움직이려는 델리아를 그대로 덮쳐버렸다.

“진현님, 이제 출발할 테니 벨트를...... 꺄악!?”

체중을 조금 실으며 델리아의 양쪽 어깨를 붙잡으니 그녀의 얼굴이 코앞에 보인다.

“벨트는 나중에 메도 되잖아. 그치?”

피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겠지만, 델리아는 마치 내게 강제로 힘없이 깔린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저, 정말 진현님......”

델리아한테 꾸준히 천리염기공을 배웠더니, 몸 밖에서 일어나는 마력의 움직임도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델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얼른 마법으로 밖에서는 자동차 안을 볼 수 없도록 결계를 쳤다. 나도 자연스럽게 사일런스 필드 스킬을 사용해 소리를 차단했고.

결계를 친 다음에는 의자 등받이도 쭉 내리는 것이, 사실은 내가 덮칠 걸 다 읽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요망해가지고.

“진현니임...... 응, 으응...... 쫍......”

쪽, 쪼옥-

델리아의 말랑한 입술에 입을 맞추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 안고 따뜻한 숨을 내뱉는다.

나는 그 달콤한 숨결을 느끼면서 더욱 강하게 델리아의 입술을 빨았다.

“으응, 츕, 쪼옵...... 쪼옥. 진현님......”

서로의 입술을 탐하던 입맞춤은 델리아가 먼저 내 이빨을 노크하는 것을 시작으로 거칠어져 갔다.

혀가 섞이고, 서로 타액을 주고받는다.

델리아와 나는 점차 자세를 낮춰가며 각자를 강하게 끌어안았고, 나는 그녀의 따뜻한 혀를 입 안에 맞으며 델리아의의 옷을 조금씩 벗겨나갔다.

* * *

탁, 타닥, 탁-

“흐으음.”

한참 어두워진 밤.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어 밖은 깜깜하지만, 불을 켜놓은 주하린의 방은 모니터와 함께 환히 빛나고 있었다.

눈이 피로해질 것을 대비해 컴퓨터용 안경을 쓰고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던 주하린은, 10분 정도 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후으...... 역시 이 도네이션 채팅은 좀 어색한가?”

뻐근해진 몸을 풀고, 다시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댄다. 주하린은 모니터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끙, 하고 고민하길 몇 초.

“으, 안돼. 역시 이상해.”

미간을 찌푸린 주하린은 몇 줄의 문장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집중해서 쓰고 있지만 역시 잘 써지지 않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주하린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띠링-

“응?”

그때, 휴대폰의 알림이 울렸다.

주하린은 곧바로 폰을 집어 들고, 톡이 온 상대를 확인했다.

“아, 은주.”

어쩐지 답이 안 오더라니.

오늘 4시 즈음에 은주와 진현에게 톡을 하나씩 보냈는데, 진현에게는 곧바로 답이 왔지만, 은주의 답장은 지금에서야 도착했다.

가볍게 은주와 톡이나 하며 머릿속을 환기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하린은, 휴대폰의 잠금화면을 풀었다.

[ 은주 : ( 사진 ) ]

[ 은주 : ( 사진 ) ]

[ 은주 : ( 사진 ) ]

......

“앵?”

그런데, 은주와의 톡방을 터치한 주하린은 뜻밖의 은주의 사진 러쉬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튕기며 은주가 보내온 사진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한 장, 두장, 세장...... 뭐가 많네.”

하늘하늘한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 오락실에서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사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찍은 사진 등등. 여러 가지 사진이 많았다.

“그런데......”

주하린은 미간을 좁혔다.

더욱 특이한 건 은주 혼자 찍은 게 아니라, 옆에 진현이가 같이 나오는 사진도 꽤 보인다는 것이다.

‘어제는 저런 곳 안 갔는데?’

주하린은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래.

어제 셋이서 간 곳은 진현이의 카페와 근처 음식점, 노래방과 공원이 다였다. 사진도 이미 다 교환했고.

주하린은 잠시 어제의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셋이서 만나 노니까 굉장히 즐거웠지.

평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주하린은 민지아 이외에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했는데, 진현이나 은주와 함께 있으니까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편안했다.

특히 노래방이 꽤 좋았다. 진현이와 은주 모두 노래를 너무 잘 불러서 약간 주눅 든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냥 마음 편히 지르니 상당히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저런 옷가게나 오락실은 간 기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은주로부터 톡이 하나 더 도착했다.

[ 은주 : 오늘 쇼핑하러 나갔는데 우연히 진현이 만난 거 있지 ㅋㅋㅋㅋ ]

“아.”

주하린은 은주의 톡에 왜 처음 보는 사진들이 가득한지 이해했다.

잠시 납득한 주하린이었지만, 그녀는 은주에게 답장을 보내기 전에 곧바로 다시 의문을 띄웠다.

‘음......?’

아니, 그런데 쇼핑하러 가서 저렇게 소꿉친구를 우연히 만날 수가 있을까?

주하린은 은주가 보내온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보내온 사진의 수나 장소들을 살펴보면, 진현이와 은주 둘은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논 것 같았다.

보통 우연히 만난다고 쳐도 잠시 이야기나 하지, 저렇게 오랫동안 같이 다닐까?

‘어쩌면......’

주하린은 문득 자기만 쏙 빼놓고 둘이 약속을 잡고 소꿉친구끼리 놀고 온 게 아닐까,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참나.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애초에 그럴 애들이 아니었다.

주하린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다시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공모전에 올린 스트리머물 소설은 성적이 안 나오고, 자신에 비하면 둘이 너무 잘나가고 있으니까 조급함이 든 걸지도 모른다.

40화까지 올려보고 드라마틱한 변화가 오지 않으면 연중 하려고 했던 소설도, 어제 막 40화를 찍었는데 역시나 변화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글이 잘 나오지 않고 말이다.

조금 부럽긴 하네.

“재밌겠다......”

살짝 입맛을 다신 주하린은, 은주와 마저 톡을 나눴다.

어릴 적부터 말도 안 되는 두각을 나타내는 언니 때문에 비교당하며 살았었는데, 이제는 그걸 위로해 주던 소꿉친구들과 자기 스스로 비교하고 있는 자신이 조금은 한심해 보였다.

“산책이나 할까.”

은주와 톡을 마치고 모니터를 빤히 쳐다보는데도 키보드 위에 둔 손이 잘 움직이지 않자, 주하린은 자기 자신에게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뒤 옷장으로 향했다.

소설이 잘 안 써지는 밤이었다.

주하린은 가벼운 겨울용 외출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좀 춥네. 배도 고프고.’

꼬르륵 배가 울렸다. 밖에 나오니 갑자기 맛있는 게 땅긴다.

저녁을 샐러드만 먹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평소에는 좀 덜 하는데.

‘역시 스트레스는 인간의 적이라니까.’

주하린은 원한다면 호텔 내부의 레스토랑에서도 뭔가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이런 밤이라면 10층의 카페도 좋고, 평소라면 3층의 뷔페가 골고루 먹기에는 맛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화려한 식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편의점에서 뭘 사서 들어오든가 아니면......

‘치킨이라도 포장하든가 하는 게 좋겠지.’

터벅, 터벅-

바깥 공기를 마시며 대략 20분 정도를 걸었다. 산책이라고 해 봐야 호텔 별관을 빙빙 도는 것이 끝이었다.

그래도 겨울이라 시원하면서도 근처는 나무들로 빼곡했기 때문에 공기가 참 좋았다.

“그래. 오늘은 치킨이나 먹자.”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온 주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먹는 걸로 주하린에게 잔소리를 자주 듣는 지아가 보면 기절할 말이었지만, 아쉽게도 주하린은 특별히 다이어트를 한다든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평소 관리를 잘할 뿐.

대신에, 그녀는 방까지 돌아가는 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지하 치킨집에서 치킨을 포장한 다음 주하린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1층, 2층 계단을 차례차례 올라가는 와중, 주하린은 3층에 도착해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음? 시상식?’

그녀의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안내판. 3층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내용을 보니 내일 오후 5시. 3층에서 시상식을 진행하니, 3층 뷔페는 조식과 런치만 운영하고 디너를 쉰다는 안내판이었다.

“흐음?”

3층 문을 열고 뷔페 입구로 가보니, 똑같은 안내판이 입구에도 세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가끔 빌려 가지?’

로열 한즈 호텔의 홀들은 워낙 유명해서 단체들이 많이 빌려가곤 하는데, 3층의 뷔페도 특정 타임을 전세 내는 경우가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

유명한 경우로는, 저번에 싱어송라이터 진수아의 강연회가 있었다. 그때 하린은 나가 있었던 지라 보지는 못했지만, 소식 정도는 당연히 들었다.

이번에는 강연회가 아니라 시상식인 모양.

주하린은 좀 더 자세히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아이플레본 제11회 겨울 만화 공모전 시상식?’

아이플레본이라면 꽤 유명한 플랫폼이었다.

생각해 보니 주하린도 본 적이 있었다.

상당히 커다란 규모의 만화 공모전이라 혹시나 참고가 될 게 있을까 싶어서 탐방해 봤는데, 정말 재미있는 만화들이 많았다.

특히, 로맨스 부분에서 주간 1등을 연속으로 차지한 만화가 대박이었다.

그림체도 그림체지만 모든 편에 백그라운드 음악까지 넣어 분위기를 확 사로잡았다.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여기서 수상하면 정식 웹툰으로 연재된다고 하던데.’

주하린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안내판을 마저 읽어보다가, 포장한 치킨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오후는 딱히 일정이 없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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