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어플-264화 (264/303)

EP.264 264화 - 주인공이 공략당함(4)

“후우우.”

뜨거운 무언가가 몸속 기혈을 타고 흐른다.

우우우웅-

따뜻하고도 신비로운 기운.

온몸 구석구석을 빠르게 돌고 있는 이 특별한 기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각적으로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몸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리염기공의 기.

히로인 어플의 상자를 통해 얻은 심법으로, 나는 매일매일 이 책자를 통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내 몸을 얇게 덮고 있는 기를 피부로 느낀 나는 이내 눈앞의 철판을 향해 내공을 두른 팔을 휘둘렀다.

쉬이익-

파아앙-!

델리아의 힘으로 공중에 떠 있던 철판.

일반 사람의 주먹이라면 아무런 데미지도 입지 않은 채 본래의 형태를 유지할 테지만, 내 주먹과 만난 철판은 부욱, 하고 종잇장처럼 찢어져 그 원형을 잃었다.

나는 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땠어?”

“아, 위력도 상당히 늘었어요. 훌륭해요. 진현님.”

내가 무사히 철판을 찢자, 델리아가 기쁜 표정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기를 제어하기도 어려웠던 이전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매일같이 수련을 도와주고 있는 델리아 입장에서는 뿌듯함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솔직히 현실에서는 뭐 싸울 일 하나 없긴 하지만, 델리아의 말대로 몸을 단련해 놔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다 리아 덕분이야.”

“아니에요. 다 진현님이 열심히 하신 덕분이에요.”

“리아 덕분이라니까.”

“아니에요. 진현님이......”

투닥투닥.

델리아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 천리염기공의 수련을 마친 나는 그녀와 같이 샤워하며 꽁냥거리다가 난방을 빵빵하게 켠 거실로 나왔다.

비단 발전한 것은 천리염기공 뿐만이 아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수련을 했는데도, 몸이 아주 개운했다.

신체 능력도 나날이 늘어가, 이제 내 몸은 히로인 어플로 80대 중후반 능력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맨 처음 죄다 30대를 기록했던 능력치들을 떠올려보면 굉장한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넘쳐나는 히로인 어플의 코인을 전부 사용한다면 지금의 80대보다도 훨씬 더 높은 능력치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는 딱히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히로인 어플에는 이자 시스템도 있고 하니까.

아직은 코인을 묵혀두며 더 불려 나가는 게 이득이 아닐까 싶었다.

“하우아아...... 좋다.”

털썩-

거실 소파에 앉아 쉬고 있자, 어느덧 수정이가 다가와서 내 무릎에 얼굴을 대고 누웠다.

“뭐야, 옷 안 입어?”

“왜에에, 이러고 있는 게 편한걸.”

“흐. 좀 더 가까이 와.”

“히히.”

델리아는 부엌에서 간식을 챙기고 있었고, 나는 수정이의 머리칼을 살살 쓸었다.

사랑스러운 여자들도 생겼고, 돈도 많이 벌고 있다. 부모님에게도 상당한 용돈을 드리고 있어, 관계가 더욱 좋아진 느낌이다.

정말 히로인 어플을 얻기 전과는 많은 것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 와중에 히로인 어플을 얻기 이전의 나와 비교해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게 소꿉친구들과의 관계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은주 그리고 하린이.’

속으로 이름을 부르자, 자연스럽게 둘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하린이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정확하게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기 몇 주 전.

어렸을 적 나와 은주는 굉장히 자주 붙어 다녔는데, 같이 놀지 않는다는 게 어색할 정도였다.

동갑의 사촌지간이기도 했고, 집도 가까웠으니까.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은주와 함께 모래놀이를 하기 위해 공원에 들른 날.

원래라면 아무도 없어야 할 공원에, 혼자 그네를 타고 있는 웬 여자아이 한 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요 근처에서는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이기도 했고, 뭔가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나는 친절히 먼저 말을 걸었다.

[ 어? 야! 거기 우리 자린데? ]

는 거짓말이고......

일단 다짜고짜 나오라며 시비부터 걸었다.

항변하자면, 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경계심이 좀 강했다고 할까......

어렸을 적 나와 은주는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 자주 들렀고, 미끄럼틀과 그네만 있는 작은 공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그 공원을 뭔가 둘만의 아지트 느낌으로 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그것도 내 나이 또래의 좀 만만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런 아지트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뭔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라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 흐윽, 흑...... ]

솔직히 근데, 바로 울 줄은 몰랐지.

지금 생각해도 내 말투가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소리를 치자마자 그네를 타고 있던 여자아이는 움직임을 멈추고 울먹거리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굉장히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 어? 야아...... 너 울어? ]

[ 흑, 흐윽, 훌쩍...... ]

한참 동안을 달래도 계속 우는 바람에 굉장히 진을 뺐던 기억이 있다.

은주도 당황해서 같이 열심히 달래줬었다.

아무튼, 그렇게 겨우겨우 여자아이의 울음을 달래고 우리는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제 눈물 안 나오는 거지? ]

[ 으응...... ]

[ 그런데 너 왜 운 거야? ]

[ 어, 그게...... ]

[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자. 나는 천진현이야. 너는? ]

[ 나아...... 나는 하린이야. 주하린...... ]

굉장히 오래전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첫 만남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하린이와의 만남 자체가 강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를 해보니 하린이가 울었던 이유는 부모님한테 혼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니랑 비교당했다나 뭐라나.

슬퍼서 집에서 뛰쳐나와 나와 공원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를 만났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와 은주는 하린이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또 나나 은주도 하린이에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찌어찌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왜 어릴 적에는 눈만 맞아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딱 그랬다.

하린이는 어느덧 웃음을 되찾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 공원에서 모이기로 우리와 약속까지 나눴다.

물론 아쉽게도, 하린이가 공원에 들른 횟수는 몇 번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린이는 딱히 그 약속 자체를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몇 주일 뒤 나와 은주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는데, 그 초등학교의 같은 반에서 하린이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 어? 너 여기 다녀? ]

[ 아. 진현아, 은주야. 으응......!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무리를 이끄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하린이나 은주 앞에서는 되게 용기 있게 행동했다.

아마 진짜로 친한 친구가 그 둘 뿐이라서 뭔가 둘을 잃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컸던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우리는 셋이서 다 다른 반이 되기도 하고, 셋 중에 둘만 같은 반이 되기도 했다.

하나 반이 달라도, 항상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에 매일같이 만나서 꼭 같이 놀고는 했다.

그 덕에 하도 붙어 다닌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

비록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은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하린이도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면서 멀어졌지만, 거의 6년가량을 딱 붙어있었던 덕분에 함께 지냈던 기억은 참 생생했다.

굉장히 행복한 기억이다.

생각해보면 남자와 여자가 6년 동안이나 붙어있었으니, 뭔가 간질간질하게 은주, 하린이와 오묘한 감정의 교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뭐 사귀자 이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하린이나 은주는 잘 몰랐겠지만, 나는 둘을 꽤 좋아했었다.

그런데, 초등학생 때는 이상하게도 둘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으면서도, 여자랑 사귄다는 건 뭔가 부끄러운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둘에게 딱히 좋아한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은주는 사촌이니 안 된다고 쳐도, 하린이한테까지.

아이고.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어리석기 그지없는지.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중, 고등학교로 넘어간 후만 하더라도 땅을 치고 후회했었다.

그때 하린이를 잡았어야 했는데! 하고 말이다.

설마 내가 전설의 남중, 남고, 군대 테크를 타고 여자친구 한 명 사귀지 못한 채 틈만 나면 일어나서 섹스섹스거리는 발정 난 미연시 플레이어가 될 줄은 몰랐지.

그렇게 나와 하린이, 은주의 인연은 그대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 정은주 : 일어났어? ]

[ 주하린 : ㅇㅇ ]

[ 주하린 : 진현아, 오늘 약속 3시인 거 알지? ]

“몬가...... 몬가가 일어나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울리는 톡 알림을 보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멈춘 줄 알았던 관계가 지금, 조금씩 변하려고 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린이와 은주쪽에서 내게 먼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의 톡도 나랑 하린이, 은주가 포함된 세 명의 단톡에서 나오는 메시지들이었다.

으음. 행운추적자를 하도 썼더니 나도 럭키가이가 되어 버린 것인가?

보스턴에서 은주를 잠깐 만난 것도 우연. 하린이가 카페를 찾아온 것도 우연이었다.

나는 그녀들을 만나기 전까지, 둘이 나를 싫어하거나 아예 잊어버린 줄 알았다. 애초에 그동안 연락 자체를 한 번도 안 했으니까.

심지어 이 근처로 이사 온다고까지 했는데, 이게 진짜 꽤 얼떨떨했다.

‘나 아직 둘 히로인으로도 등록 안 했는데......’

정확히 말해서, 안 했다기보다는 못했다는 말이 맞았다.

현재 내 등급은 8등급.

하린이와 은주에게 인연의 실을 꽂아 히로인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해 보아도, 예화 때처럼 등급이 부족하다는 메시지만 나올 뿐 연결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둘은 히로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도전 퀘스트도 워낙 많이 깼고, 12월 22일날 있을 시나리오 퀘스트만 깨고 나면 이제 7등급으로 승급하는 것이 가능했다.

델리아의 말에 따르면 7등급으로 승급하고 나면 상점에 아이템이 추가되는데, 그 아이템들 중 하나를 구입해 사용하면 하린이와 은주를 히로인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7등급으로 승급한 뒤, 둘을 히로인으로 등록하고 난 다음에 공략 스타일 뜨는 것도 보고 좀 천천히 구워삶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정은주 : 알겠지. 설마 까먹었겠어? ]

[ 주하린 : 근데 어제 밤부터 쟤 톡 안 보잖아. ]

[ 정은주 : 아직 자고 있는 거 아니야? ]

[ 주하린 : 그런가? ]

굳이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알아서 기회가 막 찾아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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