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7 267화 - 주인공이 공략당함(7)
“어...... 그럼 지금 계좌 이체하면 되나요?”
“네, 이체 완료되면 집주인분이 확인하시고, 서명하시고.”
부동산 아저씨의 말에 따라 은주가 제시된 금액을 이체했다. 이제 몇 개 서류에 서명만 하면 계약은 끝이 났다.
나는 조용한 공기 속에서 예화 옆자리에 앉아 은주랑 하린이가 계약하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으음.
솔직히 조금 놀랐다.
예화가 부동산에 간다고 할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설마 둘이 계약한다는 빌라가 예화가 가진 건물일 줄이야. 어떻게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신이 얼른 하린이와 은주로 소꿉친구 덮밥을 하라고 밀어주는 건가?
아닌데, 신 후보는 히로인 어플을 가진 나잖아. 그렇다면 이것은 운명임이 분명했다.
둘은 내가 예화랑 같이 부동산에 들어간 다음 몇 분 뒤에 바로 도착했는데, 하린이는 내가 약속 장소도 아닌 곳에 있어서 깜짝 놀란 표정이었고, 은주는...... 뭔가 놀란 것 같지는 않은데 뭐라고 해야 할까.
나랑 눈을 마주치니 살짝 몸을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뭔가 우물쭈물했는데 할 말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다 했어요.”
“아유,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끝났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계약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웃으며 말하는 부동산 아저씨에 정은주가 고개를 숙였다.
서류가 오가고, 마지막으로 부동산 아저씨가 몇 마디 하는 것을 끝으로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이제 가면 되나요?”
“네네, 다 되셨어요.”
해산하는 분위기가 되자 예화가 핸드백을 챙기고 은주와 하린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403호가 넓어서 두 분이 생활하시기에 불편함 없으실 거예요.”
“아,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진현아 나 갈게?”
예화는 은주와 하린에게 인사한 다음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예화도 오늘 계약하는 사람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는 상당히 놀란 듯했지만,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린이랑 은주한테는 예화가 내 친구라고 소개해둔 상태였다.
우리는 부동산에서 나왔고, 셋이 남게 되었다.
“......”
“......”
“......”
하린, 은주, 나는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분명히 전에 봤을 때나 톡방에서는 안 그랬는데, 살짝 어색하다.
“음. 일단 카페로 갈까?”
“아, 응. 그러자.”
“그래.”
그래도 내가 먼저 말꼬를 튼 다음, 카페까지 조금 걸으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니 어색했던 공기가 금세 풀어졌다.
“저번에도 봤긴 했는데, 카페 진짜 좋다.”
은주가 카페 1층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둘을 2층의 사무실로 둘을 안내했다. 손님용 방도 넓고 좋지만, 거긴 뭔가 거의 다정이의 개인 만화 작업실처럼 돼 버렸으니까.
“근데 사무실은 왜 이리 크게 만들었어?”
“사무실?”
“응.”
“그거야 뭐, 내가 써야 하니까?”
내 당당한 대답에 은주가 뭐라 할 말을 잃은 사이, 하린이가 물었다.
“그럼 너 다른 사람들 알바 할 동안 너 여기서 노는 거야?”
“그렇지.”
“너는 일 안 하고 계속?”
“응.”
“심심하지 않아?”
“그럴 리가. 레전드 리그 하면 시간 순삭이야.”
“완전 악덕 사장이네.”
하린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간식도 자주 챙겨주고, 시급도 짭짤하게 주고.
가끔 내려가서 상태를 보거나 일도 도와준다.
“왜, 여기서 알바 하게?”
“어? 아, 알바? 아니?”
농담 삼아 하린이한테 물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말을 떨었다.
“농담한 건데 왜 그렇게 당황해.”
“아, 뭐래. 당황 안 했거든.”
어쨌든 둘을 의자에 앉힌 나는, 음료와 함께 가벼운 먹거리를 조금 가져왔다.
“자.”
“아, 고마워.”
“땡큐.”
그동안 어떻게 지냈고, 앞으로는 뭘 하고 지낼 건지.
은주의 유학 생활이나 하린이의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둘은 나에 대한 것도 궁금해했는데, 히로인 어플을 얻기 전은 뭐라고 이야기할 만한 게 없고, 얻은 후는 여자들을 계속 공략하고 다녔으니까.
나는 적당히 옛날에 알바를 하다가 겪은 진상 썰 같은 걸 풀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럼 어디 나가서 뭐라도 먹자. 내가 맛있는 곳 많이 알아.”
카페에 있는 빵으로 식사를 때우기는 좀 그랬다.
휴대폰으로 미리 메모해둔 맛집들의 목록을 찾아보는데, 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근데 나 잠깐.”
“응? 왜?”
“그, 화장실 어딨어?”
“아. 저기 옆에 방 있지? 방 안에 하나 있어. 거기 쓰면 돼.”
“으응, 고마워.”
부동산에서는 예화가 사 온 커피를 마셨고, 여기서도 음료를 마셨으니까.
은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그런 은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하린이는 은주가 문을 닫자 의자를 조금 내 쪽으로 당겨 앉았다.
뭐지 싶었는데 그녀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응?”
“너 은주한테 뭐 잘못했어?”
“잘못?”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주한테 잘못이라니.
요즘 단톡에서도 아주 신사답게...... 는 아니고 그래도 그냥 소꿉친구답게 친근하면서도 적당히 답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왜?”
“그냥...... 너 볼 때 뭐라고 해야 하지. 끄응, 시선이 좀 이상한데.”
그건 나도 느끼긴 했다.
중간에 이상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였지. 특히 부동산에서 예화랑 같이 있을 때 그런 묘한 눈빛이 심했었다.
뭔가 좀 게슴츠레한 그런 눈빛인데, 하린이도 느낀 듯했다.
“별거 아니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치? 뭐 잘못한 거 있으면 사과해.”
“에이, 없어없어.”
“진짜야?”
“리얼 팩트.”
“프.”
하린이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너 옛날에도 그러고서 은주 울렸잖아.”
“뭐? 내가 언제.”
“기억 안 나?”
하린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안 난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엉엉 울지 않았냐고 말하려다가, 뭔가 그러면 옆구리를 꼬집힐 것 같아서 그만뒀다.
“야, 네가......”
하린이는 내가 언제 은주를 울렸는가로 역사 선생님에 빙의한 것처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은주는, 그런 나와 하린이의 모습을 보고 눈빛을 더 묘하게 만들었다.
* * *
묘해진 은주의 눈빛과는 별개로, 어쨌든 오늘 우리 셋은 즐겁게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졌다.
[ 나 : 잘 들어갔어? ]
[ 주하린 : 응, 방금 들어왔어. ]
[ 정은주 : 나도 도착~~. ]
같이 맛있는 음식점에서 배불리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후식을 즐긴 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른 다음 가볍게 산책까지 하고 헤어졌다.
굉장히 즐거운 하루였다.
둘을 정류장까지 배웅한 뒤, 나는 저녁에 예화를 찾았다.
“어, 진현이?”
“자, 샐러드 사 왔어.”
예화는 내가 올 줄 몰랐던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기분 좋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사실 예화가 말해줘서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기보다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녀도 오늘 나랑 우연히 만났을 때는 끝나고 같이 놀 걸 기대했을 것이다.
원래 오늘은 처음부터 하린이, 은주와 만날 약속을 한 날이었지만, 둘과 헤어진 다음에는 예화가 섭섭하지 않도록 밤새 그녀와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하아, 재밌었다.”
“그러게 명작이네.”
같이 영화도 보고.
“읏, 뒤, 뒤로도 해야 돼?”
“해달라고 엉덩이 흔든 거 아니었어?”
“그건, 흐응......!”
야한 짓도 하고.
예화와 만나서 야한 시간을 보낼 때면 항상 엉덩이로 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항상 살짝 내빼는 척하면서 내가 강제로 해주면 미칠 듯이 좋아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예화와 가볍게 몸을 부대끼다 집으로 향한 나는 델리아와 매일 하던 수련을 마치고 수정이와 함께 셋이서 아침을 먹었다.
“오늘도 공포 게임이야?”
“우웅. 오늘은 서바이벌 공포 게임...... 으. 좀비들한테서 살아남으래.”
표정이 좋지 않아서 물어보니까, 역시나 공포 게임이었다.
수정이의 방송은 나날이 잘 되고 있었다. 레전드 리그 시간을 줄이고 종합 게임 쪽으로 가니 수정이의 반응이 훨씬 더 다양해졌다.
캠은 여전히 안 켜고 있지만, 의외로 다정이가 핵심이었다.
만화를 깔끔하고 예쁘게 그리는 다정이의 그림체에 반한 수정이가 먼저 자기 캐릭터를 그려달라고 의뢰를 했고, 다정이는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비용은 돈이 아니라 나와의 데이트 10회였다.
음.
다정이는 수정이 전용 방송 캐릭터를 아주 귀엽고 다양한 표정으로 그려주었으며, 수정이는 그걸 방송과 미튜브에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공포 게임을 하면 목소리가 하이톤이 되어 꺅꺅 소리를 지르는데, 그게 또 미튜브 시청자들에게 아주 잘 먹히고 있어서 최근에는 공포 게임 요청이 아주 많았다.
나도 가끔 생방송을 보고 미튜브는 싹 다 챙겨보는데, 확실히 공포 게임 할 때가 가장 재미있고 조회수도 잘 나왔다.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울상을 짓는 수정이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그녀의 방송용 룸에 앉혀준 뒤, 나는 오픈 예정인 PC방으로 향했다.
혼자 가지는 않았고, 델리아와 함께 갔다.
“아, 이걸 다 설치하면 되나요?”
“응. 좀 많지?”
PC방에는 수백 대의 컴퓨터가 쌓여있었다.
어제저녁에 하린이, 은주와 헤어진 다음 컴퓨터가 줄줄이 도착했는데, 예화한테 가기 전에 전부 받아뒀다.
“이정도는......”
델리아는 뭔가 묘하게 자신감을 불태우는 표정 지었다.
그녀는 아예 혼자 하겠다며 나보고 쉬고 있으라고 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의자에 앉았다.
“저...... 빨리 끝내면 오늘 하루종일 진현님이랑 있어도 되나요?”
델리아가 수줍게 물었다.
애초에 오늘 설치는 하루종일 할 각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델리아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더니 아예 마법으로 컴퓨터를 착착 설치하기 시작했다.
“오......”
한 번에 몇십 개의 박스를 까고, 공중에서 부품과 선들이 연결되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안 하기는 좀 그래서 얼른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작성했다.
[ 크리스탈 PC에서 함께 할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합니다. ]
사실 카페 델리아 아르바이트를 모집할 때는 유정이 누나가 일할 거기도 해서 전부 여자로 받았는데, 이번에는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꽃밭이 좋긴 하지.’
어차피 인첸트 효과 부여 스티커로 여러 가지 긍정적 효과를 발생시키게 되면 진상도 거의 안 나오고, PC방은 카페와 다르게 애초에 예쁜 여자 알바생이 아주 잘 먹힌다.
게다가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도 PC방은 카페와 바로 옆에 있으니까.
말을 듣지 않는 초, 중학생들이 있으면 내가 직접 나설 수도 있었다.
나는 PC방도 카페와 마찬가지로 꽃밭을 만들기로 하며,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마무리했다.
시급은 11,500원.
카페 델리아의 기본 아르바이트생 시급이 11,000원으로 이렇게 되면 카페 델리아보다 PC방 아르바이트생이 높은 시급을 받는 게 되지만, 다음 달이 되어 해가 바뀌면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전체적인 시급을 12,000원으로 올려줄 계획이라 일단은 카페보다 살짝 높게 잡았다.
매니저나 바리스타, 베이커리 부분은 또 저거보다 더 많이 받을 테고.
어차피 돈이야 넘치니까. 알바생 뽑는 것도 행운추적자를 통해 열심히 일할 사람만 뽑는 것이 가능해서 높은 시급을 주는 데에 부담은 전혀 없었다.
“다 됐어요, 진현님!”
“벌써?”
델리아는 1시간도 채 되기 전에 모든 PC 설치를 완료했다.
나는 그녀와 약속대로 오늘 델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은 다음 나를 집으로 데려와 차고 안 차의 조수석 자리에 나를 앉혔다.
“응? 어디 가려고?”
“후흣, 비밀이에요.”
델리아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더니 내가 그녀에게 선물해준 차를 몰기 시작했다.
델리아는 얼마 전에 손쉽게 운전면허를 땄다.
운전 실력도 아주 발군이고, 수정이는 아직이긴 했지만...... 델리아한테 배우면 금세 딸 수 있을 것이다.
예화도 그렇고 델리아도 그렇고.
미녀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타서 드라이브를 즐기는 건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나는 PC방에서 나오면서 카페 델리아에 잠깐 들러 얻은 음료와 과자를 먹으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델리아를 바라보다가를 반복했다.
델리아는 내가 볼 때마다 살짝 수줍게 웃었지만, 운전의 집중력을 잃지는 않았다.
“도착했어요.”
“어? 백화점?”
델리아는 30분 정도 운전했다. 그녀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말했는데, 위쪽으로 커다란 건물이 펼쳐져 있었다.
“네. 이 백화점 옆 건물에 커다란 의상 상가가 있어요.”
델리리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거기에 그, 코스프레 샵도 엄청 많은데......”
“아.”
델리아의 표정과 말투를 본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수정이나 델리아랑 할 때는 코스프레를 한 채로 많이 즐기니까.
인터넷에서 구매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가서 의상을 입어보거나 몸에 대보고 결정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재질 같은 것도 느껴보고.
좋네, 좋아.
“그럼 갈까?”
“네......”
나는 델리아의 손을 잡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 * *
뒹굴뒹굴-
“헛, 벌써 시간이 이렇게......!”
침대에서 멍을 때리며 뒹굴거리던 정은주는 시계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시간이 없다.
아무리 음악 미튜버라도 준비할 건 준비 해야지.
재빠르게 화장을 마치고 옷을 챙겨입은 정은주는 핸드백을 챙긴 뒤 방에서 나와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응? 어디 가니? 오늘도 하린이랑 진현이 만나?”
“아닝~.”
“그럼?”
“그냥 혼자서 쇼핑 하려고. 히.”
기분 좋아 보이는 딸의 모습에 정은주의 엄마 유지숙은 피식 웃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현관을 나서려고 하는데 정후일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빠랑 같이 갈까?”
“뭘 같이 가. 갔다 올게!”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아빠의 얼굴을 치워버린 정은주는 현관문을 나섰다.
외국에서 쇼핑할 때는 대부분 지나나 예슬이랑 같이 다녀서 혼자 쇼핑하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다.
어제 막 만난 하린이나 진현이를 오늘 또 부를 수도 없고, 무엇보다 쇼핑 내용이 소꿉친구들한테 보이기에 좀 창피하기도 했다.
‘요즘 유행하는 의상들...... 그리고 커스텀 의상도 맡겨야 하는데. 그리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스튜디오도 구해야 하고...... 으, 바쁘다 바빠.’
정은주는 코스프레를 하고 가면을 쓴 다음 음악을 커버하는 미튜버였다.
외국에서 가져온 코스프레 의상들이 있지만, 이번에 새로 커버할 곡들은 새로운 의상을 입어야 한다.
게다가 정은주는 피아노가 없었다.
평소 연습용으로 사용하던 피아노는 보스턴 기숙사에 놓인 200만 원 이하의 피아노라 올 때 중고로 처분했고, 미튜브 영상 촬영은 음대의 아무도 없는 그랜드 피아노 룸을 빌려서 촬영했었다.
플롯이나 바이올린은 몇천씩 하는 워낙 비싼 애들이라 올 때 들고 왔지만, 연습용 피아노랑 미튜브를 촬영할 스튜디오는 지금부터 구해야 했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의상부터.’
정은주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오늘 가는 곳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코스프레 샵이 있는 대형 의상 상가.
한국에서 코스프레 샵을 가는 건 처음이지만, 외국에서는 지나나 예슬이와 함께 많이 가봤기 때문에 어색할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후, 넓다아.”
지하철역에서 내려 조금 걷자 커다란 백화점이 보였다. 그 바로 옆 건물에 코스프레 샵이 있었다.
정은주는 얼른 발걸음을 움직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코스프레 샵이 있는 층들에 도착해 조금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
뭐가 많기는 했다. 미국에 비해 규모는 확실히 작지만, 은주는 그래도 꽤 괜찮은 의상을 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기대에 부풀어 이곳저곳을 돌아봤다. 그렇게 여러 섹션을 둘러보던 찰나.
팍-
“아야앗......”
정은주는 그만 한눈을 팔아 코너를 돌 때 누군가와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살짝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으, 아파라.’
은주는 살짝 이마를 문지르고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는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괜찮으세...... 어?”
“네, 괜찮...... 어?”
그리고 정은주는 자신에게 손을 내민 상대와 그 옆의 금발 여자를 보며 살짝 벙찐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